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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코맨 Jun 17. 2020

친구 엄마의 고등어 김치찜

우리 동네 골목은  제 친구 7명의 유치원이자  할머니들의 경로당이었습니다. 평상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이 이야기하는 사이를 우리는 우르르  뛰어다녔지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할머니들이 골목의 CCTV이자 자율 방범대였고 우리의 간식 보급처이기에 여러 모로 든든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두 명이 놀고 있다 보면 어느새 7명이 모두 모여서 저녁 늦도록 놀았습니다. 맨몸으로 나와도 특이하게 생긴 나무  작대기나 돌멩이만  있으면 즉석에서 놀이를 만들어서 놀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거나 추운 날에는 친구네 방에 삼삼오오 모였지요. 단독 주택들이라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기에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용돈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엄마를 찾았습니다. 엄마 역시도 밥이나 간식을 먹이려고 자주 우리를 찾았습니다. 간식은 주로 삶은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가 대부분이었지만 숨겨 놓으신 초콜릿도  가끔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문방구 표 불량식품이나 슈퍼에서 파는 과자들이었지만 삼촌이나 이모들의 손을 잡고 가야지만 골라 먹을 수 있었습니다. 불량식품을 먹으면 밥맛 없어진다며 엄마가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엄마들이 저희들의 놀거리와 먹거리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저희들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친구 집이나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이 "너희 아버지 계시냐?"입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다른 집으로 가거나 골목에서 놀았습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를 어려워하기에 우리들 마음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의 눈을 피해 방에서 쥐 죽은  듯이 놀고 있는데  우리 모두를 찾으신다고 엄마가 말씀하십니다. 죄지은 것은 없지만 안방으로 들어가서 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한 시간 이상  훈계하시는 말씀의 요지는  놀지만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공부의 공(工) 자에서  윗 획은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아래 획은 땅의 이치이다. 그래서 공부는 하늘의 이치와 땅의 이치를 스스로 연결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빨리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상황에서 그 말이 기억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유교적인 훈시를 무릎 꿇은 채로  한시 간 이상  듣고 있기가 여간 고역이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훈시나 목사님 설교는 "마지막으로"라는 말을 들으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아버지 잔소리에는 대본이 없기에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유일한 희망은 엄마가 빨리 안방으로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제해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아버지들은 외벌이로 집안 경제를 책임지셨기에 거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당연히 제사장쯤 되었지요. 우리는 아버님의 금전적 은혜를 입으려는 신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IMF를 지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면서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을 잃었고 대신 어머니들이 임시직으로 고용되었습니다. 가히 맞벌이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그 여파로 지금까지도 운전기사나 집안 관리 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은 누가 되었을까요? 다신교가 되어서 제사장이신 엄마가 수시로 정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의 신은 넓은 집이었는데 요즘은 꽃에 관심이 많아서 베란다의 화분이 우리 집 신입니다. 신이 자주 바뀌어서 우리 신도들은 제사장 눈치만 살피는 것이 오늘날 가정의 현실입니다. 예전 엄마들은 자녀들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을 잘 파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엄마의 보살핌을 늘 받는다는 느낌으로 잘 자란 것 같습니다. 요즘 엄마들은 자녀들의 정서보다 금전 관리만 잘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동네 친구들 중에서 용호는 저와 초, 중, 고, 대학을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최소 15년 이상을 서로의 집에 엄청 들락거리면서 자랐습니다. 웬만한 집안 대소사도 함께 겪었기에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도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요즘 절친들은 서로 핸드폰으로 연락하기에 직접 만날 일이 별로 없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두, 세 번씩 왕래를 하여야 했습니다.  덕분에 서로의 집에서 밥도 자주  얻어먹었지요. 

평상시 용호 엄마의 음식으로는  된장찌개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제가 예뻐 보이면 “맛있는 거 해줄까?”라고 말씀하시지요. 고등어 김치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고기는 너무 비싸고 귀해서 어느 집이나 함부로 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갈치나 고등어가 흔해서 생선구이나 조림을 자주 먹었기에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던 시기라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고등어는 최고였습니다.

보통은 전날 저녁에 먹고 남은 음식을 점심때 데워서 먹는 편이라 식사 준비가 간단합니다. 하지만 저에게 김치찜을 해 주시려면 일이 커집니다. 한식은 양식에 비해서 필요한 식재료가 많아서 재료 준비에 노동집약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옆에서 도와 드려야 합니다. 용호는 부족한 재료를 사 오거나  빌리러 다녀야 하고, 저는 엄마 옆에서 마늘을 까고 채소를 다듬는  등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정해진 역할입니다. 이 역할은 단순히 재료 준비를 도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넋두리를 잘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식탁에서 마늘을 까고 있는 저에게 용호의 바깥 생활이나 친구 관계, 요즘 신경 쓰는 일들을 물어보십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나 고칠 점을  하소연하듯이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저도 나중에 용호에게 엄마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부엌에서 엄마의 푸념도 들어주고 우리들의 현재 생활도 말씀드려서 저희 활동에 대한 예측 범위를 넓혀드리는 것이 주방 보조의 역할입니다. 친아들보다 아들 친구가 훨씬 나은 배역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하실 말씀이 남아 있을수록 반찬 숫자가 늘어나서 제가 질문을 하는 것은 저만의 지혜입니다. 

