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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형우 Feb 23. 2024

5센티미터만 비틀어 보는 청소년 문화

 최근에 들어 청소년문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청소년에게 있어 ‘문화’라는 것은 어른들의 시각으로 단순히 문제, 일탈, 비행이라는 관점에서 미숙한 문화, 비행문화로 조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옛날 소크라테스 시대부터 모든 시대의 어른들이 한결같이 “요즈음 아이들은 예절도 몰라, 어른에게 인사할 줄도 모르고 라며 개탄해 왔듯이 청소년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버릇없고 생각 없는 철없는 행동으로 보여 왔다. 또한, 부모들을 비롯한 기성세대의 눈에는 언제나 청소년들은 모자라고 미숙하게만 생각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문화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도 없지만, 소위 문화라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아직 미성숙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만 비쳐 왔으며 이러한 관점 하에서 청소년들은 교육, 학습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되어 왔다.  

  이에 지금 당장 자신들 또래에 누려야 할 행복을 먼 미래에 저당 잡힌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청소년들의 현실이다.   

  덧붙여 보자면 우리 사회가 압축적 성장기를 거치며 다양성의 전제가 되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청소년 또래 집단의 문화라는 것은 쉽사리 ‘청소년문제’로 포장되기 일쑤였다.  

  그나마 최근 들어 인권의식의 향상으로 적극적인 청소년참여활동에 청소년지도자들을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청소년과 지도자 사이에 예전의 일방적인 지도자의 시각에서 청소년들을 지도대상으로만 여기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청소년들의 참여로 지도자와 청소년 사이에 파트너십을 통한 쌍방통행으로서 청소년들과 함께 해 나가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 다시 돌아와 기성세대들이 말하는 청소년문제를 가지고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하자.  

  청소년문제라고 하는 일탈과 비행의 현상들(성, 가출, 범죄, 폭력, 탈학교)을 들여다보면 이런 현상은 청소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이 응축되어 청소년들에게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어가면 청소년문제는 곧 기성세대, 성인의 문제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청소년세대의 현안으로 표출될 때 이를 일러 청소년문제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청소년들도 하나의 집단이라고 한다면 “프랙털 이론”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프랙털 이론‘이란 거시구조가 도처의 미시구조 안에 반복된다는 것인데, 한 부분을 확대할 때 그 확대된 부분이 확대 전의 성질이나 모양을 유지하는 그림이나 도형을 프랙털이라고 부른다.  

그럼 지금까지 독립적으로 청소년문화 한 부분만 가지고 “미성숙한 문화니, 반항적인 문화니, 소비문화니 하며 청소년들의 문화에 문제가 있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청소년들의 일탈과 비행의 현상들이라고 말하는 성, 가출, 범죄, 폭력, 탈학교 이런 문제들이 청소년집단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인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은 청소년들 집단속에서보다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청소년문제라고 하는 이러한 현상들은 경미한 문제일 뿐이고 그 일어나는 수치도 성인들의 수치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부분뿐이다. 

그렇다고 청소년 집단속에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지금까지는 문제라는 관점에서 많이 이야기되어왔다.)가 절대 청소년만이 가진 특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청소년들만이 가진 문화라고 독립적으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기성세대들은 청소년들의 문화라는 것을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곤 한다.   

청소년들은 물건을 아낄 줄 모르는 소비문화적이고 또, 어떤 사안에서 언제나 감각적이고 즉흥적이라고 한다. 또한 10대 위주의 소비산업이 발달하게 된 이유를 청소년들의 소비문화로만 돌려버린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모든 비난을 청소년들에게만 던질 수 있을까?  

  또한 청소년들은 개인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며 기성세대들의 청소년 시절 때는 서로 꿈을 나누며 솔직한 친구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요즘의 청소년들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한 명 만드는 것도 어려운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으로 “외모 지상주의”를 이야기한다. 모 포털 사이트 얼짱 카페의 운영자들은 대부분 10대들이고 그곳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스타를 만들기도 하고 성형수술 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스타를 동경하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현재의 청소년들만의 특징은 아니며 단지 어린 시절부터 보이는 것 중심인 대중매체의 문화를 접함으로써 그들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 청소년들이 자주 들리는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에 뜨는 기사들을 보면 자극적인 제목들과 외모를 부각하는 기사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저가 화장품 회사, 의류회사 등이 10대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펼치면서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동경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자! 이쯤 되면 눈치 빠른 이들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벌써 눈치를 알아차렸을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들은 진정 청소년들만이 가지는 독창적인 문화라고 하기보다는 기성세대, 즉 성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청소년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다.   

