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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Aug 21. 2024

<한국영화배우변천사>(1964) ②

영화사가 노만 48

영화 <수선화>(1940, 김유영 감독)에서 배우 김신재(우)와 김일해(좌)

(에서 계속)


변사와 기생이 배우로


  한편 이월화, 김우연과 함께 출연한 남배우로는 안종화가 있었다. 안종화 역시 무대 출신의 연기자로 당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나 그 후 신인 양성에 전력하다 감독으로 전향했다.

  안종화보다 일년 먼저 등장한 배우가 김조성이었다. <춘향전>에서 '이몽룡'으로 데뷰한 김조성은 당시 인기있는 변사였다. 원래 이 변사란 영화의 해설자였으나, 관객이 이들의 재담에 매혹되어 영화감상보다 오히려 변사의 구변을 구경하러 가는 경향까지 보였다. 이렇게 변사란 당시 인기있는 직업이었다. 김조성은 미남 변사로 인기가 높았고 <춘향전> 이래 신파 무대에서도 섰다.

  김조성과 함께 <춘향전>에 등장한 여배우가 한룡이란 예기였다. '춘향'으로 분연한 한룡은 당시 인기있는 기생이었으니, 예기란 곧 기생을 말한다. 예기들은 당시 권번이란 기생학교(기생조합)에서 떄때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대동권번이나 경성5권번 등은 그 당시 대표적인 기생들의 단체로 단성사냐 조선극장의 무대에서 구극이나 무용 등을 공연하여 인기가 있었다. 특히 조선극장 개관 프로에 이 기생들이 출연할 만큼 그 인기가 높았으니, 이들을 예기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기들을 영화에 등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예기의 영화 출연은 그 인기에도 있었지만 그 당시 여배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기 한룡이 등장하자 계속해서 <장화홍련전>에 김연희, 김운자 등이 데뷰했다. <쌍옥루>에서는 김소진이란 기생이 데뷰하여 <멍텅구리>에도 주연을 했다.

  나운규가 '픽.엎'한 유신방 역시 기생 출신의 여배우였다. 유신방은 나운규프로덕션의 <사나이>에 데뷰하여 <벙어리 삼룡>, <철인도>, <은하에 흐르는 정열> 등에 출연했다. 얼굴이 갸름한 유신방은 청초한 맛을 풍겨주는 연기자였다.

  유신방보다 약간 먼저 등장한 안금향 역시 명월관 기생으로 <혈마>(미개봉)에 데뷰했으나 대성하지 못한 채 시들고 말았다.


일인이역의 넌센스


  영화제작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섰을 때, 윤백남과 함께 신극 운동에 가담했던 신소설 작가 조일제가 계림영화협회를 설립했다. 여기서 제작한 <장한몽>은 일본인 배우 주삼손이 주연이었다. 본래 주삼손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영화계에 투신하여 미남 배우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일본인의 한국영화 진출은 이밖에도 많았으나 주삼손만이 유독 빛났을 뿐이다.

  주삼손은 <장한몽> 촬영 도중 행방불명이 되어 영화제작은 잠시 중단시키고 그의 행방을 찾았으나 묘연했다. 하는 수 없이 주삼손 대신에 다른 사람을 등용치 않을 수 없게 됐다. '픽업'된 인물이 심훈이었다.

  심훈은 그 후 <먼동이 틀 때>의 감독으로, <상록수>의 작자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당시는 신문기자였다. 심훈이 주삼손의 역인 '이수일'로 분연하여 작품이 완성됐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개봉하자 관객은 어리둥절 했다. 주인공 '이수일'의 얼굴이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인 때문이었다. 즉 일역이인이란 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제작비 관계로 주삼손이 출연한 부분을 심훈으로 재촬영을 않고 그냥 미촬영한 부분 만을 촬영 완성했던 까닭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야기시킨 주삼손은 그 후 계속 호조를 보여 나운규와 함께 <잘있거라>, <옥녀>, <들쥐>, <사나이>, <벙어리 삼룡>, <승방비곡> 등의 작품에 출연하여 인기 배우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말더듬이가 톱·스타아


