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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Aug 13. 2024

시나리오작가 이정선과 《스크린》

영화사가 노만 42

잡지 《스크린》 1956년 11월 창간호 표지. ⓒ kmdb


"《국제영화》의 '혁신'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봉희 사장과의 갈등이 생겼다. 박봉희는 내게 투자한 비용이 브로마이드 인쇄비와 잡지 홍보비로 나갔다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둘러대며 급여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표지모델로 나온 '혁신호' 한 호를 끝으로 《국제영화》 편집장을 그만 두었다.

얼마 후, 시나리오작가 이정선(李貞善, 1921~?)의 제의를 받아 잡지 《스크린》창간 멤버로 합류했다. 1956년 10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1921년생 대구 출신으로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에서 문학을 전공한 이정선은 독립신문, 연합신문, 한성일보, 태평신문, 국제신문 문화부장과 기자를 거쳐 1954년 잡지 《신영화》 편집장을 시작으로 영화잡지에도 참여했다. 이 무렵 그는 <격퇴>(1956, 이강천 감독), <천추의 한>(1956, 안종화 감독), <지옥화>(1958, 신상옥 감독),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신상옥 감독) 등의 영화 각본을 썼고 1970년대 초반까지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화 기획자, 제작자로도 활동하며 영화계 여러 분야에 관여하기도 했다. 활동 범위가 넓었던 그는 언론계를 비롯해 문학계, 영화계에 발이 넓었다.

내가 기억하는 이정선은 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신사'였다. 전창근, 유현목 감독과 함께 영화계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와의 인연은 나중에 그가 각본을 쓴 <광야의 왕자 대 징기스칸>(1963)에 내가 투자자로 참여하게 되기까지 이어졌다. 잡지 일을 함께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그의 동생 이이녕(李二寧)과 셋이서 시나리오 작업을 같이 한 적도 있었다. 결국 그 작업은 시나리오가 완성되기도 전에 무산되었지만. 밤낮 그와 함께 어울렸고 그만큼 가까웠다. 그는 잡지 주간을 맡기로 하고 나는 편집장을 맡았다.

《스크린》 본사 사무실은 중구 정동2가 4번지 영락빌딩 208호에 있었다. 조만식(曺晩植, 1883~1950)이 당수로 있던 조선사회민주당, 약칭 '조민당' 당사가 있던 건물이었다. 《스크린》은 그 맞은 편에 서울지사를 두고 있던 조화주조주식회사(造花酒造株式會社)의 투자를 받아 발간되었다. 충남 논산에 본사를 두고 있던 조화주조는 '조화(造花)'라는 이름의 청주(淸酒)를 생산하여 크게 히트하고 있었다. 잡지는 정기적인 고정 독자 구독료나 판매 부수 보다는 광고비와 조화주조의 지속적인 투자로 발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잡지 일을 하면서 월급도 타보았다. 인쇄는 신영문화(新映文化)와 《국제영화》의 옵셋 인쇄를 했던 국제문화인쇄주식회사에서 이루어졌다.

《스크린》의 발행인이자 투자 경영은 조화주조의 대표 유태현(劉泰鉉)과 사장 신중현(申仲鉉)이었고, 후에 조경운(趙京雲)이 합류했다. 잡지 편집 실무진으로는 주간 이정선과 편집장 노만, 기자 김시춘(金時春)과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 나지 않는 도안사, 편집장 천백원(千百元)이 있었다.

조경운은 1957년 초부터 잡지에 합류했다. 그는 조화주조 서울 지사 사장 임창순(林昌淳)의 친구로, 그 인연으로 잡지 재정 관리와 투자를 담당했다. 《국제영화》에서 함께 일했던 김시춘과 천백원도 《스크린》 창간에 합류했다. 이들의 합류를 이정선이 제의했는지 내가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춘은 본래 평안도 출신으로 전쟁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했고 대학을 나온 사람은 아니었다. 나보다 2~3살 위였다. 영화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일본어에 능통해서 일본 영화잡지 기사 번역을 다수 담당했다. 김시춘과는 취재에서부터 잡지 편집, 인쇄에 까지 잡지 발간의 모든 과정을 함께 했다. 천경자 화백의 먼 친척이었던 천백원은 잡지계에서 줄곧 종사하던 인물이었다.

김시춘이 어떤 사정에 의해 잡지사를 그만 두고 들어온 신입 여직원이 엄경은(嚴恩)이었다. 1933년생으로 나보다 2살 위였던 엄경은은 무학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한때 시인을 지망하기도 했고 동 대학원을 그만두고 《스크린》에 입사했다. 엄경은은 주로 외국 영화잡지, 특히 일본 영화잡지 기사 번역을 담당했다. 《스크린》이 폐간한 이후 엄경은은 여원사(女苑社)로 직장을 옮겼다. 직장 동료 사이로 지내던 엄경은과 나는 1년 뒤 연애를 시작했고 1959년 5월에 약혼하여 그해 11월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에는 1970년 무렵까지 동아방송 라디오 리포터로 일하기도 했다."

(좌) 조화주조의 '조화' 신문광고 (우) 왼쪽부터 노만, 영업담당, 이정선, 천백원. 1957년 잡지 <스크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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