고등어 김치찜은 우선 무를 큼직하게 썰어서 바닥에 깔고 김치와 시래기를 올린 후 양념을 붓고 끓입니다. 무에 양념이 베이고 김치가 푹 익을 때까지 한참 동안 끓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즈음에 고등어를 넣어서 찌듯이 익히면 생선도 잘 익고 국물도 깔끔해진다는 것이 비법이라고 하십니다. 끓이는 동안에 계란말이나 소시지  구이 등 다른 반찬을 만드시지요 

흰색 살이 선명한 고등어를 푹 익은 김치에 싸서 먹으면 정말 맛있습니다. 간장 양념이  베인 무는 따로 먹어야 제맛입니다. 상추에 고등어와 시래기를 싸서 먹으면 밥을 몇 그릇이나 먹었는지도 모르게 하지요. 

아버님과 같이 먹으면 식사 예절에 신경을 쓰느라 마음대로 먹지 못하지만 우리끼리 먹어서 정말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엄마는 당신의 아들도 덩달아서 잘 먹으니까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잘 먹는 것을 보시면서 음식 할 맛 난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소에 먹는 된장찌개도 정말 맛있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찬거리만 마땅치 않을 때 제일 만만한 것이 된장찌개나 된장국이기에 자주 먹었기도 했지만 용호 엄마의 된장찌개는 유독 맛있었습니다. 

된장찌개를 먹는 저만의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맨밥에 된장이랑 나물을 따로 먹습니다. 반 공기쯤 먹고 나면  용호 엄마가  "비빌 거가?"라고  물어보십니다. 그러면 큰 그릇에 우리 모두의 밥과 나물을 넣고 계란  프라이와  김가루, 참기름을 넣어서 비벼 주십니다. 엄마도 맛있겠다면서  두어 숟가락을  드시고 나면 우리는 숟가락 전쟁을 하면서  먹었습니다.  

제가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우선 상대가 편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용호 엄마는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저도 잘 먹은 것입니다. 만약 식사를 만들어 주시는 대신에 매번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셨다면 지금처럼 정이 쌓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먹으면서 아울러 설거지를 대신하면서 엄마에게 친근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용호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용호 : 야! 오는 일요일에 엄마 집에 밥 먹으러 가라.  

나 : 니는?

용호 : 나는 바빠서 못 내려가지. 

나 : 응 알았다. 

대화가 짧지요. 경상도 사람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말 사이에 숨어있는 의미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 짐작에 이제 80이 넘으신 용호 엄마가 저와 다른 친구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대학 때 저도 그 골목을 떠나 이사를 갔기에 이별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놀고 연애하느라  바빴고 연이은 직장 생활과 결혼으로 연락도 제대로 못 드리고 지냈습니다.  

얼마 전 용호 딸의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뵙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를 안듯이 꼭  안아드렸습니다. 190센티가  되어버린 제가 여전히  150센티인  엄마를 안으니 엄마가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주 찾아뵙지 못했기에 생긴 키 차이였습니다. 

엄마는 저와 제 친구들의 이름을 여전히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밥을 유난히 많이 먹었던 사실도 잘 기억하시고요. 그래서 엄마는 예전 우리가 밥 먹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요일 오후 엄마에게 드릴 용돈을 담아서 해운대로 향합니다. 친구 두 명을 만나 엄마가 계시는 아파트로 들어갑니다. 예전에는 엄마 집으로 갔지만 지금은 형수 집으로  가는 기분입니다. 형님네 식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사이 저희들을 위한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용호 엄마를 곁에서 자세히 보니 여전히 40대 아줌마 얼굴이 보여서 여전히 고우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실의 할머니로 돌아옵니다. 

엄마와 형수의 정성으로 차려진 상에 앉았지만 이제 늙어버린 저는 사실 많이 먹지는 못 합니다. 늘어만 가는 체중을 줄이려고 식사량을 많이 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다이어트 운운하면 안 되겠지요. 제 스스로 메뉴를 결정할 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최선을 다해 먹어야 합니다.   

식탁에는 예전 음식인 고등어조림과  된장찌개 각종 나물들이 차려져 있고 그 외에도 소고기 전골이나 구운 생선 등 거나하지만 추억이 묻어나는 한 상이 차려졌습니다. 상차림을 보면 대접하는 사람의 정성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저희들에게 친아들만큼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 저희들은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까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제가 잘 먹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시식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먹는 것이고, 다음에는 먹방처럼 맛있게 잘 먹는 것입니다. 

