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스크린》1956년 11월 창간호 신문광고 (《경향신문》1956년 10월 2일 1면 광고)
"《스크린》은 창간호부터 다양한 필진들을 섭외했다. 이정선과 나를 비롯한 편집진들이 잡지의 기획과 취재, 주요 기사 작성, 발행에 이르기 까지 대부분의 과정을 담당했지만, 그 외의 글들은 대부분 명동을 드나들며 알게된 영화인들과 이정선의 인맥으로 채워졌다. 그 중에는 영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언론인들과 문학인들이 다수였다.
소설가 이봉구(李鳳九, 1916~1983), 조풍연(趙豊衍, 1914~1991), 김광주(金光洲, 1910~1973) 선생은 영화 기자 입문 시절부터 명동을 오가며 자주 뵙던 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 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분들이었다. 조풍연은 '하소(夏蘇)'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집필했고, 아세아영화제와 관계된 아세아재단에 소속되어 잡지가 주최하는 각종 좌담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김광주 선생은 《스크린》에 '영화소설' <내일이 없는 여인>을 연재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역임한 오종식(吳宗植, 1906~1976), 시인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이정선과의 친분으로 다수의 영화 기사와 번역을 맡았다. 수필가 조경희(趙敬姬, 1918~2019)와 정충량(鄭忠良, 1916~1991)은 모두 당시 활발한 여성 운동을 하던 '여걸'들이었다.
영화인으로는 《스크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냈던 동갑내기 김사겸(金仕謙, 1935~)이 있었다. 마산 출신의 그는 영화 평론과 신문 기자로 출발하여 이후 유현목 감독의 연출부를 거쳐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 밖에, 영화 수입상사였던 불이무역주식회사(不二貿易株式會社)의 전홍식(全洪植)이 '본지 동경지사장' 직함으로 1957년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 참관기를 기고하기도 했고, 국제극장 선전부장이었던 서정하(徐廷夏), 제작자 정화세(鄭和世), 영화감독 김소동(金蘇東, 1911~1988) 등이 필자로 이름을 올렸다.
'입사(笠史)'라는 필명을 쓴 음악평론가 박용구(朴容九, 1914~2016)도 필진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박용구는 일본에서 원고를 보내왔다. 나중에 박용구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작품인 <살짜기 옵서예>를 제작한 '예그린악단' 단장을 역임했다.
역사가 김화진(金和鎭) 선생 역시 이정선과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그는 《스크린》 1957년 5월호에 <내가 본 금석의 영화: 고종황제 40년대 대궐 안 환등대회>라는 글을 기고했다. 김화진 선생은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 자신의 개화기 시절 활동사진 경험에 대한 글을 썼다.나중에 『한국영화사』를 쓸 때 인용한 그의 증언은 한국영화 초창기 역사를 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전 《영화세계》, 《국제영화》와 《스크린》이 확연히 달랐던 점은 잡지 필자들에게 제때 고료를 지급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계 뿐만 아니라 언론계, 문학계 등 다양한 필진을 섭외할 수 있었고 원고 약속이 '펑크'나는 일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잡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나자 조화주조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조화주조가 생산하던 '조화'가 전북 군산의 대한양조주식회사(大韓釀造株式會社)의 '백화'(白花)와의 판매 경쟁에서 밀리면서 잡지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조화주조의 경영과 투자가 중단되었다. 이듬해인 1958년 1월 《스크린》은 《신영화》지(誌)와 합병되었다. 나는 그해 2월 대학을 졸업하고 4월 군에 입대하기 직전까지 《스크린》에 몸담았다."
1957년 3월 28일 명동 유화정에서 열린 '<스크린> 주최 팬과 영화인의 신춘방담' 좌담회에서 노만(왼쪽에서 세번째). 스크린 1957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