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왜 배란일에는 피부가 그리 고운지, 왜 잠만 잘 자도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2.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제, 스테로이드입니다. 마치 쓰면 안 되는 금단의 약물과도 같은 이미지의 스테로이드는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의 한 종류입니다. 앞에서 다뤘던 인슐린이나, GLP-1과 마찬가지로 스테로이드도 특정 장기에서 분비되어 전신에 복합적인 영향을 끼치는 내분비적 전령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하지만 스테로이드는 지금까지 다룬 호르몬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지질, 기름 성분으로 만들어진 호르몬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점은 제법 중요합니다. 일단 기름 성분이라는 점 때문에 스테로이드는 보관과 배송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우리 몸은 기본적으로 수용성이고 세포 간의 경계는 기름(세포막)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름은 기름에 녹으니까, 기름으로 세운 벽쯤은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어 세포로서는 만들어진 스테로이드를 잡아 둘 방법이 없습니다.
4. 그래서 스테로이드는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제작해서 내놓는 '오마카세' 시스템으로 운영됩니다. 이에 반해 인슐린은 췌장의 베타세포에서 제작된 뒤 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출고'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호르몬으로서의 스테로이드를 볼 때 과잉이냐 부족하냐는 '주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들어왔는 가를 따지는 게 중요합니다.
5. 둘째로, 기름 성분이다 보니 목적지에 도달한 뒤 작용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인슐린의 경우 세포막 수용체에 결합한다고 바로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똑똑똑", "뉘슈?", "췌장에서 보낸 인슐린인데요.", "기다려 보슈"라는 식으로 몇 번의 '절차와 승인'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용이 일어납니다. 반면 스테로이드는 그런 것 없이 그냥 쑥! 들어가서 자기가 직접 작용합니다. 심지어 스테로이드는 핵까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핵막도 기름 성분이므로)
6. 이런 특징 때문에 스테로이드가 하는 일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하고, 양면적으로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같은 지방 조직에라도, 몸의 중심부(뱃살)는 스테로이드의 명령을 받으면 축적되기 시작하고, 팔다리에 있는 지방 조직은 스테로이드가 분해되어 에너지로 쓰라고 명령합니다. 이게 다 핵 안까지 들어가 다름 아닌 유전자를 발현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방법으로 인슐린이 역경과 고난을 통한다면 스테로이드는 헐크를 만든 감마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스테로이드가 기름 성분이라는 점은 수용성인 혈관을 통해 운송하기 위해서 특수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단백질과 결합하지 않은 자유 코티솔의 반감기는 약 2분으로 말 그대로 순식간에 혈액에서 사라집니다. (기름 성분이다 보니 가까운 세포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거나, 소변 등으로 배출됨) 그래서 '오마카세'라고 말씀드린 것도 있습니다. 일류 일식 요리사가 만든 초밥을 포장해서 데워 먹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8. (기름 성분인 콜레스테롤이 리포프로테인이라는 단백질에 포장되어서야 혈액 속을 다닐 수 있듯이) 그래서 스테로이드도 운송해 주는 단백질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CBG (Cortisol-Binding Globulin)입니다. 역시 이 단백질도 다름 아닌 '간'에서 만들어집니다. 참고로 서두에서 말씀드린 배란일이나 임신 시에 피부가 매끈해지는 현상 (Pregnancy Glow)은 에스트로겐이 간에 작용해 CBG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 때문에 일어납니다. 실릴 차가 많으니 스테로이드는 더 오래, 더 많이 버틸 수 있습니다.
9. 콜레스테롤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인데, 스테로이드의 재료가 바로, (두구두구) 콜레스테롤입니다. 스테로이드라는 이름도 사실 콜레스테롤의 -스테롤에서 따온 말입니다. (-로이드, 닮은 꼴이라는 의미) 이쯤 왔으니 이름도 제대로 불러줘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은 모두 코티솔(Cortisol)이라는 호르몬에 해당합니다. 코티솔은 부신에서 만들어내는 글루코-코르티코이드 (당대사와 염증 조절에 관여하는, 반대되는 의미로 미네랄로 코르티코이드가 있음) 계열의 스테로이드(지용성 호르몬)입니다.
