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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L May 24. 2021

경주에서 수집한 8가지 생각

3일 동안의 경주



01  경주 가는 길

여행을 떠날 때면 꼭 책 한 권을 챙긴다. 읽을 때도 있고 못 읽을 때도 있지만 어느새 버릇이 돼버렸다. 보통 새 책을 사기보다는 예전에 사뒀다 읽지 못한 책을 한 권 데려가는데, 여행 에세이일 확률이 높다. 여행을 하는 도중 또 다른 여행기를 읽으면 동시에 두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재미가 제법 쏠쏠해서 여행 에세이에 가장 먼저 손이 간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도 한참 동안 책꽃이를 살피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다가올 인생의 변화를 예감하며 떠난 여행’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짧디짧은 여행 후, 나에게도 어떠한 변화가 있을까? 지금의 시점에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또 한 번 여행이 시작됐다.



02  다른 시간, 다른 삶

숙소에 짐을 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리스타 친구가 추천해준 카페다. 커피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며 경주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이곳에 가보라고 2곳을 추천해줬다. 첫 번째 장소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실패했지만, 다행히 두 번째 장소에는 자리가 있었다. 베리 향 가득한 커피를 마시며 친구와 얼마 전에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한국에 살고 있지만 조금은 다른 시간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에게 ‘1시간의 이동 시간’이란 출퇴근 이동 또는 서울 도심 어디론가 이동하는 시간이었지만, 대구에 사는 친구에게 1시간은 경주에 가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덕에 친구는 종종 경주나 부산에 들러 바람을 쐬고 온다고 했다. 내가 출퇴근으로 사용하는 동안 친구는 다른 도시를 넘나들고 있었다니. 그것도 사는 곳과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도시로의 이동. 남쪽 지역엔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삶이 있었다.


이러한 시간 체계를 사용하고 있는 건 친구뿐만은 아닌듯하다. 여행하는 내내 서울 사람 보기가 어려웠는데, 방문자 기록을 보니 대부분 인근 지역이었다. 언제든 가볍게 들릴 수 있는 곳이 경주, 부산이라니 내심 부러워졌다.



03  돌아온 뚜벅이 여행

“드디어 진짜 여행 온 것 같다”라며 남편이 이야기를 꺼냈다. 차 대신 뚜벅이를 선택한 결과다. 10년 전, 마지막 경주 방문을 떠올려보니 웬만한 곳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먼저 남편에게 도보 여행을 제안했다. 지난 제주 여행의 미안함 때문이었다.


해외든 국내든 여행을 떠날 때면, 늘 하루에 한두 곳 정도만 정해두고 나머지는 그날 마음 내키는 대로 하도록 빈칸을 많이 남겨두는 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었는데, 언젠가부터 하나둘 리스트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하나라도 놓칠까 발을 동동 구르며 돌아 다니고 있었다. 최고 정점을 찍은 건 지난 제주 여행. 한두 번 찾은 제주도도 아닌데, 짧은 일정에 보고 싶은 거 다 보겠다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온 동네를 휘감으며 다녔고 남편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숙소에 오자마자 술 한 잔도 못하고 뻗어 버리는 남편을 보니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무엇을 위해 수많은 점을 찍고 돌아서며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 여행이 기억에 더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닌데. ‘많은 것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하나를 보더라도 제대로 마음속 깊이 보는 게 중요해’라고 외쳤던 나는 어디 가고 누가 누가 더 많이 보고 왔나 내기라도 하듯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걸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다시 속도를 늦추기 위해 차에서 뚜벅이로 돌아왔다. 차가 없으면 ‘이왕 온 김에 바다도 보고 갈까?’, ‘여기까지 왔는데 아쉬우니까 거기도 가볼까?’라는 생각은 접어 둘 테니. 내 걸음이 허락하는 데까지만 갈 수 있어 여행도 간결해지고, 쉼표도 많이 늘어날 테니. 다행히 이번 여행은 남편이 더 만족하는 것 같다. 그거면 됐다.



04  비 오는 날의 한옥

후드득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천둥번개까지 치며 요란하게 비가 왔는데,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차가운 아파트 유리 표면으로 떨어지던 비와 두툼한 기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질감조차 달랐다. 비를 받아들이는 공간의 면적 또한 차이 났다. 아파트는 위층에 대부분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어 지붕이라는 개념이 없지만, 이곳은 지붕은 물론 처마까지 있어 빗소리가 훨씬 공간감적으로 다가왔다. 새벽 내내 무섭게 비가 내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올 줄 알았는데, 다행히 비가 그쳤다. 오늘의 여행을 하러 갈 시간이다.



