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하듯 들어 올려
이케아는 참 여러 방면으로 익숙한 기업이다.
경영학도에게 이케아는 사골이다. '가구는 비싸고 무겁다. 그래서 구매에 신중해야 한다'는 인식을 전 세계적으로 탈바꿈한 장본인. 이렇게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어버린 기업들은 경영학도에게 교과서가 된다. 이케아 역시 이런 교과서적 기업으로 한 학기에 한 번씩 꼭 다루고 다뤄졌던 기업이다. 15학번 고인물이지만 지금도 많은 경영학도들이 다루고 있을 것이란 추측을 어설프게 해 볼 수 있다. 챗지피티라는 도우미가 없던 나의 1~2학년, 어설픈 솜씨로 그들의 기업문화와 마케팅을 분석하고 밤새 보노보노 피피티를 만들며 달달 떨면서 발표했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자취생으로 마주한 이케아는 인테리어에 있어 '가심비'를 느끼게 해 준 단비 같은 기업이다. 돈은 없지만 체력이 남아도는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자취러들에게 '셀프 조립'이라는 적절한 합의점을 제시한 똑똑한 기업이기도 했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내 방의 여백을 세련되게 채워준다는 점에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케아가 생겨난 후 수많은 이케아분자들이 생겨났지만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인식은 쉽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소비자 기억을 먼저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 계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른 이케아를 경험하게 된다. 근로자로서의 이케아. 아아 물론 '정규직'같은 그런 정식적인 근로자는 아니다. 온라인으로 이케아를 쇼핑한 당신의 장바구니를 담아줄 단기 물류 헬퍼로써 이케아를 경험하게 된다.
자취하면서 인스타그램만큼이나 자주 켰던 앱이 있다. 바로 당근이다. 자취를 막 시작할 때만치 퇴사 후 당근을 찾는 빈도는 더욱 잦아졌는데, 이유는 <당근 알바>에 있었다. 희망퇴사하며 퇴직금이란 나름의 여윳돈이 있었지만 손대면 톡 하고 사라질 것만 같은 탓에 나는 일을 구하기 전까지 알바로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다짐한다. 교통비도 아까웠던 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동네 알바만 쏙쏙 골라주는 당근 알바에서 괜찮은 매물이 나오는지 매일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고침한 당근 창에 이케아 단기 물류 헬퍼를 뽑는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시간은 10시부터 19시. 쉬는 시간 1시간을 포함해 9시간을 근무하는 스케줄이었다. 고민이 됐다.
물류면 너무 힘든 일 아닌가?
고민하는 시간만큼 늘어가는 지원자 숫자에 초조한 마음이 들어 일단 지원을 저질렀다. 이런 공포 마케팅을 쓰다니. 당근 앱이 머리를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웃소싱업체에서 알바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자 되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지만 막상 되니까 하기 싫은 마음이 불쑥 들기도 했다. 그래도 기왕 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잠을 청했다.
날이 밝고 9시 30분. 준비물로 알려준 신분증을 챙겨 이케아로 향했다. 도착한 이케아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보안실이었다. 이케아의 직원용 엘리베이터, 사무실을 드나들려면 직원용 카드가 필요하니 보안실에서 신분증과 직원용 출입 카드를 교환하고 오라는 안내 사항이 있었다. 보안실에서 신분증과 사원증을 교환하고 안전 교육을 받으러 2층 이케아 사무실로 올라갔다. 보통 물류 알바와 달리 이케아는 사무직원들이 근무하는 오피스에서 안내를 받았는데 덕분에 이케아 내부 오피스의 모습들도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 자료 수집하며 봐왔던 이케아 오피스 실물을 이렇게 마주하게 되다니. 뻥 뚫린 통창에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공간 한가운데 파티션이 없이 줄지어진 책상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전형적으로 공부했던 외국계 회사의 모습이었다.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는 직원들 마저 외국계에서 일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딘가 여유로워 보였다는 소리다.
