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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 Oct 25. 2023

말 잘하는 게 최고!

'쫌 살아보니 쫌 더 잘할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하지만 경험상 외국에 살면서 겪는 모든 어려움은 말만 통하면 다 해결된다과장이라고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태국에서 사는 날이 늘어갈수록 차츰 친절과 인내만으로 통하지 않는 일들이 생겼다. 유튜브와 책에서는 안 가르쳐 주는 현지 말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같은 말이라도 내가 배운 뜻과 현지인들이 쓰는 말뜻이 다른 경우를 겪으면서 바보 아닌 바보가 되는 경우도 흔했다. 아무리 해봐도 발음이 제대로 안 되는 단어도 너무 많았다. 


  초기 외국 생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첫째 방법은 현지어를 잘하는 거다그리고 둘째도 셋째도 무조건 현지어를 잘하는 거다현지어만 잘하면 외국 생활의 골치 아픈 거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정말로 믿는다그런데 내가 사는 이곳 태국태국 말과 글씨는 정말 정말 어렵다.     

썽(2)태우(줄)-픽업트럭을 개조해 만든, 좌석이 2줄있는 태국의 대표적인 서민 교통수단

  우선 태국어는 자모음이 모두 76글자나 된다. (세종대왕님께 절로 감사를 드리지 않을수 없다.외국 글자는 어느 글자든 어렵게 보이지만 태국어도 어려움으로는 어디에 내놔도 처지지 않는다글자 수도 많거니와 '후아'라는 동그라미가 안쪽에 달리느냐 바깥쪽에 달리느냐에 따라 다른 글자가 된다쓰기도 외우기도 정말 힘들다솔직히 지금도 헛갈리는 글자들이 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다가 이 헛갈리는 글자들을 태국 사람들은 띄어쓰기를 안 한다쉼표나 마침표 같은 문장부호도 안 쓴다뭐가 뭔지도 모르는 글자들이 빈칸 하나 없이 빽빽이 써진 문서를 보면 정말로 눈은 흐려지고 머리에서는 김이 날 수밖에끝없이 이어진 글자들을 아무리 봐도 어디까지가 한 낱말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읽을 수가 없으니 외우기가 안 되고 그러니 당연히 태국어를 쓸 수도 없다실제로 태국에 이민 와서 10여 년을 살고 있는 교포 중에서도 태국말은 할 줄 알지만태국 글은 못 쓰는 분이 꽤 많다고 한다. (요즘은 점점 띄어쓰기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우돈타니농업기술대학태국어간판띄어쓰기는없다그나마인쇄체는좀낫지만필기체는거의암호수준

  나중에 수업하면서 태국 학생들이 직접 쓴 노트를 봤을 때는 또 다른 태국어가 있는 줄 알았다띄어쓰기도 안 하는, 이 눈알 도는 글자들을 학생들은 왜 그렇게 작게 쓰는지 원학교에서 나눠주는 공문서나 시험문제지를 제대로 보려면 꼭 밝은 곳에서 안경을 쓰고 봐야만 한다한글 포인트로 치면 약 6~7포인트 정도에다 아주 가늘게 인쇄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런지 학생들도 노트 필기를 그 정도 크기와 굵기로 쓴다태국 사람들은 다 시력이 좋은가?  

시내에있는대학에서하는일반인대상교양강좌안내문-표로만들어서그나마낫다

  그다음으로 넘기 어려운 산이 있으니 그것은 곧 성조!

태국어엔 성조가 5개가 있다… 라고만 하면 그냥 어떻게든 해 볼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런데 이 성조엔 표시되는 성조가 있고 표시가 안 된 성조가 있다또 성조 표시가 안 된 낱말은 자음 종류(자음엔 중저 자음이 있음)에 따라 성조 계산하는 방법이 다르다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헛갈리는데 태국어를 모르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더 헛갈릴 것 같다. (죄송합니다그냥 이런 게 있구나~~~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네요.)     

  우리처럼 성조가 없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정말 성조를 제대로 발음하기가 쉽지 않다이 성조라는 게 우리가 ''을 ''로 발음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코워커가 내 태국 말을 못 알아듣는 원인의 80~90%는 성조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정말로 태국 사람들은 성조를 틀리게 말하면 정말 못 알아듣는다글자가 같아도 성조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뜻이 되니까 말이다더 많은 성조가 있는 말도 있다고 하니 5성 정도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단다.     


