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약은 소변이 많이 나오게 만드는 약(이뇨제)이지만 정작 심장 기능이 떨어진 환자에게 더 유용하게 쓰입니다.
2. 알도스테론이 많이 나오면 조직에 흉터가 생긴다(섬유화)는 사실은 의외로 신장(콩팥)이 아닌 심장 연구에서 처음으로 밝혀졌습니다. 과학자들은 심장에 알도스테론을 주입했더니 근육이 흉터조직으로 변하는 걸 발견했고, 반대로 알도스테론이 심장에 결합하는 걸 막았더니 딱딱해지는 게 줄어들고, 그 결과 환자들의 생존율도 30%나 올랐기 때문입니다. 알닥톤, 애플레레논, 케렌디아와 같은 미네랄로 코르티코이드 수용체 길항제 (MRA)는 알도스테론으로 인한 조직 섬유화를 억제하여 질병 악화를 막아내는 치료제로 쓰입니다.
3.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화장실 변기가 막힌다면 사람들의 부주의함을 탓하겠지만, 별로 쓰지도 않는 변기까지 다 같이 막힌다면 그건 사용법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높은 혈중 알도스테론이 심부전의 원인이 된다는 가설은 이런 논리에서 출발했습니다.
4. 테네시 대학교의 심장내과 석좌교수 칼 웨버(Karl Weber)는 현대 심부전학의 대가입니다. 그는 힘을 줘서 억지로 늘리다 더 이상 줄어들지 않게 되어 버린 노란 고무줄처럼, 심장도 높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근육이 축 늘어나 버려 심부전이 생긴다는 기존 통념을 깨트렸습니다. 그는 커지거나 늘어나는 것보다 사실은 근육이 흉터로 변해 딱딱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이고 여기에 작용하는 주범이 다름 아닌 알도스테론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세웠습니다.
5. 1980년대 칼 웨버 교수는 고혈압 환자의 심장을 관찰하던 중 '높은 혈압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부위'까지 섬유화(흉터)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우리 심장은 총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사실 높은 혈압을 이겨내고 혈액을 짜주는 부담을 실제로 지고 있는 곳은 좌심실뿐인데도 정작 혈압이 직접 작용하지 않는 다른 부위까지 모조리 섬유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 그때까지만 해도 심장의 섬유화(딱딱하게 굳음)는 높은 혈압과 같은 혈역학적, 물리적 자극이 반복된 결과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발바닥은 연하고 무르지만, 나이가 들며 굳은살이 배기고 거칠어지는 것처럼 심장도 혈액을 쥐어짜 주다 보니 세월이 흐르며 딱딱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지요. 이러한 논리에 합당하게 높은 혈압으로 심장에 부하를 주던 환자의 심장은 훨씬 섬유화가 심하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7. 한데 정상인의 좌심실 압력이 120mmHg인데 반해 가장 낮은 우심방은 겨우 5mmHg 밖에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우심방에 일어난 섬유화까지 높은 혈압 탓을 하는 건 사실 앞뒤가 맞지 않긴 했습니다. 수십 년을 살아낸 우리 몸도 비록 발바닥은 각질로 뒤덮였지만 겨드랑이 안쪽 살은 여전히 말랑말랑하니까 말이죠.
8. 그래서 칼 웨버 교수는 심장의 섬유화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혈액 속을 다니는 어떤 물질 때문에 생긴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심장 근육에 가해지는 혈압은 각각 다르지만 피는 공평하게 흐르니까 말이지요. 변기가 막히는 건 아무거나 집어넣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탱크를 채우는 물이 문제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러고 곰곰이 따져보니, 아무래도 고혈압 환자나 심부전 환자에서 높게 측정되던 '알도스테론'이 제일 의심스러웠습니다.
9. 알도스테론이라니, 지금에야 그러려니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까지만 해도 꽤 파격적인 가설이었습니다. 왜냐면 알도스테론은 신장(콩팥)에만 작용해 전해질(나트륨이나 칼륨)을 조절하고 소변을 재흡수해 체액량을 보전하는 역할만 한다는 게 정설이었거든요. 심장이 약해지니 혈류량이 줄어들고 줄어든 혈류량을 보상하기 위해 신장에서 수분과 나트륨을 재흡수하는 알도스테론이, 결과론적으로 늘어난다는 그때까지의 이론을 반대로 뒤집어 생각한 것입니다.
