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또 다른 유럽, 발칸 반도 여행기
"어른이 되면 무얼 하고 싶어?"
교복을 입던 시절, 친구들과 모이면 어김없이 나오던 단골 소재였다. 어른. 아직 근접해보지 못한 그 세계는 무엇이든 그려볼 수 있는 미지의 세계였고,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펼쳐질 것만 같던 환상의 세계였다.
어른이 되면 정말 하고 싶은 게 많았다. 6층짜리 큰 빌딩을 지어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는 것,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는 것, 나만의 허브 농장을 갖는 것, 잡지에 실리는 것 ...... 전부 나열하기 힘들만큼. 그중에서도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은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성공하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가장 보편적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두 가지를 쟁취한 것만큼 행복한 성공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두 가지 타이틀을 완벽하게 이루고 싶은 것이었다. 어린 그 시절에도 알고 있었다. 멋진 커리어 우먼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쏟아부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의 이상향은 결혼 후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정에 충실한 아내이자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나는 마치 당장 결정해야 하는 일처럼 몇 날 며칠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내놓은 절충안이 시간차를 두는 것이었다. 20대만큼은 커리어 우먼이든 여행이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고, 30대에는 가정에 충실하기로. 물론 어처구니없는 답인 것을 안다. 신입사원이라는 이름을 떼기 바쁠 20대에 이름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랴. 또 어렵긴 하지만 일과 가정을 동시에 병행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굳이 흑과 백처럼 분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어른의 세계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던 10대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때 다짐했다. 결혼은 30대에 하는 것으로. 그리고 20대만큼은 후회되지 않을 만큼 오로지 나만을 위한 삶을 살기로.
그렇게 꿈에 그리던 나의 20대는 다짐했던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오로지 '나' 중심의 삶을 살아왔다. 한참 취업에 뛰어들어야 할 시기에 제주도로 내려가 3개월 동안 주민과 여행자 그 사이를 오가며 살기도 했고, 파워블로거가 되겠다며 블로그에 매달려 살기도 했으며, 손수 책을 내겠다며 독립 출판물을 제작하기도 했다. 덕분에 부모님께는 염치없는 딸이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늘 철없는 어른이었지만 후회는 없는 삶이었다. 물론 늦깎이긴 하지만 취업도 해 몇 년 동안 잡지 기자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한 기나긴 과정 속에 나의 20대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20대를 1년도 남기지 않은 시점인 2016년. 밤낮을 매일 바꿔가며 일하던 잡지 기자의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가고 있었으며 곧 다가올 30대 또한 묵직한 하나의 사안으로 다가왔다. 늘 그렇듯 지나가는 직장인의 슬럼프이겠거니 싶었지만 이번은 좀 심각했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은 늘 잿빛으로 가득할 만큼 처참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어느새 내 안에 독기와 살기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떠나야 했다. 일단 그게 어디든, 무엇이든 현재의 삶에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스스로가 정해둔, '내 마음대로 살기'의 마지노선인 20대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보다 적절한 타이밍은 없다고 생각됐다. 어렵게 입사한 그곳에 그렇게 사직서를 내밀었다.
원래는 남미로 떠나려 했다. 20대 초부터 늘 No.1 여행지를 남미로 선정할 만큼 남미 여행을 갈망했는데, 그 당시 국내에서 남미 여행이 생소했던 만큼 내게는 신세계였기 때문이다. 꼭 서른 전에 남미에 가야지 했는데 드디어 그 차례가 다가왔다. 남미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인 겨울에 맞춰 떠나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를 하면 할수록 뭔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일까지 그만뒀는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싶었는데 문제는 그거였다. 어디든 떠나자고 일을 그만뒀는데 여행 시기를 맞추기 위해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몇 달 뒤가 아니라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이 바로 여행이니까.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기후는 좋지 않겠지만 지금 바로 남미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계획을 바꿔 가까운 동남아로 갈까? 예전부터 노래 불렀던 파리에 다시 갈까? 그러다 눈에 띈 곳이 발칸이었다. 발칸 반도에 속해 있는 나라 지명은 물론 도시 지명도 낯설어 그 이름을 다 외우는 데도 한참이나 걸렸던 그곳. 대체 여긴 어떤 곳이야? 국내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봐도 여행 정보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또 다른 나의 신세계였다. 대부분이 잘 모른다는 그 사실이, 대부분은 잘 가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나를 매료시켰다. 되도록이면 아무도 나를 알 수 없을 그곳에서 나의 20대를 마무리 짓고 또 30대를 계획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의 발칸 반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터키부터 시작하여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헝가리를 찍고 다시 불가리아, 터키로 돌고 돌았던 88일간의 짧고도 긴 여정. 그 이야기들을 이제부터 하나씩 펼쳐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