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호메르스의 형상을 어루만지는 아리스토텔레스>

by 임동숙
4-.jpg 렘브란트, 《호메로스의 흉상을 어루만지는 아리스토텔레스》 (1653)



내 눈에 렘브란트의 작품이 들어온 것은 삼십 대 후반부터였다. 삶의 쓰나미처럼 몰아닥친 시련 앞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다 고꾸라지던 시기였다. 단단하게 무장했던 오만한 에고의 벽에 비로소 균열이 일어났다. 역설적이게도 그 균열의 틈새를 뚫고 빛이 스며들었다. 따스한 기운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깊고 인자한 시선이 머물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오랫동안 눈물이 났다. 그때 나를 감쌌던 온기가 사실은 우주가 건네는 고요한 숨결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한 장의 그림을 마주하고 난 후의 일이다.

그 축복 같은 시간에 운명처럼 만난 그림이 바로 <호메로스의 흉상을 어루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8세기경의 눈먼 음유시인 호메로스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더니, 그로부터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653년, 렘브란트는 한 장의 캔버스에 서양 문화의 근간이 되는 문학과 철학의 두 영웅을 시공을 초월하여 연리지 나무처럼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화려한 의상에 걸쳐진 금 사슬 장식에는 세상을 제패했던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이 새겨져 있다. .무려 2,800여 년의 시간을 한 장의 그림에 녹여 넣다니,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그 장구한 세월이 한 화폭에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도 경이로웠지만, 정작 나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렘브란트가 세상을 제패했던 제왕 알렉산더를 한낱 의복의 장신구로 그려 넣은 반면, 가난하고 눈먼 시인 호메로스의 머리 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따스한 손길을 얹어두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극명한 대비를 마주하는 순간, 영혼을 울리는 진리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그 준엄한 가르침이 우주의 순리처럼 내 존재를 부드럽게 관통했다. 비로소 억눌렸던 마음이 느슨해지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생기가 차올랐다.


이 그림이 그려진 1653년, 렘브란트는 세상의 잣대로 보면 실패한 초로의 화가였다. 명성은 빛바랬고 경제적 궁핍이 그를 죄어오던 시절이다. 그런 그가 세상을 제패했던 알렉산더가 아니라 가난한 음유시인의 삶에 무게를 실어주었다는 사실이 가슴 한 구석을 묵직하게 했다. 현실의 궁핍 속에서도 무엇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잊지 않았던 그의 시선은,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와 시련에 휘청이던 내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여 주었다.


때로는 전문가의 식견을 통해 작가의 치밀한 의도를 발견하는 지적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은 렘브란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의상을 입힌 것을 두고, 고대의 지혜를 근대적 인본주의로 부활시킨 것이라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명작을 이해하는 명료한 통로가 되어주지만, 내가 주기적으로 이 그림을 다시 찾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런 지식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날은 주인공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반지의 희미한 광채에 시선이 머물다, 불현듯 가슴 뭉클한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봄 소풍날, 학교 교문 앞 할머니에게서 샀다며 수줍게 내밀던 천 원짜리 금반지 한 쌍. 엄마 아빠가 그 반지를 정말 끼고 있는지 연신 확인하며 들떠 있던 아이의 맑은 표정이 그 조그만 반지 위로 겹쳐진다. 세월이 흘러도 스러지지 않고 유난히 빛나는 시간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소한 기억들이야말로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는 진정한 보석임을 그림은 문득 일깨워준다.


명작을 본다는 것은 이렇듯 매번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 예상치 못한 나를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유희를 지나 결국 내가 이 그림 앞에 머물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흐르는 작가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가느다란 숨결로 이어질 때,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 지극한 위로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영혼의 향기로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 그것이 천재들의 세속적 삶이 유독 슬퍼 보이는 이유이자, 아무리 궁색한 처지에서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빛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