  윤백남이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사퇴하고 상경하여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했다. 그 첫 작품으로 <심청전>을 착수했으니 여기에 김정숙이란 여배우가 출연했다. 김정숙은 부산에서 여학교를 다니다 <월하의 맹서>에서 이월화와 공연한 권일청을 찾아 상경했다. 무대배우 지망이었다. 그러나 김정숙은 불행히도 말더듬이었다. 말더듬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도 배우가 힘든데 하물며 김정숙에게 그런 기회가 올 턱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심청전> 제작 소식에 용기를 얻은 김정숙은 이 작품에 단역을 얻게 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때 영화는 모두 무성영화였으니 벙어리인들 상관이 없었다. 얼굴만 예쁘면 그만이었으니 김정숙은 그러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 <개척자>에 출연했고 드디어 <장한몽>에서는 일약 주연으로 승격했다. <장한몽>의 '심순애' 역으로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자 주연급 스타아로 등장했다. <산채왕>, <풍운아>, <운명>, <금붕어>, <젊은이의 노래>, <화륜>, <지하촌> 등의 작품에 출연하여 인기 상승했다. 그러나 사생활에서는 뒷소문이 떠도는 불행의 연속이었고 또한 새로운 신인의 등장으로 1930년 이후 영화계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나운규의 출현


  1924년 가을 나운규는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입사 시험을 보았지만 누구나 배우되기는 틀렸다고 해서, 간신히 안종화의 간청으로 연구생으로 입사를 허용받았다. 짝달막한 키, 거무스름한 얼굴, 사나이답게 생겼을 뿐이니, 이무도 대배우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데뷰작 <운영전>에서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가마꾼으로 한 씬(Scene)짜리였다. 미미한 역할을 맡아 하고는 간신히 입사한 회사를 박차고 윤백남과 함께 상경하여 <심청전>에 심 봉사 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역시 적역이 아니었던지 그의 재능은 엿보이지 않은 채 일 년은 흘러갔다.

  조선키네마의 창립 작품 <농중조>가 개봉됐다. 복혜숙의 데뷰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나운규는 조연이긴 했으나 그 재능을 실증한 영화였다. 관객은 나운규의 연기에 도취했고 찬사를 아까지 않았으니 일약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당시 영화동호회 회원이었던 김을한도 다믕과 같이 그 영화 단편에서 지적하였다.

  "(전략)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멍텅한 중에 나운규 군의 힘있는 선, 굵은 연기만이 홀로히 뛰어나서 단조로운 스토리를 잘 조화하여서 가끔 웃기는 것이 저윽히 성공이라 하겠다. 이 일편 만으로서도 나 군이 얼마나 영화배우로서의 소질을 풍부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2085호)

  사실 나운규는 그 생김새와 같이 달콤한 연애물에는 어울리지 않는 연기자였다. 성격 배우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데 성공한 것은 여기에 있었다. <농중조>에서의 성공은 곧 <아리랑>을 이 세상에 탄생케 했다.

  <아리랑>의 광인 '영진'이나 <풍운아>의 '박니코라이', <들쥐>의 '들쥐' 역은 모두 새로운 연기의 영역을 개척했고 연기자로서의 관록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나운규 출연 이전의 배우의 연기는 엄격히 따져본다면 무대연기의 연장이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등장인물도 이렇다 할 성격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으니, 새로운 인간상을 부각해 논 것은 나운규의 공이었고 그의 연기력에 있었다. 나운규 인기의 원천도 여기에 있었다.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던 연기자였다. 


노역·악역의 명수들


  영화 제작의 연륜이 짧기에 배우의 수도 적었고 특히 노역의 연기자는 드물었다. 나이 많은 배우는 전연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세 남짓한 인물들이 일류 감독이요 인기배우였다. 그러한 가운데 이규설과 이금룡은 노역의 명수들이었다.

