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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Oct 31. 2019

시간을 느리게 감는 방법

일상과 비일상의 시간에 대하여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어 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가끔은 절반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기분이 든다. 오늘 하루, 과연 얼마나 시간에 집중하고 살았을까.

우리는 일상의 무수한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시간을 생각하며 사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하는 시간들이란 대게 이런 것들이다. 오늘 미팅 시간은 몇 시인지, 점심시간이 다가오는지, 퇴근 시간은 얼마나 남았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될 때는 언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바쁜 일상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시간’을 향유하러 가는 순간일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시간 앞에 ‘여행’이라는 이름을 자주 붙이곤 한다.



여행의 시간은 비일상적인 요소로 이루고 있어서 그런지 일상과 동일하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어느 때보다 특별한 ‘시간’처럼 여겨진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또렷해지고 곧장 실행으로 옮겨 나간다. 일상과 달리 단, 1초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다 하루의 끝에 다다를 때면 오늘의 시간은 어떠했는지,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정의를 내려 보기도 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시간의 농도가 이토록 다르기 때문일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그때를 돌아보면 실제의 시간과 기억 속 시간의 비례가 다를 때가 있다. 어떤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압축되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시간은 느리게 감아 저장이 되어 있다.

최근 2년 동안의 내 삶이 그랬다. 몇 년 전에 다녀온 3개월의 여행은 하나하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게 기억 속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지난 2년여의 시간은 반대였다. 회사도 몇 번(이나) 바꾸고 결혼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일들만 잔상에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시간은 흐릿했다.

내 시간의 기억은 어찌하여 조작이 되었을까. 일상을 되돌아봤다. 5분~15분의 차이가 있지만 비교적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매일 같은 시각에 버스와 지하철을 탄다. 회사에 도착한 이후부터 7시 언저리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일을 한다. 때로는 화장실 한 번 갈 틈도 없이 정신없게, 때로는 메신저로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며 여유롭게, 그런 시간들을 꼬박꼬박 채운다.

물론 그 시간 속에 나는 끊임없이 문서를 작성하고, 자료를 서치 하고, 메일을 보내고, 회의를 하고, 컨펌을 받는 등 무언가를 계속 연이어한다. 때로는 불태우며 연이어 타자를 쳐내려 간 날도 있고, 결과물이 잘 나와 뿌듯했던 날도 있지만 사실 지나고 보면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빼곡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기억 속에 저장되지 않는, 그냥 그저 그런 하루로 남는다.





여행의 시간은 규칙적인 일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아침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숙소에서 어슬렁어슬렁 나와 햇볕 쐬기 좋은 곳에 앉아 브런치를 먹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거닐다가 카페에 앉아 멍 때리기 일쑤였다. 어느 저녁에는 음악 공연을 보러 갔고, 어느 저녁에는 바에 앉아 술을 마셨다. 정해진 스케줄이란 건 없었다. 모든 것은 순간에 맡기고 즉흥적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나갔다.

이렇게 활자로 놓인 상태만 보면, 전자의 시간이 후자보다 더 열심히 보낸 하루처럼 보일 테다. 흔히들 말하는 ‘열심히 산다’, ‘하루를 보람 있게 보낸다’는 말에 충족되는 하루. 하지만 하릴없이 보낸 이 하루들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더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은 분명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 동화되어 가는 시간, 낯선 골목을 외울 만큼 걷고 또 거닐었던 시간, 독특한 음식과 술을 즐기고, 낯선 언어를 조금씩 익혀 나갔던 시간, 이런 시간은 비록 사회에 도움이 되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자양분이 되어 나를 지탱해주는 시간이 되었다.




결국 내 기억 속 시간의 비례는 극명한 온도차가 보이는 삶의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낯선 타국에서 보낸 3개월의 시간이 일상 속에서 보낸 지난 2년 보다 더 길고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물리적 시간과 기억의 시간은 이렇게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그렇다면, 일상에서 나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더 길게, 깊이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을까? 무의미한 순간으로 채운 하루가 아닌 기억 속에 또렷이 기억되는 순간을 채워가는 하루. 이미 나는 답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비일상적인 시간 속에서는 시간을 향유하며 살았으니.

결국 하루를 얼마나 바쁘게, 열심히 살았는지보다 단, 10분이라도 나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시간을 보내는지가 중요한 법. 그러한 시간들이야말로 기억 속에 깊숙이 저장되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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