  어려운 게 있으면 쉬운 것도 있는 법그나마 태국어는 비교적 문법이 단순하고무엇보다 어휘 형태 변화가 없다는 큰 장점이 있다. '주어+서술어+목적어'라는 기본 형태가 평서문이든 의문문이든 큰 변화가 없고동사든 형용사든 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 형태가 언제나 똑같다즉 우리말처럼 '먹고먹으니먹어서먹을 거니먹었니.' 같은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안 그래도 복잡한 태국어에 어휘 변화와 시제 변화까지 있었다면아마 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어도 조기 귀국했을 것만 같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즐기면 되는 여행자가 아니라 한국어를 가르치러 온 봉사자인 나는 이 어려운 태국어를 꼭 배워야만 했다한국어 수업을 할수록 태국어를 잘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게 다가왔다한국어는 한국어로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원도 있다하지만 그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한국어 수업을 스스로 선택한 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우돈타니 농대처럼 한국어 수업이 강제로 배정되고 학점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답시고 완전히 한국어로만 수업해볼까그럼 그나마 나오던 학생들마저 소여물 주고염소 저녁밥 주러 간다는 핑계로 수업에 안 나올 게 뻔하다그들에겐 나보단 오히려 소와 염소랑 하는 대화가 더 잘 될 테니그래서 코이카가 지원하는 현지어 심화 학습비를 들여 태국어 과외공부를 했다. 1주일에 3일씩 현지 태국 선생님에게 배우는 시간이 정말 유익했다. 유튜브 태국어 강좌와 인터넷 포털 오디오 클립을 시도 때도 없이 듣고, 글자를 그렸다. (태국어는 절대 쓰는 것이 아님) 미쳐 못 사 온 태국어 회화책을 공수해서 침대에서도 보고, 썽태우를 타고 가면서도 봤다. 나름 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나는 장님인 채로 태국 코끼리 다리나 더듬고 있었다.     

콘도앞을 지나는 축제 행렬(축제가 찡찡 많은 나라!)

  그래서 생각했다태국어를 잘하려면 태국 사람처럼 생각하고 태국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조용한 내 방에 앉아서, 알아듣기 쉽게 만든 유튜브 강좌를 보고 있는 것은 정말 바보짓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태국에 살면서 왜 한국에서처럼 공부한단 말인가학교에서 마주치는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매주 아침 이싼시장에서 만나는 과일가게 청년 나타왓과 채소가게 아가씨 삔마니’, 학교 가는 길에 타고 가는 썽태우 기사들내 주변에 있는 이 모든 태국 사람들이 내 선생님인데왜 방안에서 책만 보고 노트북 모니터만 쳐다본단 말인가! 태국에 몇 년 살다 보면 태국말은 어느 정도 대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회화책도 달달 외우고 유튜브 강좌를 매일 따라 하면 아무리 어려운 태국말이라도 금세 배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아니다. 그렇게 해선 절대 태국말을 배울 수 없다. 태국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그들과 어울려 살아야만 진짜 태국말을 배울 수 있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 일정을 태국어로 썼다일어나자마자 TV를 틀어놓고 태국 뉴스를 들었다. (알아듣지는 못함출근하면서 만나는 콘도 직원과 경비에겐 언제나 먼저 태국말로 인사하고 한마디라도 꼭 얘기를 나눴다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에게 일부러 아는 태국어 표현을 써보고 틀린 것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시장에 가면 물건 사는 시간보다 상인들과 떠드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집 앞 길거리 식당에선 바쁜 주인에게 매번 음식 이름과 재료 이름을 물어보는 귀찮고 이상한 손님이 되어갔다. 집에서 30분이나 떨어진 배드민턴장을 찾아 배드민턴을 치며 태국 현지인들과 어울렸다. 저녁엔 비록 한 페이지밖에 못 써도 꼭 태국어 일기를 쓰고 잤다. 좀 과묵한 편인 내가 태국에선 떠듬거리면서도 말이 많은 수다맨이 되어갔다.  

   

  그 결과 태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고 말도 좀 한다 고 말하고 싶다하지만 여전히 나는 대충 알아들은 척하기눈치로 때려잡기못 들은 척 먼 산 보기나 정 급할 땐 몸짓 발짓 국제공용어로 말하기 신공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태국어 완전 정복의 길은 멀기만 했다     

시내 라차팟대학교 앞 길거리 식당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여전히 태국어는 나랑 안 맞는 것 같았다이런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태국 학생들에게 미안했다하지만 현지어는 현지인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면서 몸으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생각은 쉽지만 이걸 실천하는 것은 사실 힘들다가뜩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남의 관심이나 간섭을 싫어하는 태국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그들의 말과 문화를 배운다는 게 말만큼 쉽지 않다. 

    

  언제나 나에게 예상치 못한 웃음을 주는 동기 단원 '허당임 선생(참고로 나보다 태국어에 더 젬병임)에게 태국어를 잘하는 비법을 묻자 명답이 돌아왔다.

"그냥 꾸준히 열심히 공부하는 거죠!"

……….” (뭐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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