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이야기

by 박정훈

식기 건조대에 차곡차곡 쌓여진 그릇들. 주방 벽에 붙은 작은 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국자와 주걱, 사계절 내내 서 있는 곳을 한 번도 바꾸지 않는 간장통, 짠맛과 단맛과 매운맛을 내는 양념통 들. 부엌주인이 매일같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공간임에도 굳어진 질서는 일 년 내내 변함이 없다. 사소한 변화로 부엌주인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깨뜨리면 주인은 신경이 거슬린다. 부엌은 주인이 한 명일 때 질서가 있고 조화롭다. 처가와 살림을 합치기전에 공부를 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 할머니가 외손자 부부를 위해 살림을 대신 해주었다. 아내가 공부에 바쁘기도 했지만 나는 되도록 부엌일에 결정권은 할머니에게 주었다. 할머니가 시골로 내려가시고 처가와 살림을 합칠 때 나는 아내에게 당부했다.


“할머니하고 살 때처럼 부엌일에 간섭하지마! 부엌에 주인이 둘이면 싸움이 나니까, 너는 설거지만 잘해라.”

“엄마랑 사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해?”

“할머니나 장모님이나 평생 부엌에서 주인 역할만 하신 분들이다. 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아! 장모님이 시키는 일이나 잘해! 너 요리하고 나서 어머니한테 좋은 소리 들은 적 없잖아.”

“하긴, 그릇 잘 안 치웠다고 혼나고, 정리 안했다고 혼나고, 그래서 내가 요리를 싫어하긴 하지.”


부엌에 주인이 둘이면 남자가 힘든 경우가 많다. 친척어른 중에 한분이 며느리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집을 비운 사이, 주방에 있는 모든 그릇들을 자신이 사용하는 그릇들로 바꾸었다. 밥을 먹을 때면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이 안 올라왔다고 며느리에게 타박도 자주 했다. 두 사람의 부엌싸움은 애꿎은 남편을 화풀이 대상으로 만든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결정적인 사건. 어느 날 며느리는 주방그릇을 다시 원래대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아내부부는 분가했다.


부엌은 여자에게는 삶 속에 지겨운 의무가 가득한 공간이지만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돈 버는 딸과 함께 사는 엄마에게 부엌은 자존심이고 절대 성역이다. 공간에 대한 예의가 필요하다. 부엌에는 아직도 장모님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그릇, 수저, 젓가락이 많다. 수납장에는 선물 받고 새로 산 그릇들이 박스에 싸인 채 햇빛 볼 날만 기다린다. 아내는 가끔 불평을 하지만 나는 부엌을 장모님 공간으로 남겨 둔다. 하지만 여자는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좋아하면서도 때론 자신이 만든 질서에 복종할 수 있는 일꾼이 필요하다. 부엌은 주인과 일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음식을 만드는 창조적인 일은 주인 몫이고 재료를 다듬고 설거지와 뒷정리는 일꾼이 해야 한다.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여자와 살면서 스스로 할 일을 찾지 못하는 남자에게 잔소리는 당연하지 않을까? 옛날에는 시어머니가 남자를 보호했지만 세상이 변했다. 살림을 합치고 나서 보니 장인어른도 여느 옛날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장모님은 사위랑 살며 요즘 젊은 남자들의 모습을 본다. 비교도 한다. 자연스레 장인어른을 향한 불만도 많아진다.


“엄마, 아빠는 왜 저렇게 싸우지? 늙어서 서로 챙겨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너한테 하는거랑 아버님이 어머니를 대하는 모습이랑 비교해봐. 어머니가 짜증나지 않을까?”

“왜?”

“너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장모님 보시기에 나는 너의 좋은 일꾼처럼 보이거든. 나는 네 말에 절대 복종이잖아”

“남이 볼 때만 그러잖아. 못됐어!”

