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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Aug 22. 2024

<한국영화배우변천사>(1964) ③

영화사가 노만 49

영화 <복지만리>(1941, 전창근 감독)의 배우 전옥(좌)와 심영(우)

(②에서 계속)


청초 애련의 히로인들


  일제 치하의 생활상은 비참 그대로였다. 특히 실향민의 귀착지였던 간도, 1928년의 천재에 의한 이향민의 속출 등은 영화에서도 크게 반영되었다. 당시 한국영화는 어떠한 작품에도 생활에 지 멍청히 앉은 장면이 있었다. 이러한 비극적 인간상은 청초.애련형의 배우를 요구했다.

  <아리랑>으로 등장한 신일선을 비롯하여 <들쥐>의 전옥 등은 십대의 소녀로 데뷰했다. 김연실 역시 나운규프로의 <잘있거라>에 선을 보이면서 자란 여배우였다. 이 세 여배우는 비극적 여인상으로 분연하여 당대 톱.크라스의 스타아 였다.

  신일선은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으니 조선예술단 김문필 일행의 일원이었다. 성악가 김형준에게 개인 교수를 받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았던 중 이경손에 의해 '픽.엎'된 여배우였다. 그래서 이경손의 <봉황의 면류관>에 계속 출연하고 <들쥐>, <금붕어>, <괴인의 정체>로 그 청초하고 애련한 모습에 관객을 열광시켰고 <먼등이 틀 때>를 마지막으로 잠시 은막에서 은퇴했다. 그 후 다시 <청춘의 십자로>, <은하에 흐르는 정열> 등에 출연했으나 초기와 같은 명성은 얻지 못하고 말았다.

  전옥 역시 <사랑을 찾아서>, <옥녀> 등 나운규 작품에 출연하며 대성했으나 그 후 무대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김연실 역시 나운규프로에서 출발 <옥녀>를 거쳐 <세동무>, <승방비곡>, <수일과 순애>, <전과자> 등에 출연하여 톱.스타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소영, 문예봉, 김신재 등의 신인의 등장과 함께 일선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밖에도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유랑>, <숙영낭자전> 등에 주연한 조경희, 문인 출신의 김명순 등이 있었으나 대성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이러한 여배우들이 활약하고 있을 때 조선키네마의 <뿔빠진 황소>로 데뷰, <방아타령>에 주역으로 혜성과 같이 나타난 김소영이 있다. 김소영은 영화사상 대표적인 여배우의 한 사람이다.

  "김소영! 우리영화 사십년 역사를 통털어, 아니, 우리 스타아 변천사에 뚜렷이 기록되는 김소영의 발자취는 현란하기가 그지없다. 반반한 그 얼굴만으로도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유형을 대표하는 여배우로서, 그 정통을 계승하는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안종화도 이렇게 격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연기자 생활은 근 20년을 헤아렸고 <심청>, <국경>, <반도의 봄>, <지원병>, 그리고 <수우> 등에 주연을 함으로써 그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다.

  김소영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 많은 여배우가 있었지만 김소영이 등장하면서부터 김소영을 따를 수 없어, 제2선으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된 여배우가 많았다.

  김소영과 같은 시기에 문예봉이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데뷰했다.

  무대 출신의 그녀는 그 후 토오키 <춘향전>을 비롯하여 <아리랑고개>, <애련송> 등의 토오키 영화에 출연했다.

  한국의 '쟈네트.게이너'라고 불리우던 현순영이 <강건너 마을>, <바다여 말하라>, <대도전>, <청춘부대>, <성황당> 등으로 8.15 이전까지 활약했다.

  김신재 역시 <심청>, <도생록>, <수심가> 등으로 일제말기에 활약했다.

  이밖에도 복혜숙을 비롯하여 이애련, 김선영, 현방란, 노재신 등이 주연급으로 활약했다.


미남 미녀 쾌남아들


  일제 하에서 발표된 작품의 주인공은 오락영화에도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 많았다. 여주인공이 가냘프고 애조 띠운 여인상이었다면 굳굳이 살아가는 것이 남주인공이었다.

  비록 상징성을 띠웠다 하더라도 그 내면의 세계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이 없을 수 없었으니 여기에 등장한 배우들은 또한 다양한 형의 연기자들이었다.

  정기탁은 백남프로에 연구생으로 전창근과 함께 가담하여 <산채왕>에서는 일약 주역으로 등장한 호남아였다.

  그는 일찍이 상해에서 음악, 운동(야구, 축구 단거리 선수였다)에 전념했고, 귀국 후 영화계에서 투신하고는 직접 제작까지 담당한 인물이었다. <봉황의 면류관>에서 제작 주연한 이래 <금붕어>, <춘희> 등에 출연했다. 그러나 아깝게도 투신 자살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월영은 무대 출신의 연기자로 <운명>에 데뷰하여 <불망곡>, <나의 친구여>,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등에 주연을 했다.

  그는 미남형의 배우로 당시 가장 멋장이 연기자의 한사람이었다.

  이 서월영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호남아가 있으니 이원용이었다. 그는 복혜숙과 <세동무>, <낙화유수>를 거쳐 <종소리>에 주역을 맡아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역시 운동을 즐겨 유도, 승마의 명수였다.

