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델의 페넬로페

페넬로페의 뒷모습, 내 안의 오디세우스를 만나다

by 임동숙

2019년 11월 19일. 만물이 안으로 침잠하며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던 날, 파리 몽파르나스의 고요한 골목에 자리 잡은 부르델 미술관을 찾았다. 친구들과 파리에서 한 달을 보내며 이방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던 때였다.


부르델-페넬로페.jpg 앙투안 부르델, 《페넬로페》 (1906-1912)/ 파리 몽파르나스 부르델 미술관에서


메인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초입, 내부를 향해 묵직하게 서 있는 하얀 조각상 하나가 시선을 붙들었다. 높은 천장 아래, 등 뒤로 흐르는 창백한 빛을 받으며 서 있던 여인의 뒷모습. 거친 듯하면서도 단단한 백색의 질감 속에 응축된 에너지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나다.'

감각이 분석보다 먼저였다. 조각상의 무게중심과 어깨의 각도가 그곳에 서 있는 나의 포즈와 너무도 완벽하게 겹쳤다.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목격한 듯한 당혹스러운 놀람, 그 강렬한 이끌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운명처럼 마주한 뒷모습

조각상의 주인공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대신해서 20여 년간 나라를 지키던 이타카의 왕비, 페넬로페였다. 페넬로페라니. 조각 아래 새겨진 이름을 보앗을 때 언뜻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유명한 오디세우스 신화에서도 크게 부각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비중은 남편을 기다리는 열부 이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별반 없었던 것 같다. 나 또한 부르델의 페넬로페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저 기억 속에 희미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마주한 조각상의 뒷모습은 수동적인 기다림의 형상이 아니었다. 오른쪽 엉덩이에 단단히 실린 무게중심과 육중한 양감, 생각에 잠긴 듯 턱에 한 손을 괴고 있는 자세에서 나는 외부의 침범에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지탱의 에너지를 보았다. 부르델 특유의 거친 질감은 그녀가 견뎌낸 세월의 굳은살 같았다. 그것은 자신의 성(城)을 지키고 몰려드는 구혼자들 사이에서 주체적인 삶을 운용해낸 지혜로운 전략가의 뒷모습이었다.


밤마다 짠 베를 다시 풀었던 그녀의 행위는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외부의 압박에 영혼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거룩한 저항이자, 스스로 고독의 시간을 창조해낸 예술적 의례였다. 20년 만에 돌아온 남편 앞에서도 침대 기둥의 비밀을 물으며 끝까지 자신의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려 했던 그녀의 주도면밀함은, 누군가의 아내이기 이전에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우뚝 서 있었음을 증명한다.


결국 페넬로페가 20년을 기다린 오디세우스는 실재하는 남편이기 이전에, 그녀 내면의 강인한 주체성이자 또 다른 자아인 '아니무스'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뒷모습에 그토록 강하게 끌렸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내라기보다, 내 안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고독을 견디며 제 자리를 지켜내는 외로운 분투였기 때문이다. 그 처절한 지탱의 에너지가, 어떻게든 삶을 붙들고 서 있으려 애쓰는 나의 모습과 겹쳐 보였던 것 같다.


나무의 뿌리를 키우는 침묵의 힘

나는 종종 인생을 나무에 비유한다. 나무를 키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에너지를 뿌리로 내리는 힘이다. 페넬로페가 베를 짜고 풀며 보낸 그 고독한 시간은, 그녀라는 나무의 뿌리를 깊게 내리는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마주침 이후, 나는 인연의 들고남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오는 인연 안 막고 가는 인연 안 잡겠다"는 말은 체념이라기 보다 스스로를 지탱하고자하는 의지에 가깝다. 내 안의 에너지가 뿌리로 깊게 내려가 중심을 잡으면, 밖에서 어떤 바람이 불어오든 혹은 잎이 지든 나라는 나무는 평온히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여행 후 오랫동안 그 뒷모습이 한번씩 떠올랐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오딧세우스 신화를 다시 읽다가 불현듯 알아차렸다. 부르델의 페넬로페가 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다는 것을. 바람결에 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기다림은 결코 허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기다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게 뿌리를 뻗어,

나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완성해가는 숙성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