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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Mar 29. 2017

남자랑 같이 잔다고?

혼성 도미토리에 대하여




"돈이 여유 있다 해도 나는 호텔에 가지 않아요. 호스텔을 더 선호하죠. 혼자 장기 여행을 나왔는데, 호텔에 머물기까지 한다면 너무 외로울 테니까요."


베오그라드 호스텔에서 만난 60대 한국인 어머님이 해 준 이야기다. 1년 동안 혼자서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데 대부분 호스텔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고 했다.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



Novi Sad, Serbia

호스텔은 그야말로 장기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렴한 비용에 여행 경비를 아낄 수 있는 것은 물론 다국적 친구를 손쉽게 사귈 수 있으며, 요즘은 투숙객들을 위해 시티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로컬 푸드와 음료를 맛볼 수 있는 바를 함께 운영하거나 DJ 파티를 여는 등 특색있는 호스텔이 많이 늘어났다. 이를 포시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호스텔을 이용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대부분 호텔 또는 리조트 등 독립적인 공간을 선택했으며, 1달 동안의 장기 여행에서도 카우치 서핑을 통해 현지인 집의 빈방에서 머물렀다.




Novi Sad, Serbia

도미토리의 매력에 눈을 뜬 것은 제주도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텝으로 지내면서부터였다. 처음 만난 낯선 사람과 며칠 동안 한 방에서 같이 지내는 것은 명백히 불편한 일이었다. 단순히 같이 잠을 자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왠지 모르게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랄까. 나의 민낯부터 시작하여 잠버릇은 무엇인지, 내가 일어나자마자 하는 건 무엇인지, 가방 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잠옷은 무슨 색깔인지, 깔끔하게 정리를 잘하는 스타일인지, 외출하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지 등 친구들도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되는 이들에게 면밀히 공개가 되었다.

비밀이라고는 만들 수 없는 그 장소에서 때로는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들을 만나 긴긴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호스텔은 매력이 있었다. 그곳은 국적도, 나이도, 직업도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고, 책이나 인터넷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알짜배기 여행 정보가 가장 많이 오고 가는 곳이기도 했다. 한 공간에서 함께 머무른다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을 쌓아 때로는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함께 맥주 한 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또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무엇이든 여행자의 무대가 되어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호스텔을 이용하는 것과 혼성 도미토리를 이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유교 사상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곳이다. 아무리 각자의 침대에서 머문다 하여도 남녀가,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낯선 남녀가 한 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 것은 우리나라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발칸 반도로 떠나오기 전부터 고민이 되었다. 여행 경비를 생각해서나, 또 여행하는 내내 외로움 속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선 호스텔을 이용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여성, 남성 따로 구분해 놓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부분 혼성도미토리였다.

낯선 여성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것도 불편한데, 낯선 남자와 뒤섞여 같은 공간을 이용하는 건 불편하지 않을까? 위험하진 않을까?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90일이나 되는 긴 여정 속에서 한 번은 이용해야 하는 곳이었다.




Novi sad, Serbia

불안한 마음을 이끌고 찾아간 혼성 도미토리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지극히도 평범한 공간이었다. 정말 '대체 무얼 걱정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곳을 이용하는 친구들의 사고에는 성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는 여자, 나는 남자. 우리는 성별이 달라'라고 구별을 짓기보다 '너도 나도 같은 사람. 너는 나도 같은 여행자'라는 생각이 더 앞서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한 공간에서 잠을 자'라는 생각보다 '여행자와 여행자가 새로운 공간에서 함께 생활해'라는 생각들이.

물론 모든 면에서 완벽히 성별을 배제할 수는 없다. 아무리 우리는 같은 인간이고 사람이야 라고 해도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지는 못 할 노릇.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남성 여행객들이 더 투철해 보였다.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내가 경험한 것으로 보았을 때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는 건 대부분 여성 여행객들이었다는 사실. 또 다들 한두 번 이용해보는 것이 아니니 공동체 생활에 대한 배려가 몸에 베어져 있었다. 서로 조심하고 또 피해 주지 않으려는 것들이 보였다.




Novi Sad, Serbia

세르비아 노비사드 호스텔에서는 처음으로 남성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4인실 도미토리를 예약하고 갔는데, 도착해보니 3명이 남자고 나 혼자 여자였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한 친구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상세하게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신발장은 어디에 있는지, 사물함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등 하나씩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호스텔 스텝인가 했는데 같은 방을 이용하는 친구였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뮤지션 친구.

그리고는 빈 침대를 가리키며 "여기는 이탈리아에서 온 의대생이 사용하고 있고, 그 위층은 일본에서 온 셰프가 사용해. 혹시 필요한 거 있음 뭐든 말해. 노트북도 필요하면 내꺼 쓰고, 물건 필요한 거 있으면 빌려줄게. 편하게 옷 갈아입고 싶으면 말해. 자리 비켜줄게" 그 친구의 말 한마디에 색안경이 벗겨졌고 경계심도 스르륵 풀렸다. '그래. 우리 다 여행하는 친구들이지. 까짓거 못 있을 이유가 뭐가 있어.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면 문밖에 여자 스텝이 있으니 도움을 요청하자'라는 생각을 하고 짐을 풀었다.





Novi Sad, Serbia

다행히 3명의 친구는 너무나 쿨하고 또 유쾌한 친구들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흥부자 친구들만 한곳에 모았을까 싶을만큼 개그 코드가 잘 맞아 한 번 입을 떼기 시작하면 서로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농담을 하고 웃고 놀았다.

또 뮤지션 친구가 있었던 만큼 우리는 각자 나라의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같이 아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며, 저녁에는 종종 펍으로 달려가 스크린 속 축구 경기에 내기를 걸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면 다 돌아볼 법한 이 작은 도시에서 우리는 그렇게 5일을 함께 머물렀다. 남녀를 떠나 우연히 같은 방에서 머무르게 되었다는 이유로 친구가 된 것. 이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게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고, 노비사드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친구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Novi Sad, Ser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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