  이규설은 백남프로덕션의 <심청전>에서 촌민으로 데뷰하여 <개척자> '김참서', <장한몽>의 순애 부친, <산채왕>의 '송훈', <아리랑>의 영진 부친 등, 늙은이 역할 만은 담당했다. 이규설은 노역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4, 5세 정도였다.

  갸름한 얼굴에 씨원한 이마, 미남형의 연기자였다. 그는 <농중조>에서 지금까지의 노역에서 벗어나 주역으로 등장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규설 군의 열성을 충분히 인정하겠으나 달콤한 사랑에 나오는 주역으로는 적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을한은 영화 단평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이규설은 그 후 <홍련비련> 등으로 젊은이 역으로 주연했으나 실패했다. 역시 그는 노역이 적역인 듯 했으나 그 후 <불망곡>, <회심곡> 등에 출연하고는 빛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이규설과 같이 노역으로 등장한 이금룡은 조선배우학교 출신으로 나운규프로덕션에서부터 출발했다. <사랑을 찾아서>에 늙은 나팔수로 분장한 그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감탄을 발하게 했다. 특히 분장술의 우수함은 이십대의 이금룡을 오십대의 노인으로 착각하게 했다.

  안종화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저 배우가 몇 살인데 저렇게 늙어보여? 영화 <사랑을 찾아서>에 나팔수로 출연한 이금룡을 두고 관객들이 하는 이야기였다. 그의 박진성 있는 연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지없이 생생한 실감을 주었다. 연기도 연기려니와 그 분장이 기가막히게 좋았다. 젊은 이금룡의 얼굴이 어쩌면 그렇게도 흡사 늙은이같이 보인단 말인가."

  이금룡은 그 후 <박문수전>에서는 감독 주연을 맡았고 <역습>, <한강>, <국경> 등을 거쳐 <열애>를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 노역과 함께 빛난 악역 전문의 명수가 윤봉춘, 강홍식, 이경선 등이었다.

  강홍식은 일본에서 연기 수업을 받고 귀국한 배우로 <장한몽>에서 '백락관'이라는 악역으로 데뷰하여 <산채왕>에서는 산적으로 분연했다.

  그러나 연기자로서 대성을 하지 못한 채 <먼동이 틀 때>로 영화계에서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악역의 시발점은 바로 강홍식으로부터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게다.

  강홍식의 뒤를 이어 나타난 윤봉춘은 나운규의 고향 친구였다.

  나운규로 인해 윤봉춘은 영화계를 들어섰고 또한 악역으로 출발했다. 그의 데뷰작 <들쥐>에서는 악역인 중년 시골 부자 역으로 분장했다.

  나운규 프로의 전 작품에 모두 출연하여 단역의 명수로 유명했다. 그는 결코 미남은 아니었지만 성격배우로 자처했다. 그 후 그는 <도적놈>에서 연출까지 했으나 계속 조연으로 8.15 해방 전까지 출연하다가, 해방을 맞자 연출자로 전향했다.

  이경선은 조선키네마에 입사하여 단역으로 등장해 나운규프로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들쥐>를 비롯하여 <잘있거라>, <승방비곡>을 거쳐 <종소리>에서는 연기자로서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이경선 군의 연기는 가장 이채가 있다. 음험한 계획을 내는 것이라든지 또는 잔인한 짓을 하는 것이 어쨌든 한 점도 동정할 수 없이 나타낸 것이 항상 악인 역을 맡은 사람 가운데서도 그렇지 않은 것을 보이지만, 이 이(李)만은 조금도 그런 것이 없이 끝끝내 미움 가운데 철저한 악인을 보인다."

  당시 동아일보의 시서평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듯이 악인 역의 대표적인 연기자였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전연 각도를 달리하여 <수일과 순애>, <아름다운 희생>, <춘풍> 등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여성 팬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③에서 계속)

영화 <성황당>(1939, 방한준 감독)에서 배우 현순영(우)와 전택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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