  거의 2년 만에 한 번씩 바꾸는 스마트폰은 100여만 원이 넘는 고가의 물건이다. 성인들은 물론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며 이 스마트폰이 없으면 생활이 안될 정도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이 그렇게 필요한 물건일까?(이런 말을 하면 꼰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은 친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또래집단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친구들과 SNS로 소통하지도 못할 것이며 스마트폰 게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과연 이러한 문화들을 청소년들 스스로가 만들고 청소년들이 그러한 문화를 주도해서 그런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생각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모든 것들이 청소년들이 주도한 문화라는 생각보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문화가 청소년들의 문화에서도 그대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프랙털이론을 증명해 주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러한 문화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특징이 무엇인가? 바로 경쟁이다. 이런 경쟁사회 속에서는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엄마 뱃속에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재교육이라 하며 경쟁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죽을 때까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시 스마트폰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청소년을 자녀로 두고 있는 어느 정도 생활능력을 갖춘 부모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줄 수밖에 없도록 스마트폰 제작기업들은 자본주의사회체제의 광고 등 여러 행위를 통하여 분위기를 만든다. (만약 그러한 스마트폰 같은 것을 사주지 않는다면 무능력한 부모, 자식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부모로 만들어 버리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간에 관계도 멀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새로운 스마트폰이 나올 때마다 구입하게 되고 또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가진 기기들을 만들어 내어 누가 더 좋은 스마트폰을 가졌나 또래 집단 간에 경쟁하도록 부추기며 소비문화를 만들어 내어 이것이 요즘 청소년들 사이의 유행하는 문화라고 떠들어댄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청소년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자! 이제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시중에 나와 있는 청소년문화에 대한 많은 책들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을 통하여 무슨 청소년의 특성에 따른 문화는 미성숙하고 비행, 저항, 독립된 하위문화이며 학창 시절 도덕 교과서에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니 하며 어른들의 시각으로만 본 청소년문화에 대한 글을 무수히 접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런 청소년문화에 대한 패러다임을 전환시켜야만 한다.  

즉 청소년과 함께하는 우리 자신이 먼저 청소년문화는 소비, 비행, 미성숙한 문화 이런 관점의 사고에서 탈출해야 한다. 자신이 그런 패러다임에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청소년들을 그러한 문화에서 탈출시켜 생산적인 청소년문화들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지금의 청소년문화는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문화라기보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문화를 청소년들이 답습한 문화 일 뿐이다.  

지금은 그나마 청소년들의 참여, 체험하며 많이 나아진 형편이지만 아직도 청소년들은 문화정책 및 축제 등 프로그램에 있어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단지 소비대상으로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하나의 구경꾼의 역할밖에 되지 않는다.   

진정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의 문화를 답습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은 자신들의 꿈을 생산하고, 가능성을 생산하고, 끼를 생산할 수 있도록 그들의 문화를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거대한 시설과 축제가 아니라 작지만 꾸준한 아이들의 자치활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지금까지 가져온 청소년패러다임을 깨뜨려 버리고 청소년들이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역할일 것이다. 

다음 글은 진중권 교수가 쓴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 나오는 말이다. 


  시각의 관습에 사로잡힌 이들은 늘 같은 것만 보며 그들은 구름에서 구름을 보고, 바위에서 바위를 보고 풍경에서 풍경을 볼 뿐이다. 하지만 지각의 상투형에 사로잡히지 않은 어린이들은 구름에서 토끼의 형상을 보고 바위에서 곰의 형상을 보고, 바위에서 곰의 형상으로 보고 풍경에서 사람의 얼굴을 본다.  


하지만 철(=이성)이 들면서 우리들은 이 능력을 잃어버렸지만 아니 현실적인 것들만 요구하는 예술가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능력을 유지한다. 

  

앞으로 이런 시각의 관습, 고정관념들을

 깨뜨려버려 그냥 보이는 청소년들의 현상들만 가지고 “청소년들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며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어린이 때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구름에서도 토끼, 비행기, 배 그리고 바위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는 그런 상상력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진정 청소년들의 문화인지 또, 청소년문화라는 것들이 왜 그런 특성들을 가지게 되었는지 청소년집단이라는 미시적인 구조 속에서가 아니라 좁게는 지역사회, 나아가 한국사회, 세계라는 큰 거시구조 속에서 청소년들의 문화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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