“어른들하고 함께 사는데 남이 안 볼 때가 언젠데? 아버님은 네 말 잘 들으시니까 넌지시 애기해드려.”

“하여간 말로는 못 당해. 알았어. 아버지께 잘 말해 볼께.”


어느 날부터 장인어른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기름 때 제대로 안 벗겼다. 세제 깨끗이 안 닦았다.’ 장모님 잔소리에도 말없이 설거지를 하신다. 내가 설거지 할 때는 아무 말씀 없으셨던 장모님. 사위와 남편을 끊임없이 비교 하셨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장인어른 설거지에 대해 장모님 잔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부엌에 새로운 질서가 생겼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뜨셨던 장인어른은 이제 싱크대로 향한다. 나는 다 마신 커피잔을 설거지를 하고 계신 장인어른 옆에 놓아둔다. 나는 매 끼니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만 항상 어색하고 죄송스럽다. 부엌에는 장모님이 편하게 일을 시킬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어려운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거꾸로 된 長幼有序(장유유서)로 사위는 매번 장인어른 눈치를 보지만 이 또한 처가살이의 질서라 생각하고 몸이 편해 좋은 일이라 체념한다. 장모님은 부엌과 집안 살림을 온전히 당신의 몫으로 생각하신다. 장모님 자신이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무언의 주장이다.


나는 장모님 질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가끔은 장모님의 충직한 일꾼이 되려한다. 삼형제를 키우신 어머니는 ‘자급자족’ 강조하시면서 미래 며느리에게 욕먹지 말아야 한다며 우리 형제들에게 각자 해야 할 집안일을 맡기셨다. 나는 요리와 설거지 담당이었다. 나는 용돈을 타려면 설거지를 해야 했고 초등학교 삼학년 때부터 라면을 혼자 끓였다. 나는 요리를 할 때 설거지를 같이 하면서 요리를 한다. 요리가 끝나도 씻어야 할 그릇들이 싸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장모님과 아내는 신기해했다. 많은 남자들이 가족을 위해 힘들게 요리를 하고도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이유는 여자들만큼 세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리를 하는 것만큼 깨끗한 뒷정리는 중요하다.


“자기 집안일 정말 잘해. 원래 잘했어?”

“너 시댁에 가면 못 느끼니. 아버지가 청소하고 설거지는 다 하시잖아. 어머니가 아무리 못 마땅해도 아버지가 없으면 불편해 하시잖아.”

“아버님은 원래 깨끗한 걸 좋아하시잖아.”

“그렇긴 하지만, 남자가 늙어서 집안일 잘하면 매력적이지 않니?”

“매력은 잘 모르겠고, 여자가 편하니까 사랑받겠지.”

“너도 늙어서 우리 어머니처럼 나 없으면 무지 불편할걸!”

“으구!!!”


부엌은 잘만 사용하면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가끔 내가 요리를 하려고 하면 장모님과 아내는 재료를 깨끗이 씻어준다. 하얀 윤기가 흐르는 양파, 보기만 해도 아삭함이 묻어나는 당근, 하얀 머리에 초록치마를 입은 파, 지글지글 구어지기를 바라는 고기. 준비된 재료는 가족들에게 설레는 기대를 선물한다. 나는 재료들을 지지고, 볶고, 끊인다. 음식에 맛이 있든지, 없든지 가족이 같이 만든 요리는 끼니를 풍성하고 행복하게 한다. 부엌 주인은 한 사람이지만, 가끔씩 주인의 수고를 배려하고 덜어주는 가족의 노력이 필요하다. 처가살이를 하는 동안 나는 아들에게 요리하는 아빠로 기억되고 있다. 요리를 싫어하는 아내에게는 남편이 은퇴하고도 삼식이가 아니어서 좋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사랑은 왜 표현돼야 하는지 느끼신다. 작은 부엌에서 만들어지는 소소한 일들과 배려가 가정을 좀 더 따스하고 살맛나는 곳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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