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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댁은 꿈속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39. 기묘한 할머니 꿈 中)” 초등학생 때 꿨던 으스스한 꿈이 있다. 그 꿈에서 할머니 집은 현실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니, 일단 일반적인 가옥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꿈에서 나는 할머니 집 안에 누워있었다. 방 안이 어두웠기에 한밤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나는 홀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은 15평 정도의 직사각형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은 나무 살에 흰 종이를 붙여놓은 전형적인 시골 문이었다. 문을 열자 알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상하게 시야가 높았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무 테라스가 있었다. 나는 테라스에 나와서 주변을 살폈다. 길고 가느다란 4개의 나무 기둥이 집을 떠받치고 있었다. 아파트 4층 정도의 높이였다. 아래에는 안개가 짙게 깔려 바닥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개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전방을 내다보니 안개 사이로 마당이 조금 보였다. 하늘은 짙은 쪽빛이었다. 달빛이 안개 속에 스며들어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이 모든 걸 그저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는 테라스만 덩그러니 달려있을 뿐, 내려가는 계단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수많은 할머니 집 꿈을 꿨다. 나는 할머니 집에 도달하기 위해 숲을 헤매야 했고, 미로 같은 골목을 헤집고 다녀야 했다. 특히 숲을 자주 뛰어다녀야 했는데, 신기하게도 매번 같은 숲이 꿈에 나왔다. 처음 몇 번의 꿈에서는 그 숲을 통과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기어코 할머니 집에 도달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할머니 집에는 할머니가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할머니가 등장하면 할머니는 항상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할머니는 나에게 밥만은 꼭 챙겨주었다.)
이후부터는 숲을 헤매는 과정은 생략된 채 할머니 집에서부터 꿈이 시작되었다. 그 꿈들에서 나는 또다시 여러 가지 기묘한 일들에 마주쳤다. 나는 항상 한밤중에 별채에서 나오려 한다. 별채는 온갖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이상한 공간이다. 한 번은 별채 문을 열고 나오다가 헤집어진 텃밭 위를 거니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뒷짐을 지고 그저 천천히 걸어 다닐 뿐이었다.
할머니 집에는 가족들이 있을 때도 있었고 나 혼자 있을 때도 있었다. 전자는 그나마 낫다. 전자의 꿈에서는 가족들이 안방에 모여 있고 나는 혼자 별채에 있다. 거기서 무서운 일을 겪기는 하지만, 후자처럼 아예 가족 없이 나 혼자 있을 때는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나는 무자비한 살인자로부터 내 몸을 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역시 처음 몇 번의 꿈에서는 살인자에게 들키면서 끝났지만, 나중엔 성공적으로 숨어 있으면서 끝나는 꿈도 꿨다.
위의 꿈들은 모두 초등학생 ~ 중학생 시절에 꿨던 꿈이다. 이젠 할머니 집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약 10년쯤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부모님께 동의를 구해 몇 년 전부터 더 이상 시골에 내려가지 않고 있다. 시골은 나에게 있어서 그리 유쾌한 공간이 아니었다. 불편한 공간,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친척들을 보는 공간,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다. 아마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면서부터 할머니 집 꿈을 꾸지 않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