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시리즈②: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by 임동숙

죽음을 마주하는 정직한 정질

오래전 한 어르신으로부터 이생을 떠날 때 입을 수의를 손수 준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등 뒤로 생경하고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나는 늘 선택의 기로에서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는 습관이 있었기에 죽음이 낯설지 않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그날 알았다. 죽음을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것과, 내 영혼이 빠져나간 빈 집인 육신을 감쌀 천을 만지며 그 실존을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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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피렌체 피에타>를 조각하며, 예수의 시신을 부축하는 니고데모의 얼굴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넣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그때와 같은 먹먹함이 밀려왔다. 젊은 시절,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최후의 심판>)한 구석에는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난을 견뎌낸 순교자 바르톨로메오에 자신을 투사시키더니, 일흔이 넘은 나이에는 다시 니고데모를 빌려 자신을 기록한 것이다.


니고데모는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밤눈을 피해 몰래 예수를 찾아가 진리를 묻던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숨어버린 십자가 아래에서 끝내 예수의 시신을 거두었던 그 노인의 형상을 빌려, 화려한 천재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죽은 예수(진리)를 묵묵히 몸으로 떠받치는 이름 없는 증언자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겸허한 자리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천장화 작업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교황의 강권에 등 떠밀린 고역이었고, 화가이기보다 조각가이길 원했던 그에게는 평생의 굴레와 같았다. 20여 명의 식구를 홀로 부양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과 책임감은 그를 쉼 없이 일터로 몰아세웠다. 4년 넘게 고개를 젖힌 채 천장에 매달려 작업하느라 목은 굳고 눈에는 염료가 떨어져 시력마저 잃어갔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냉대와 외로움뿐이었다.


무엇이 이 노예술가를 그토록 고단한 생의 끝자락까지, 스스로를 부수고 해체하는 고통 속으로 몰아세운 것일까. 그는 무덤을 위한 피에타를 다듬으며 삶의 회한을 소네트로 노래했다. 예술을 우상으로 섬기고 왕으로 모셨던 환상이 착각이었음을, 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욕망이 헛것이었음을 고백하는 노작가의 목소리는 처절하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묻고 싶었다. 당신을 괴롭혔던 그 욕망과 열렬했던 환상에서 태어난 작품들이야말로, 시대를 너머 삶의 깊은 얼굴을 마주하려는 영혼들에게 성스러운 사랑으로 인도하는 푯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느냐고.

Pieta-rondanini-copie-1.jpg 론다니니 피에타 1552–1564, 대리석


구원의 환상을 넘어선 '지탱'의 실재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을 놓지 않았던 <론다니니 피에타>는 바로 그 회한과 찬미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했다. 죽기 사흘 전까지 그는 깎았다. 돌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짓눌렀던 '천재'라는 외투와 '예술'이라는 우상을. 20대의 그가 조각했던 눈부시게 매끈한 <피에타>가 완벽한 기술의 승리였다면, 여든아홉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이 미완성의 조각은 모든 환상을 덜어내고 남은 '지탱' 그 자체다.


이 투박한 조각 앞에서 오래전 상처가 불쑥 올라왔다. 남편의 외도를 처음 알게 된 후, 현실이 발밑에서 무너져 내리던 그 먹먹한 오후.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며 나는 내가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현실에 붙잡아준 끈은 오히려 그 작은 아이였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지가 모호해지는 찰나, 우리는 그저 서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존재일 뿐이었다. <론다니니 피에타> 속의 성모가 아들을 안고 있는 것인지, 죽은 예수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기묘한 구도처럼 말이다.


껍데기가 무너지는 필연적인 아픔

이처럼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지탱'의 숭고함을 엿보았음에도, 정작 나의 일상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는 여전히 오만한 껍데기를 다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술가의 겸허한 정질 소리가 다시금 내 삶을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 된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2류는 되고 싶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작가라는 정체성을 뒤로 밀어두었다. 사실 그 오만한 선언 아래에는 충분히 잘 해내지 못할까 봐 떨었던 비겁한 두려움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두려움을 대면하는 대신,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과 소통하며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에서 안도감을 찾았다.

하지만 공동체의 기초가 다져질 무렵 거센 태풍이 몰려왔다. 성향의 차이와 의견의 다름에서 오는 날 선 부딪침들, 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 마음 밭은 속절없이 황폐해졌다. 그 황폐한 자리에 서서야 비로소 응시하게 되었다. 공동체를 위해 쏟았던 나의 선의(善意)가, 실은 타인을 향한 연민인 동시에 고독한 작가로 홀로 서야 하는 두려움을 외면하려 했던 미세한 몸짓이기도 했음을 말이다.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 두려움은, 믿었던 관계들이 어긋나고 식어가는 과정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상실감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지독했던 통증이 실은 내 에고가 단단히 지어 입었던 오래된 방어기제가 무너져 내리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 후로도 몇 번의 작은 태풍들이 지나가고 난 후의 일이다.


최고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가 죽기 사흘 전까지 깎아냈던 조각상,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내며 기댄 투박한 선으로 남아있는 그 작품을 대의 사람들은 미완성이라 부르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피에타상이다. 나는 상처가 들쑤실 때면 한 번씩 이 조각상을 마주한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그 가냘프고도 쓸쓸한 형상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모니터 속의 상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사이 위로받았다는 느낌이 스며든다.


애야, 두려움을 포장한 오만을 깎아내렴.

나를 보호하려던 에고의 소란스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소리에 스며들다 보면, 관계에 대한 비장함 대신 각자의 궤적을 그리며 곁을 지켜주는 도반(道伴)에 대한 들뜨지 않은 희망이 생기곤 한다.


삶을 기록하는 겸허한 아카이빙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던 노작가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한 사랑의 형상을 남겼다. 그의 거친 정질 자국은 이제 내게 죽비가 되어 내려친다. 사라지기 전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나의 작업 또한 무언가를 이룩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삶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가는 겸허한 아카이빙이어야 함을 일깨워준다.


20여 년의 시간을 돌아 나는 이제야 작가라는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되찾아가고 있다. 거창한 예술적 성취를 꿈꾸던 망치를 내려놓고, 그저 내게 주어진 삶의 궤적을 정직하게 기록해 나갈 뿐이다. 완벽함이 비껴간 자리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마침내 안아줄 수 있게 된 온전한 나의 진실이었다.


완벽하려 애쓰는 긴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의 존재가 들어올 틈이 생기는 것 아닐까. 모니터를 닫을 때면 의례처럼 한 문장이 떠오르는 이유다.


삶은 미완성의 태도로 살아갈 때 최고의 온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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