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들패스와 플레즌트산, 섬너비치 그리고 보태닉가든을 둘러보며
▷ 묻는 자들은 깨어있는 삶을 살아간다.
▷ 존재를 잃은 자리를 기억하는 것이 남은 자의 예의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브리들 패스로 시작됐다.
항구도시 리틀턴과 크라이스트처치를 연결하던 정착민의 길 브리들패스.
초입부터 펼쳐진 캐슬록은 마치 이정표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영국에서 건너 온 제인 딘스라는 여성이 1853년, 이 길을 따라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녀를 비롯한 정착민들은 당시 이 험한 고개를 넘으며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낯선 장소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 그들에게는 삶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질 뿐이었겠지!
브리들패스 중턱에 도착해 페가수스 베이를 내려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혼자였지만 풍경은 외롭지 않았다.
그때, 산책하던 현지 주민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조용히 웃던 그 눈빛은 말없이 내 마음을 읽어준 것 같았다.
낯선 곳에서 누군가의 다정함은 언제나 특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순간, 풍경도 한층 더 따뜻해졌다.
산을 올라 캐슬록에 도착했다.
캐슬록은 들어가는 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밋로드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여기서 바라보는 리틀턴의 풍경은 마치 전북 임실의 옥정호 붕어섬이 떠오르게 했다.
서밋로드 도로길을 걷기 싫어 산 능선을 넘는 길을 따라 걸었다.
아뿔싸! 길이 끊어져 있다.
내가 길을 만들어가기는 너무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웠다.
역시 나는 안전함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다시 되돌아와 도로를 따라 서밋로드 곤돌라 스테이션까지 걸었다.
그 길목에 오래된 쉼터가 하나 있었다.
출발 당시 브리들패스 소개 안내판에서 봤던 장소다.
영국 정착민들이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는 표지판.
그들은 낯선 땅에서 길을 내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이곳은 어떤 장소였을까?
185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어쩌면 같은 생각, 같은 의미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곤돌라 스테이션에 도착해서 가장 인상깊었던 설명은 뱅크스 반도의 기원을 알리는 내용의 글이었다.
뱅크스라는 이름은 제임스 쿡 대위가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를 기려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1700년대 프랑스와 영국은 이 뱅크스 반도에서 고래잡이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이 남섬에서는 최초의 계획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1850년 넘어 이 곳은 리틀턴과 크라이스트처치에 밀려 지금은 조용한 휴양지로 밀려났다.
어쩌면 그렇게 한 시대의 중심은 또 다른 시대에 변두리가 되곤 한다.
또 곤돌라 스테이션에서 인상적인 말은 한쪽 벽에 붙어있는 'Lost Forever'라는 문구와 함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의 모습이었다.
영원히 사라진 동물 이름은 모아, 하스트 독수리, 라우칭 올빼미 등.
문구 아래엔 정착민의 개입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깨졌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내 마음에 박힌 건 단 '영원히 사라졌다'는 단어였다.
존재를 잃은 자리에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기억밖에 없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곤돌라 스테이션 한쪽에 앉아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이제 목적지인 플레즌트 산으로 가야 한다.
플레즌트 산으로 향하는 길. 이름부터 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산이다.
플레즌트는 우리말로 '즐거움'이라는 이름이다.
누가, 왜, 어떤 순간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오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나는 즐거운가! 뙤약볕 아래 힘들게 걷는 이 시간이 정말 즐거움일까?
문득 즐거움은 결과가 아니라, 오르겠다는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하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정리됐다.
정상에서 또 다른 현지 주민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두 마리의 강아지를 데리고 있었다.
플레즌트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를 보며 반가워하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며, 정상에서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이 곳에서 흔한 일상은 아닌것 같았다.
그 분은 나에게 “섬너 비치를 꼭 가보라”며 웃었다.
내려오는 길, 암벽등반 연습 중인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위에서 지켜보며 지시를 내리는 사람, 뙤약볕 아래 안전하게 오르게 도와주는 손길.
그 장면은 곧 삶의 은유처럼 다가왔다.
우리의 삶도 누군가의 응원과 보살핌 속에 조금씩 나아가는 게 아닐까.
섬너 비치에 도착했을 땐 우뚝 솟은 캐이브락이 눈을 사로잡았다.
파도에 깎인 그 바위는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조개껍데기가 발밑에 바스락거리고, 해안동굴은 누군가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 조용했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됐다.
다음날 아침, 크라이스트처치를 떠나기 전 보태닉 가든에 들렀다.
해글리 파크를 지나니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보태닉 가든 중심에는 오리와 새들이 장식물처럼 놓인 조형물 위에서 쉬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나무는 단지 배경이 아니었다.
정성을 다해 돌봐진 존재들이었다.
나무에 진심인 이 도시에서, 나에게 한 물음이 다가왔다.
우리는 정말 자연과 가까운 존재일까? 정말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이런 질문이 도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끊임없는 내적 질문이 나를 사로잡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렌트카 반납장 앞에 황희찬 선수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먼 타지에서 마주친 익숙한 얼굴, 그 반가움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출국장 벽면에 적힌 문장.
"It is not the mountain we conquer, but ourselves." 에드먼드 힐러리의 말이었다.
고개를 들자, 그의 편안한 눈빛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진정 정복해야 할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