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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Apr 07. 2017

눈빛과 표정 그거면 충분해

자블락 할머니와 보낸 며칠




대화를 나눌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눈빛과 표정. 화려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현혹할 수 있을지라도 눈빛과 표정으로는 속이기 어려운 법. 때로는 그 눈빛과 표정 하나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고,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영어를 전혀 못 하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앱으로 숙소 고를 때만 해도 분명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누군가가 노부부를 도와준 모양이다.


나도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간단한 단어조차 통하지 않으니 '아뿔싸' 싶었다. 더더구나 이곳은 내가 아무 정보 없이 무작정 찾아온 몬테네그로 자블락. 숙소에서 정보를 얻어볼 요량으로 왔는데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비수기인지라 게스트도 나 한 명 뿐. 고작 2박 3일이지만 불편함 없이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이미 수차례 다국적 여행객을 맞아들였을 할머니가 내공을 발휘한다. '영어 없이 나누는 대화'의 깊은 내공. 할머니는 손짓과 표정으로 건네고 싶은 말들을 전해오기 시작했다.



Zabljak, Montenegro

일기예보조차 예측하지 못한 때 이른 첫눈에 흠뻑 젖은 나를 '아이고, 어쩌누'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곧장 안으로 들여 수건으로 닦아주던 할머니. 이내 2층에 위치한 방으로 데려가 라디에이터를 작동시킨 후, 작은 손짓으로 '온도 올렸으니 금방 괜찮아질 거야' 말하고 이부자리를 봐주셨다.

그것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할머니는 다시 나의 손을 이끌고 1층으로 데려왔다. 안채 문을 열고 들어가 나를 앉히더니 곧이어 따뜻한 차를 끓여 내주셨다. 직접 만든 케이크와 함께. 그리곤 맞은 편에 앉아 내가 먹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면서 미소를 한 움큼 지으셨다. '아이구, 잘 먹네'라는 눈빛과 표정으로. 나는 엄지 척을 들어 보이며 똑같이 미소로 화답했다.



그때부터 할머니와 나는 오로지 손짓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샤워기로 샤워하는 동작을 취하며 '할머니 샤워실이 어디에요?'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동작을 취하며 '할머니 헤어드라이어 있으면 빌려주세요.' 요청하기도 했으며, 블랙 레이크 사진을 핸드폰에서 꺼내어 보이면서 '할머니 여기 어떻게 가야 해요?'라고 물어봤다.


마치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듯이 이렇게 저렇게 몸을 굴리며 전달을 했다. 물론 시행착오는 따랐다. 하지만 실수를 하면 할수록, 동작을 하나씩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우리의 웃음소리는 더 커져 나갔다. 그렇게 마주 보고 웃는 시간이 늘어갔다.



Zabljak, Montenegro

할머니는 외출하고 내가 돌아올 때면 표정과 손짓으로 '잘 다녀왔누' 물어봐 주셨고, 밤에는 내 방으로 찾아와 라디에이터를 만져보고 따뜻한지 확인을 한 후에야 잠을 청하셨다. 진짜 우리 할머니처럼.

그 마음이 쌓이고 쌓이니 같이 사는 한 가족처럼 자블락 할머니 생각이 자꾸 났다. 집 앞 슈퍼에서 과일을 살 때면 어느새 한 봉지를 더 사 할머니 손에 걸어 드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며, 할머니와 마주칠 때면 손을 한 번씩 꼬옥 잡아 드리게 되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또다시 나를 안채로 들여와 따듯한 차를 끓여다 주셨다. 무어라도 하나 더 챙기려고 하는 진짜 우리 할머니처럼.




Zabljak, Montenegro

자블락을 떠나는 날, 쌓인 마음의 무게가 발걸음으로 옮겨져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웠다. 겨우겨우 짐을 싸서 내려오니 할머니가 배웅을 나오셨다. 할머니를 한 번 꼬옥 안고나서 얼굴을 바라보는데 할머니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도 덩달아 눈가가 시큰해져 한참을 할머니 손을 잡고 눈으로 인사를 나눴다.


우리는 목소리의 울림으로 전해져 나오는 말로는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못했지만, 그동안 오감을 이용해 수많은 대화와 마음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온 뒤,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은 결국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 전혀 안 통해도 그 사람의 눈빛과 표정으로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는 것. 진정한 대화란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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