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는데 8년 걸렸습니다
종강을 했다. 수만 가지 감정들이 내 안에서 요동친다. 이것은 이렇게 졸업해도 되나 싶은 학문적 수치심이기도 하고, 기쁨이었다가, 슬픔이었다가, 불안이었다가, 허무함이었다가, 뿌듯함이었다가,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두근거림이 된다. 2018년, 한 전공 교수님과의 면담에서 교수님은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다며 징징대는 내게 “졸업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미션이다”라고 선포하셨고, 나는 그 미션 도대체 깨는 게 가능은 한가요, 포기할래요, 다시 해볼래요, 아 역시 지금은 아닌 거 같아요, 하며 긴 시간을 돌아 돌아 드디어 미션을 완수하고 척척 학사 졸업장을 받는 일만 남았다.
대 2병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슬픈 건 나“라는 생각에 지배당해 세상 슬픔 다 가진채 살아가는 병이라고 들었다. 나도 이 병을 무사히 지나치진 못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자의식 과잉이 될 수도 있고, 사뭇 무슨 그런 병에 걸리고 오만 청승을 다 떠는가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게 꼭 필요했던 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8년이다. 1학년때는 과거의 내 모습에 대한 분노, 지금 내 모습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분노, 주변을 향한 분노, 신을 향한 분노를 가득 품은 채 걸어 다니는 폭탄처럼 살았다. 분노는 자율이 없는 자유로 이어졌다. 이 분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 과정의 시작을 새내기 때 시작했다. 그렇게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상태로 2학년, 3학년을 전공과제에 파묻혀 보내다 번아웃이 왔고, 모든 것을 스탑 했다.
그 후 다행히도 좋은 곳에서 좋은 어른들을 만났다. 일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고, 나를 제대로 보고, 주변을 제대로 보는 법을 그때부터 배우고 시작하게 된 것 같다. 반년을 일종의 수련의 과정을 거쳐 호기롭게 복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삶은 쉽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발견하게 되는 진짜 ‘나’는 정말, 엉망 그 자체였다. 혼자 우울함에 허덕이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로 온 세상이 우울함에 허덕이는 시기가 겹치게 되었다.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잃어갔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일단 벗어나기로 했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나를 아는 이들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러려면 돈을 벌 곳이 필요했고, 잠을 잘 곳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풍경 좋은 곳이 좋겠다 싶어 무작정 제주도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알바를 찾았다. 딱 두 군데가 있었다. 한 군데는 빵을 파는 곳이었는데 나는 빵을 안 좋아하니 남은 한 곳을 골랐다. 바로 우도였다.
섬 속의 섬이다. 완벽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 사상에 절여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주말 없이 월 단위로 휴무 수만 정해져 있다 보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일을 하고, 같은 시간에 마감을 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수영을 하고, 새벽까지 잠이 안 올 때면 숙소 앞으로 나가 바다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을 엿보았다. 그 속에는 내가 몰랐던 세상이 가득했다. 운이 좋았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어찌 보면 잠깐 보고 말 사이었음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을 다했다. 좋은 풍경과, 좋은 사람들, 매일같이 주어지는 일이 다시 나를 살게 했다. 그렇게 5개월을 보내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득 채워 육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운 좋게 브런치 작가가 되고, 좋은 기회로 또 인턴을 하게 되고, 다시 힘을 얻어 포기했던 졸업설계를 다시 시작했다.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함께하는 동료들 덕에 끝까지 달려올, 아니… 기어 올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지만, 점점 이겨낼 힘이 생겼다.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8년쯤 되니, 엉켰던 실들도 풀리기 시작했다. 새내기 때 내가 품고 있던 분노들 대부분은 희미해져 사라져 간다. 미워했던 사람들을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고, 또 날것의 나를 참아내느라 힘들었을 이들을 생각하며 속으로 감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나와 함께 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커져간다.
앞으로는 또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 발견하게 될 나를 기대하며, 졸업축하한다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