05  예술가의 명상법

“벼루에 갈 때부터 마음을 순환시켜 모든 세상만사를 갈아서 없앤다는 뜻으로 해서 정신적 안정이 되었을 때 붓을 잡는다.”


비를 피해 우연히 찾아간 솔거 미술관. 그곳에는 한국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의 시작은 화백의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어느 작품보다 긴 긴 여운을 남겼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위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예부터 선조들이 해왔던 이러한 과정은 명상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벼루를 갈면서 생각을 비워내고 마음의 평안이 찾아올 때 비로소 한 획을 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났던 건지도.



06  여행에서 사진은 빼놓을 수 없으니까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살펴볼 때마다 무언가 반쪽짜리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했지만 둘이 담긴 사진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않는 이상 함께 나온 사진을 남기기 어려웠다. 물론 삼각대 등 도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의 열정까진 없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색다른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길거리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 보기로 했다. 셀프 촬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제2의 웨딩 촬영 같다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끼리 찍는 거니까 괜찮아. 재밌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긴장감을 털어내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찍어 봤지만 머릿속 그림과 달리 뻣뻣한 두 사람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제한 시간 15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남들은 200장 가까이 찍어서 고르기가 힘들었다는데, 우리는 겨우 60장 남짓 찍어서 4장이나 고를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우리 망했어...”라며 모니터 앞에 앉았는데, 의외로 사진 고르는 과정에서 큰 재미를 느꼈다. 예쁘게 나오지 못했더라도 누군가 찍어준 게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기에 하나 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실패한 표정과 포즈는 큰 웃음을 안겨 주기도. 결과물을 받아보니 생각보다 나쁘진 않다. 온종일 머쓱해하던 남편도 사진 찍기 잘했다고 답을 해주었다.



07  대릉원과 닮은 그곳

서울로 돌아가기 2시간 전, 남편을 혼자 카페에 두고 나왔다. 초록빛 가득한 대릉원이 눈에 밟혀 한 바퀴만 돌아보고 오겠다고 했고, 남편은 동행 대신 카페에 남아 책 읽는 것을 선택했다.


물기를 한가득 머금은 나무의 초록빛은 다른 날과 농도가 달랐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몇 년 전, 선정릉을 한 바퀴 돌았던 날이 떠올랐다. 선정릉역은 몇 번 오갔지만 이름의 주인인 ‘선정릉’을 실제로 마주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높은 빌딩 숲에 가려져 찾아가지 않는 이상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취재 차 찾은 곳이었는데, 가기 전까지만 해도 굳이 서울 내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곳엔 다른 풍경이 있었다. 운동복 차림의 주민들은 올록볼록 솟아난 능 사이로 운동을 하고 있었고, 근처 직장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걷고 있었다. 무덤 주위로 운동, 산책하는 사람들이라. 그 모습이 생경했지만 이상하진 않았다.


그들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아보니 구태여 왜 무덤 주위를 걷는지 알았다. 왕들의 무덤이다 보니 나무 하나도 고심해서 심은 탓인지 어느 공원보다도 길이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곳에 올 만한 이유가 설명되었다.


그 당시 고민하던 일이 많았기 때문일까. 죽음과 맞닿은 능을 바라보며 걸으니 스쳐 가는 생각조차 무게가 실리는 기분도 들었다. 확실히 일반 공원과는 달랐다. 다음에 또 와야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 날의 느낌을 이곳 대릉원에 와서야 되찾았다. 선정릉을 다시 생각해내다니, 다행이다. 오늘이 생각날 때면, 경주 여행이 그리워지면 찾아가야지.



08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며칠 전에도 오셨었죠? 그때 커피는 괜찮으셨나요?”


질문에 화들짝 놀랐다. 경주에서도 많이 찾는 카페라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갔을텐데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계산할 때를 제외하곤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는데 말이다. 낯선 지역, 낯선 곳에서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반갑게 다가왔다. 하루 이틀 머물다 곧 사라질 이방인이지만, 누군가의 기억에 남겨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다른 종류의 이방인이 된 것만 같아서. 경주에 온 것을 나만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누군가도 기억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우리는 이곳에서 경주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의 순간이 따뜻한 환대라니, 두고두고 기억에 남겠지. 이 기억을 오래 붙잡고자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는 원두와 책을 사서 돌아왔다.



09  Epilogue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한 경주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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