10. 당시에도 레닌-안지오텐신-알도스테론 시스템(RAAS)을 이용한 ACE억제제와 ARB가 쓰이던 때였습니다만 알도스테론이 상대적으로 무시(?) 받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안지오텐신 II 가 워낙에 강력한 용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심부전 환자에게 투여해 본 새로운 혈압약 ACE 억제제의 효과가 너무 뛰어나 대조군에게 ACE 억제제를 주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해 연구가 중단되는 초유의 사건(1987년 CONSENSUS 연구)은 바로 안지오텐신 II이 억제됨으로써 생긴 일이라고 사람들은 짐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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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도 그럴만한 게 워낙 안지오텐신 II가 하는 일이 직관적이긴 합니다. 안지오텐신 II는 다름 아닌 일산화질소(NO)와 반대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합성되는 경로도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입니다. NO가 많아지면 안지오텐신은 줄어드는 식입니다. 안지오텐신 II는 혈관을 수축시키고, 그 결과 혈압을 올리고, 혈관 벽에 염증을 일으키고, 산화스트레스를 높입니다. 심지어 안지오텐신 II가 많이 분비되면 혈관이 딱딱해지는(섬유화) 것도 확인됩니다. 게다가 안지오텐신 II는 교감신경의 영향을 받아 생성되는 물질입니다. 누가 봐도 혈압과 관련된 합병증의 주범은 알도스테론이 아니라 안지오텐신 II을 먼저 의심하는 게 이치에 맞았습니다.
12. 그런데, 이럴 수가! 칼 웨버 박사의 엉뚱한 생각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쥐에게 알도스테론을 주입했더니 혈압이 채 오르기도 전에 심장 근육부터 딱딱히 굳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났거든요. 마치 말랑말랑한 겨드랑이 살에 굳은살이 배기듯, 심부전 환자의 그것처럼 말이죠! 바야흐로 레닌-안지오텐신-알도스테론(RAAS) 체계에서 신장에 전해지는 말단 신호수라고만 생각했던 알도스테론이 '섬유화' 사건의 주범으로 격상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3.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혈압약으로 ACE 억제제를 쓰면 처음에는 알도스테론 수치가 낮게 유지되다 시간이 흘러 스멀스멀 오르는 것(Aldosterone Escape)도 이상했습니다. 다름 아닌 안지오텐신 II는 잘 조절되는 데 말이죠! 웨버 박사의 연구 결과에 고무된 과학자들은 혈중 알도스테론 수치를 낮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약이 바로, 서두에서 알려드린 이뇨제, 알닥톤(스피로노락톤)입니다.
14. 알닥톤은 알도스테론의 구조를 모방해 만든 약으로 알도스테론 수용체(MR)에 알도스테론 대신 찰싹 붙어 알도스테론이 소변을 재흡수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한데 정작 이뇨 효과는 썩 만족스럽지 않던 약이었습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이뇨제, 라식스를 쓰면 칼륨 수치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생기는 데, 그걸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섞어주는 정도라고 할까요?
15. 무엇보다 알닥톤은 많이 쓰면 유방이 커지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코티솔, 알도스테론, 안드로겐은 모두 부신에서 콜레스테롤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형제 같은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라 하는 일은 달라도 모양은 비슷하거든요. 코티솔이 MR에 작용해 몸을 붓게 만드는 것처럼, 알닥톤도 안드로겐 수용체에 작용해 유방을 여성화시키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16. 만약 웨버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이 천덕꾸러기 알닥톤이 알도스테론이 심장에 작용하는 걸 막아 (MRA) 심부전의 진행을 억제해야 했습니다.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해당 연구 또한 계획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종료되었습니다.
17. NYHA 기준 3단계, 4단계(가장 나쁨)의 중증 심부전 환자 1,663명을 대상으로 기존의 치료 방식대로 혈압약인 ACE 억제제와 이뇨제만 쓴 그룹과, 알닥톤 25mg을 추가한 그룹 간의 치료 경과를 비교했더니 2년 간 추적과정에서 전체 사망률이 무려 30%나 감소하고 (284명, 35% 대 386명. 46%), 심부전으로 인한 입원이 35%가 감소될 정도로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1999년, RALES 연구) 이 연구 역시 이런 효과를 알고도 알닥톤을 심부전 환자에게 주지 않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해서 중도에 종료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