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가 났데요”
그날 처음으로 사고소식을 들은 것은 어느 회의자리에서였다.
회의 참석자 중 누군가 고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바다에서 사고가 났으나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난 다른 어떤 평범한 날처럼 하루 종일 가만히 내 일에만 몰두하였다.
아마 다른 이들도 나의 하루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그날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가만히 있어라”
2014년 4월 16일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하여 선장 및 선원들이 부푼 꿈을 안고 즐거운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나선 세월호에 탑승한 청소년들에게 외친 소리다.
그들은 물이 차올라 죽는 순간까지 어른들이 이야기 한 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구조되리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리는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동안 대한민국의 기성세대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순응해라”, 그러면 평생 행복할 수 있다.
“그런 것은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아.”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항상 현재보다 미래를 준비하는 삶.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수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모두 바깥으로 뛰쳐나왔어야지 살 수 있었다고 푸념 섞인 이야기를 한다.
나의 머릿속엔 16년여 전에 일어났던 사고가 떠올랐다.
1999년 6월, 화성에서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10월에는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으로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은 콘크리트 1층 건물 위에 52개의 컨테이너를 얹어 2~3층 객실을 만든 임시건물로, 청소년수련원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고 여러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구조물로써 항상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천호프집화재사고 또한 사고당일 영업장 폐쇄조치를 받은 상태라 영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공무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줌으로써 밀폐된 공간에서 몰래 영업을 하였다. 그리고 술집 주인이 학생들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갈 수 있으므로 출입문을 잠그라고 지시함으로써 화재는 조기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한 인명피해는 엄청났었다.
인천 호프화재집 화재사건이 일어난 후 어떤 지자체에서는 청소년시설 및 단체의 활동가들을 소집하여 청소년들의 여가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청소년들이 춤을 추며 즐길 수 있는 유스텍이라는 것을 만들 테니 시설이나 단체에서 공간만 확보한다면 예산을 지원해 주겠으니 지원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후 여러 곳에 유스텍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반성과 고민 없이 청소년들이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당시 청소년들에게 유행하던 콜라텍을 벤치마킹한 유스텍은 처음부터 청소년들에게 외면받았으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 태안해병대캠프 사고 등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국가에서는 청소년활동프로그램을 인정해 주는 청소년수련활동인증제, 청소년수련활동계획 사전 신고 의무화제도 등 관리·통제방식의 제도들을 하나둘씩 만들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청소년의 안전과 프로그램의 질적인 향상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관리·통제 방식의 제도는 청소년활동의 안전확보를 위한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고 청소년활동의 성장을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청소년활동의 위축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안전을 위하여 꼼꼼히 프로그램을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하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관리·통제가 부족했다기보다 사람 생명의 소중함보다 돈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천박한 사고방식이 더욱 큰 피해를 가져왔다는 생각이다.
사고가 날 때에는 이대로 안된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고 모두가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반성이 없었다. 아니 우린 청소년이 무엇을 원하는지, 좋아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우리는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다 너희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잠자코 우리말을 들으라는 식이다.
청소년헌장에 있는 청소년은 자기 삶의 주인이고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와 시민으로서 미래를 열어갈 권리를 가지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며 활동하는 삶의 주체로서 참여의 기회를 누린다는 말들은 종이 위에 쓰인 글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청소년들의 여가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청소년 시설은 청소년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고 어른들의 생각으로만 만들어져 건물이 다 지어진 후에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등 예산 및 시간 낭비적인 요소도 많이 발생하였다. 활동프로그램 또한 아이들의 욕구를 반영하기보다는 성인들의 시각으로 청소년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해야 해 라며 일방적인 기획으로 청소년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도 많았다.
지난 2014년 서울특별시립 청소년미디어센터에서 주최한 대한민국청소년미디어대전에 출품한 청소년들이 제작한 영화 중에 “말 잘 듣는 약”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아 고민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말 잘 듣는 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약을 구하기 위하여 한 병원을 찾아간다. 하지만 역효과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지만 아이가 공부를 잘할 수 만 있다면 무슨 일이던 못하랴 하고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약을 구입하여 아이에게 말 잘 듣는 약을 먹인다.
처음에는 게임하지 말고 공부하라 하면 공부하고 학원 가라 하면 학원 가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성적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좋아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외출을 한 사이에 화재로 인하여 목숨을 잃고 만다. 의사가 말한 부작용은 한번 명령을 내리면 혼자서는 다른 판단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때늦은 후회를 하며 울부짖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너무 극단적인 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런 말 잘 듣는 로봇 같은 아이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말을 들으면 기분 상해하고 동의하지 않을 청소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돼지농장에서 좁은 우리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는 돼지와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돼지농장에 가보면 돼지들이 몸을 돌리지도 못하는 좁은 우리에 갇혀서 생활하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사료와 약품을 먹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몸을 불린 돼지들은 태어난 지 약 5개월이면 생을 마감한다. 바깥공기는 맡아보지도 못하고 흙도 밟아 보지 못한 채 좁은 공간에서 오로지 사람들의 식품이 되기 위해 기형적인 삶을 산다. 혹, 구제역 같은 전염병이라도 발생되면 모두 살처분되기도 한다.
암퇘지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크기의 ‘임신용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다가 도축된다. ‘돼지고기’라는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 취급을 받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청소년의 삶도 돼지의 삶과 비슷하지 않은가?
대부분이 학교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학교, 학원, 집을 반복하여 오가며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과서, 문제집을 가지고 대학입시를 통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그것이 과연 자기가 진정 원하는 삶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같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개구리의 비유가 생각난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서 고통 없이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시험 삼아 개구리 한 마리를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넣었더니, 깜짝 놀라 바로 튀어나왔고 또 한 마리를 넣었더니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무척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처음부터 찬물 속에 개구리를 넣고 조금씩 불을 때기 시작했더니, 물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던 개구리가 아무런 소동도 부리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더란 것이다.
조금씩 물에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그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개구리처럼 우리 사회는 이것이 심각한 구조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청소년들도 자신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영혼이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는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구조적인 폭력이 만연하다.
구조적 폭력이란 사회 제도나 관습 또는 사람들의 의식 등이 폭력을 용인하거나 정당화시키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뜻하는데 예를 들면 집안형편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배우지도 못했고 딱히 기술도 없는 현실로 인해 여자가 성매매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물리적인 폭력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발끈하지만 사회의 그릇된 틀에 의하여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에 발생하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아직도 둔감하며 잘 알아채지 못한다.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도 열심히 살아가는 여자도 많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자의 문제, 바로 개인적인 문제로 그 원인을 돌림으로서 근본적인 책임에서는 회피하며 자신의 폭력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청소년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약자이다. 보호, 복지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당장 누려야 할 행복은 사치에 불과하다며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성인들의 패러다임으로 모범적(?)인 행동지침들을 만들어 주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문제청소년이라는 낙인을 찍어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주고 학교폭력 등 청소년 관련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이런 사회구조의 문제는 덮어 버린 채 청소년 개인의 문제로만 돌려버린다.
그들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구조적인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현실에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참사 전과 후는 달라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엄청나게 변하리라 또 한 번 기대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좀 지나자 일부에서는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하며 오히려 세월호를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며 언어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진정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젠 “가만히 있어라”는 말에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자기 삶의 주체로서 싫은 것은 싫다. 좋은 것은 좋다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키우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만이 사회의 구조적인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