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네그로에 숨겨진 보물, 블랙 레이크
여행의 묘미는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 지금 내가 걷는 길 뒤에 바로 어떠한 풍경이 펼쳐질지, 또 어떠한 사람을 만나게 될지,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 그 어떠한 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때론 그 변수들이 모이고 모여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여행 루트에 '자블락'이라는 도시는 없었다. 세르비아에서 국경을 넘어 바로 몬테네그로의 바닷가 지역인 부드바로 향하려고 했다. 전날 카페에 앉아 SNS에 몬테네그로를 검색해본 것이 화근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 사진 한 장이 눈에 포착되었다. 빼곡하게 삼나무가 들어선 숲 앞으로 펼쳐진 푸른 호수 사진. '우와 몬테네그로에 이런 곳이 있었어?' 곧장 그곳을 검색해 보았다.
두르미토르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블랙 레이크'라는 곳으로 작은 산간 지역인 자블락에 있었다. 블랙 레이크 라는 이름과 달리 영롱한 물빛을 띠고 있는 호수의 모습은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곧장 지도 앱을 켜 위치를 검색해 보았고, 세르비아에서 어떻게 가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숙소를 검색해 예약해버렸다. 이 모든 일이 3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속에 벌어졌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에 이렇게 아무 정보도 없이 무작정 가게 된 것이다. 우연히 본 사진 단 한 장에 이끌려.
여행은 가끔 이렇게 나도 모르게 흘러간다. 유명 명소를 둘러보기 위해, 또는 그 나라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또는 친구가 입이 마르게 칭찬한 곳을 직접 내 두 눈으로 보기 위해 목적이 있어 가는 여행도 있지만, 거기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어떤 도시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이끌려 가는 여행도 있다. 무심코 본 사진 한 장에, 지나가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
자블락까지 가는 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노비사드에서 2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베오그라드에 간 뒤,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9시간을 달려서야 겨우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무려 11시간의 긴 여정이었다. 비수기다 보니 버스가 많지 않아 여기저기 빙빙 둘러 가다 보니 아래쪽에 위치한 부드바 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끊어질 듯한 허리를 한 번 쭉 펴고 마을을 돌아보는데, '뭐야 여기.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아'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올망졸망한 집들과 키가 큰 나무들이 듬성듬성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곧장 숙소로 가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고민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주인공 '블랙 레이크'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마다 굵직한 산등성이가 눈앞으로 펼쳐졌다. 먼 옛날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나라를 '검은 산'이라고 불렀다.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보고. 그이름이 쭉 연이어져 지금의 '몬테네그로'가 되었다고 한다.
산을 보다 보니 '이름 하나 잘 지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회암 사이로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빛이 비칠 때는 초록색이 맴돌았지만, 빛이 없을 땐 말 그대로 검은 빛을 띠었다. 강한 남성미를 지니고 있는 느낌.
15분 정도 걸었을까 매표소가 나왔다.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호수라 산을 탈 줄 알았는데, 다행인 것인지 슬픈 일인지 매표소에서 호수까지 가지런히 도로가 포장되어 있었다.
조금 실망한 마음을 이끈 채 걷는데 저 멀리서 푸른 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망감을 단숨에 황홀함으로 채워주는 풍경이 곧이어 내 눈앞으로 펼쳐졌다.
그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청량하다, 영롱하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호수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고, 호수 주위로 삼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뒤로 눈 덮인 산이 삐죽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때마침 가을이라, 주변의 나무들은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기까지 했다. '아, 내게 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이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기 위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 주위로 가볍게 산책하고 돌아올 요량이었는데, 2시간을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그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산 주변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 바람에 따라 살랑이는 나뭇잎의 춤사위, 잎들이 부딪혀 사각사각 대는 소리, 시간에 따라 변하는 숲의 색을 반영하는 호수까지. 자연 그 자체의 모습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화려한 조명도, 화려한 건물도, 화려한 거리도 없었지만, 그 어떠한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화려한 색채와 웅장함이 있었다. 자연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것을 다 품고 있는 곳. 고요한 적막감이 흐르지만 거대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곳.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그렇게 넋을 잃고 있었다.
푸르디푸른 호수에 어찌하여 '블랙 레이크'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했더니 호수 주위로 빙 둘러싸인 삼나무 숲이 호수에 반영되면 검은빛을 띤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몬테네그로의 이름과 똑 닮았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빛의 예술을 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색을 따라 산도, 호수도 초록빛이 되었다가 노란빛이 되었다가 검은빛도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이름들이 생겨난 거겠지. 자연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자연의 경이로움을 이름으로, 마음으로 새기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곳은.
여행을 다녀온 뒤 사람들이 많이 물어봤다.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분명 내가 더 깊이 사랑하던 도시도, 더 많은 추억을 지닌 도시도 있었지만, 가장 많이 머릿속을 스치는 건 블랙 레이크 앞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았던 그 장면이었다. 잊혀질 만하면 한번씩 나를 불쑥불쑥 찾아왔다. 자연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