10. 코티솔을 만드는 부신은 엄지 손가락만 한 크기인데도 우리 몸에서 콜레스테롤을 간 다음으로 많이 쓰는 조직입니다. 그만큼 코티솔을 만드는데 콜레스테롤이 많이 필요합니다. 신장 바로 위에 붙어 있는 부신은 앞서 다루었지만 자율신경의 명령을 받아 아드레날린과 노르에피네프린 등을 분비했고 이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우리 몸의 긴급 대응책이었습니다.
11. 8번 글에서 코티솔은 운송하는 단백질이 있어야 멀리까지 배송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가까이 있는 신장은 부신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코티솔 맛(?)을 바로바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반감기가 2분이라 해도, CBG 등과 결합하지 않더라도, 신장까지 흘러들어 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유명한 오마카세 집 바로 옆에 있는 덕에 맛있는 초밥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지만 신장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약으로 스테로이드를 먹고 몸이 붓는 이유가 이 내용과 관련됩니다.
12. 코티솔은 '지배인 또는 매니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런 '지배인' 역할은 '장기간 지속되는 위기'에서 빛을 발합니다. 예상치 못한 재난에 자율 신경이 먼저 작용해 아드레날린을 분비해 급한 불을 끄게 한 이후에 코티솔이 나와 수습하는 식입니다. 아드레날린과 코티솔이 모두 부신에서 분비된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13. 지배인 코티솔은 염증을 관리해 조직 손상이 지속되는 것을 막는 데 탁월한 장점이 있고, 에너지(포도당) 소비 상황을 분석해 미래에 닥칠 위기에 대비하는 데에도 능숙합니다. 코티솔이 속한 계열, 글루코-코르티코이드란 명칭의 글루코(gluco-)가 당분, 글루코스에서 유래된 말인 만큼 코티솔은 주로 포도당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14. 염증을 줄이고 조직 손상을 멈추는 코티솔의 재주는 앞서 에스트로겐 상승 → 간에서 CBG 생산 증가 → 코르티솔 증가로 피부 트러블이 가라앉고 안색이 좋아 보이는 효과에서 잘 나타납니다. 'Pregnancy Glow(광채)'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알레르기 질환이나 류머티즘 질환, 종양학, 감염학에 이르기까지 의사들이 광범위하게 스테로이드 약제를 처방되는 목적과도 관련됩니다. 스테로이드는 과도하게 활성화된 염증 반응 탓에 조직이 손상받는 그 순간을 멈추는 데 탁월한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자폭하는 방식의 알레르기 질환에서 스테로이드가 쓰이는 것입니다.)
15. 금세 사라져 버린 코티솔의 효과를 다시 부활시키는 백업 시스템을 마련한 곳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간과 지방조직은 다 쓴 코르티솔을 충전시킬 수 있습니다. (마치 방전된 ADP가 ATP로 충전되듯) 이런 시스템이 마련된 이유는 간과 지방조직이 '지배인'이 쓰는 비장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지배인, 코티솔은 간과 지방에서 에너지인 포도당을 '융통해' 위기에 대응합니다.
16. 이때 코르티솔을 만드는 데 쓰이는 효소가 11β-HSD1입니다. 이 효소가 너무 활발해지면 간과 지방에서 코르티솔 농도가 높아집니다. 피로 검사한 코르티솔 수치가 정상인 분도 해당 조직의 코트리솔 수치는 높을 수 있습니다. (국소적 쿠싱 현상) 비만과 염증 과다는 바로 11β-HSD1을 과도하게 활성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
17. 그래서 밤에 잠을 못 자거나, 스트레스를 받거나, 교감신경이 항진되면 몸은 이를 위기로 인식해 11β-HSD1 활성을 높여 지방 조직 내 코르티솔 농도를 올리게 됩니다. 효소 때문에 충전된 코르티솔은 지방 세포를 더 크게 만들고 (특히 내장지방), 인슐린 작용을 방해해 지방 분해를 막습니다. 그 결과 배만 볼록 나오는 '중심성 비만'이 생깁니다. 혹시 팔, 다리는 가는데, 똥배가 고민이신 분들은 수면시간을 늘리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18. 참고로 우리 몸의 살림꾼, 김여사, 인슐린이 이 11β-HSD1을 억제해 국소 코르티솔의 과잉 현상을 제어한다고 알려졌습니다. 우리가 자꾸 단 음식을 먹어서 인슐린 저항성을 올리면 11β-HSD1가 억제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스테로이드 약을 먹고 왜 합병증으로 당뇨가 발생하는가에 대한 부분에서 다시 나올 예정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