  또한 의협의 사나이로 즐겨 그러한 역할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종소리>에서 역시 애인의 원수를 통쾌히 갚는 역할이었다. 그 후 <청춘의 십자로>, <은하에 흐르는 정열>, <인생항로> 등의 작품에서 신일선, 문예봉과 출연했다.

  이원용의 뒤를 이은 배우가 전택이였다. 전택이는 <강건너 마을>에서 데뷰하여 <성황당>에서 주역으로 등장했다. <창공>, <거경전> 등에 출연했으나 해방 후의 활약이 더 많았다.

  이 밖에 임운학, 임화, 왕평, 김일해 등이 각각 개성있는 연기자로 등장했다.


해방의 감격


  일제에서 벗어나서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작 편수도 증가했다. 이리하여 다채로운 작품 내용에 많은 신인이 등장했다.

  해방의 감격과 함께 발표된 <자유만세>에는 전창근, 김승호, 황려희 등이 등장했다. 전창근은 오랜 상해 생활에서 돌아와 <복지만리>란 작품을 감독한 바 있었고 그 작품에는 유계선이 데뷰했다. 전창근, 유계선 컴비는 <그 얼굴>, <여인>을 내놓았다.

  <죄 없는 죄인>에서 최지애가 등장하면서 <독립전야>, <파시>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주증녀 또한 <조국의 어머니>, <여성일기>, <놀부와 흥부>에 주인공으로 나타났다.

  이집길은 <성별을 뚫고>로 데뷰, 그 멋진 마스크로 <그들의 가는 길>, <끊어진 항로> 이후 <출격명령>, <열애> 등에 등장 열연을 보여주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이집길의 상대 역으로 나왔던 염매리는 <민중투표>로 데뷰, <화랑도>, <출격명령>, <열애>로 빛났으나 오래지 않아 영화계를 등지고 도미했다.

  또한 조미령은 <갈매기>에서 데뷰, 최은희는 <새로운 맹세>, <마음의 고향> 이래 현재까지도 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6.25 이후의 개화기


  6.25 사변으로 인하여 영화계는 잠시 마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중에, 1955년 한국영화의 면세조치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고, 년간 백여편이란 생산을 가져왔다.

  노경희는 전택이와 함께 <수우>에 출연한 이래 <내가 넘은 삼팔선>, <출격명령>, <피아골>, <막난이 비사>, <애인>, <애원의 고백>, <실락원의 별> 등으로 호조를 보였다.

  조미령 역시 <춘향전> 이후 <아리랑> 등으로 톱.크라스를 유지했고 문정숙은 <애정산맥> 이래 <유전의 애수>, <꿈은 사라지고> 등을 거쳐 지금껏 거재하며, <집없는 천사>에서의 이민자 역시 <아낌없이 주련다>에 이르기까지 주연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황혼열차>에서 데뷰한 김지미, <단종애서>에서의 엄앵란 등이 등장함으로써 일선에서 후퇴하는 감이 없지 않다.

  <화랑도>, <춘향전>의 이민은 <청실홍실>, <모정>, <비오는 날의 오후 세 시> 등으로 호조를 보였으나 <피아골>에서의 김진규의 등장, <주검의 상자>에서 최무룡,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서 김석훈 등의 출현으로 인해 후퇴를 면치 못하고 있다.

  <과부>로 데뷰한 신영균, <백사부인>의 신성일은 혜성과 같이 나타나 톱.스타아로 군림하고 있다. 특히 신성일, 엄앵란 '컴비'는 <청춘교실> 이후 붐을 형성하고 있어,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의 지반을 흔들고 있다.

  신성일, 엄앵란의 인기가 얼마나 갈는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나, 관객은 곧 이들을 신이과 대치시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방성자, 김혜정, 태현실, 손미희자, 이상사, 김운하 등 허다한 '스타아' 들이 명멸했지만 아직 이들에 대해 기술할 때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 지난 해부터 갑자기 붐을 일으킨 청춘물이란 순풍을 타고 급조된 스타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혜성처럼 나타났다고 할 만큼 특기할 만 한 스타아는 김지미 이후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다만 신성일, 엄앵란 컴비를 출연시킬 경황이 없어 그와 대등할 청춘 스타아를 억지로 비졌다 할 수 있는 스타아가 몇 있지만 급조된 만큼 급변할 우려도 없지 않은 것이다.

  훈련된 스타아들이 아니고 현장에서 훈련을 쌓아야 할 형편인지라 이들에 대한 수명은 더욱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김도산에서 신성일까지 이월화에서 엄앵란까지를 따지고 보아도 숱한 스타아들이 명멸했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옛날의 스타아들에 비해 현재의 스타아들이 생활이 부유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영화가 산업으로서 발전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청춘물이 가고 다시 멜로드라마로 환원될 마당에 생각해볼 때 현금의 스타아 계보가 어떻게 변화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때, 신영균이 데뷰 직후에는 그를 위해서 시대극 붐이 도래해주었다. 그만큼 그는 운이 좋은 스타아였다.

  그러나 신성일, 엄앵란은 청춘영화의 붐을 탔을 뿐이다.

  이렇게 흘터보니 사십년동안 많은 스타아들이 기라성처럼 화려하게 명멸했다. 역사와 함께 별들은 끊임없이 명멸할 것이다.


(잡지 실버스크린 1964년 11월호, 78~83쪽)

배우 신성일 엄앵란 '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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