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by 돌문어

1.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 흑역사라는 말은 일본애니메이션 ‘∀건담’에서 등장하여, 표준어로까지 인정받은 고유명사다. 그만큼 모두의 공감을 사는, 힘을 가진 단어라는 말 일 테고, 그 힘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서 오는 것일 테다.


2.

요즘 나의 중요한 핵심기억으로 자리하던 경험이 통째로 흑역사화 되는 신기한 현상을 겪는 중이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발원지와도 같은 기억이고,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가장 큰 아픔이자 내가 신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할 이유가 되던 기억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갈등이 마치 예술처럼 얽히고설켜 세상에 이런 일을 경험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는 자부심마저 들게 하던, 자랑스럽던 나의 기억인데. 요즘은 이 기억을 사람들 앞에 꺼내 놓을 때면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그 기억에 취해 억울함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3.

그렇다고 해서 그간 상처를 스스로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던 날들과, 써 내려갔던 감정과 생각들을 송두리째 무시하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다르게 그때의 감정과 생각들이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끼고, 희미해져 갈수록 나는 더욱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이제 나를 몸부림치게 했던 감정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때 당시 썼던 일기만이 나의 몸부림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4.

아픔은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흑역사가 되고, 흑역사는 흑역사의 재현으로 치유된다. 요셉은 꿈해석을 하다가 노예로 팔려갔고, 꿈해석으로 신분상승에 성공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 축복을 가로챘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해 신부를 바꿔치기당했다. (후자는 잘못을 돌려받은 느낌이 강하지만 아무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전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다시 마주할 때가 있다. 그때의 반응과 결정을 통해 흑역사를 다시 한번 해석하게 되고, 부끄러움이 옅어진다. 거지 같았던 상황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건 어쩌면 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5.

사랑이 넘치는 우리 신께서는 몇 번이고 부끄러움을 마주하게 하고, 몇 번이고 부끄러움을 넘어서게 하는 선물을 주신다. 나는 실로 지금도 부끄럽다. 글을 쓰고 있기에 부끄럽고, 나의 무지함과 부족함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있기에 부끄럽다. 이 흑역사 역시 지금 나의 반응과 결정을 통해 치유될 수 있을 테다. 받기가 참 까다로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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