용호 엄마가 밀양 여동생 집에서  같이 담았다는 된장은 신음소리가 날 정도로 옛날 맛이었습니다. 이런 집된장이면 호박과 두부만 단출하게 넣어도 맛있습니다. 요즘 된장은 맛이 없기 때문에 갖은 육수와 비싼 양념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깔끔하고 담백하며 깊은 맛이 나는 된장은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고등어찜도 사용된 간장과 고추장이 같은 메주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서 당연히 맛있었습니다. 저도 이제 늙으니까 조선간장과 왜간장의 차이를 느끼겠더라고요. 그래서 좋은 간장에서 우러나는 감칠맛을 제 입이 느끼기에 감탄했습니다.    

수십대의 카메라 앞에서 시식하는 연예인처럼 하나하나 맛을 봅니다. 전골 소고기는 육질이 고급이라서 너무 부드러우며, 고등어는 색깔을 보니 비싼 걸로 요리하셨다면서 재료 구입과 요리법에 대해 나름대로 어설픈 지식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에는 먹방을 시작합니다. 골고루  천천히  먹으면서 요리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질문을 드립니다. 요리법이 뭐예요? 이러면  대답이 너무 방대합니다. 고춧가루를 얼마나  넣으셨어요? 이런  단답형 질문이어야 대답하시기가 편하거든요. 

저는 반찬을 한 가지씩만 먹다 보면 뷔페 음식처럼 살짝 질려요. 그럴 때는 두, 어가지 반찬을 곁들여서 먹으면 색다른 맛이 납니다.  

이렇게 저희들끼리도 감탄을  주고받으며  먹고 있으니까 엄마는 젓가락을 들고 반찬들을 먹기 좋게 자르고 찢어서 저희들 밥 위에 올려주십니다. 이 순간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컥했습니다. 아침 등굣길 바쁘다는 저의 투정을 무시하고 밥상에 앉혀서 밥 숟가락을 들고 있으면 반찬을 막 올려주시던 어머니 말입니다. 그때 이후로는 아무도 제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신 분이 없었네요. 

온몸에 전율이 오면서 속으로 울컥하는 마음을 참고 밥을 먹었습니다. 반찬을 올려주시면서 제 마음을 아시는지 우리 어머니와 얽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본격적으로 옛날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 사춘기 시절에는 일 년에 평균  7센티가  자랐습니다. 지금의 키에서  10센티는  엄마 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기억 속에 예쁜 저는 군 시절  부산에 출장을 와서 용호도 입대하고 없는 집에 불쑥 들어와서 밥을 달라고 할 때가 제일 예뻤다고 합니다. 양말도  갈아 신고  용돈도 얻어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만큼 편했기에 응석을 부린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식이 꼭 필요한 순간에 무언가를 해 주었다는 사실에  삶의 보람을 느끼십니다. 다른 친구들과도  나름대로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헤어질 때 저의 손을 꼭 잡으시고 예전처럼 밥 먹는 모습을 보니까 지금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고 하십니다. 저는 밥이 그리워서 찾아왔지만 당신은 아들 친구가 잘 사는지가 긍금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알아서인지 평생 잊지 못할 한 끼 식사였네요.           

얼마 전부터 저녁이 있는 삶이 화두입니다. 저녁의 중심에는 풍성한 식사가 있어야 합니다. 간단하게라도 직접 음식을 만들면 지친 하루가 위로되고, 가까운 사람을 초대하여 사랑이나 고마움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집에 건강한 먹거리가 있어야 인스턴트식품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식이나 배달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팔기 위해서 만든 음식과 자신이 먹기 위해서 만든 음식은 식재료부터 다르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IMF 이전에는 대부분의 가정들이 7시경에 가족 식사를 했기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들어와야 했습니다. 식사 시간에 부모님이 무심코 밥만 먹는 것 같지만 식구들 마음 상태를 점검하십니다. 그리고 즐거운 날이나 슬픈 날 혹은 축하할 일이 있거나 위로할 일이 있으면 식사 메뉴가 달라집니다. 우리 집에 곰국이 올라오면 누가 힘들어한다고 직감하듯이 말입니다

요즘은 가족들 식사 시간이 달라서 한 집에 살아도 같이 밥 먹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딸의 잘 살고 있는지 마음속으로 궁금해합니다. 그런다고  직접 물어보려면 너무 뜬금없거나 포괄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외출을 하고 늦게 들어오는 딸에게 저녁 먹었냐고 물어봅니다. 지인과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요즘 생활이 굴곡짐 없이 편안하리라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햄버거나 편의점 간편식으로 때웠다고 하면 무슨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생긴 것 같아서 영 마음이 불편합니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딸의 정서를 판단할 잣대로는 “저녁은?”이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혹시 어른들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잘 먹고 다닌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저는 가끔 소갈비 같은 특식을 만들어서 식구들에게 먹이려고 냉장고에 넣어 둡니다.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놓으면 가끔 찾아오는 손님에게 식사 대접하기도 수월하더군요. 요즘 코로나로 인하여 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것을 봅니다. 그녀들도 집밥을 먹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맛있는 식사를 같이 만들어서 같이 먹어야겠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서로 어색하겠지요. 하지만 나중에는 저와 용호 어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자기들끼리 대화의 소재나 안부를 묻는 상대는 되겠지요. 하지만 우리 집 제사장님이 허락할지가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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