쭉 이어진 복도에는 게시판이 있었고, 게시판엔 이달의 우수직원과 신입사원이 왔으니 환영해 달라는 글, 공지사항, 채용 공고 등 다양한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공지되어 있었다. 재직했던 회사도 나름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이케아는 가구 및 인테리어를 다루는 회사라 그런지 사무실 환경이 정말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사무실이라는 공간의 인식이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눈으로 재빠르게 이케아를 훑어보는 동안 담당 매니저 하시는 분이 다가와 유니폼과 안전화를 주셨다. 그리고 위급 사항 시 대처 요령, 미아 발견 시 대처 요령 등 기본적인 안내사항과 함께 물류 업무에 대한 설명까지 들으며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단기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매니저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 가지를 여쭤보셨는데, 첫 번째는 '혹시 이런 일을 해보셨나요?'였고, 두 번째는 '평소에 운동은 좀 하시는 게 있으셨나요?'였다. 보통 15kg이 넘어가는 무거운 물건을 여성이 운반하는 게 염려스러우신 듯했다. 이런 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크로스핏을 한다고 하니 매우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안내를 받고 유니폼을 갈아입기 위해 직원 휴게실로 들어왔다. 널찍한 휴게실에서 개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생 때 일일알바를 한 적이 있는데, 보통은 비좁은 휴게 공간에 여러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휴식을 취해야 했다. 숨이 막혀 일부러 바깥에서 휴식을 취했던 적이 많았다. 돈이 되는 공간을 더 활용하고자 휴게실이 비좁아진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지 이렇게 넓은 공간의 휴게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게 다가왔다. 직원 캐비닛이 엄청 많았지만 전혀 비좁아 보이지 않았다. 환경은 깨끗했고, 안락한 색들과 소파 같은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줄지어진 소파 앞쪽엔 다리 마사지기가 있었고 사진엔 없지만 더 앞쪽엔 종아리를 스트레칭해 주는 필라테스 기구 같은 것도 있었다. 근무 특성상 장시간 서있어야 하는 일이 많아 배치해 둔 듯했다. 공간의 모든 소품과 인테리어들이 푹 쉬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유니폼을 입고 근무 태세를 갖췄다. 옷매무새를 점검하는데 거울에 붙어있는 카피들이 눈에 띄었다. 이케아 거울에는 모두 카피가 쓰여있었다. [고객을 만날 준비가 되었나요?], [오늘 하루 어땠나요?] 등등 인간에게 환경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런 디테일이 참 감동스러웠다. 그리고 일일 알바지만 이런 유니폼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아주 흡족했다. 다른 물류 알바는 유니폼 따위 주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옷 중 가장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가 땀을 뻘뻘 흘리고 오면 곧바로 빨래통에 집어넣어야 소생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을 없애주는 '유니폼 제공'이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이케아는 아니지만, 물류 알바 후기를 검색하면 각종 텃세 관련 후기글들이 쏟아진다. 기존 직원들이 무시를 해요. 잘 안 알려주고 성질을 냅니다. 텃세 부려서 다신 안 합니다 등등. 지레 걱정한 것과 달리 물류 직원분은 친절하셨다. 초보자인 우리를 걱정해 요령을 직접 전수해 주셨다. 절대 힘으로 들면 안 되고 데드랑 스쾃 하듯이 들어야 한다고 자세까지 직접 선보이시면서 말이다. 일하다 보면 인수인계랑 업무 교육이 제일 진 빠지는 데 차근차근 알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었다.
기존 직원분과 함께 해본 후, 근무 방법을 익히면 이제 혼자 피킹을 시작하게 된다. 피킹 업무는 온라인으로 손님이 주문한 물건들을 내가 대신 장바구니에 넣는 그런 느낌이다. 지급받은 단말기에 설정을 마치면 내가 피킹 해야 하는 리스트들이 주르륵 뜬다. 어떤 손님의 장바구니를 피킹 할 건지 선택한 후, 그 물건들이 있는 구역에 가서 하나씩 차곡차곡 담아 오면 된다. 나는 일일알바였기에 창고가 아닌 셀프바 쪽 물건들을 피킹 하라고 하셨다. 창고에는 무거운 물류가 많았고, 손님들도 직접 가져갈 수 있는 셀프바 피킹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가구들이 많은 편이었다.
물건은 무게중심을 위해 무거운 것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면 된다. 가벼운 물건들로 끝나는 것도 있지만, 그건 정말 소수였고 차마 사진으로 담지 못한 무거운 물건들이 훨씬 많았다. 단말기에선 한 번에 피킹 해야 하는 물건 수와 kg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이케아라 해도 가구다 보니 3~8개 정도의 총 무게 60~70kg가 주를 이뤘다. 물건을 빼서 카트에 올릴 때 움직이는 카트를 고정하기 위해 다리를 많이 써야 했다. 힘은 생각보다 들이지 않았지만 요령이 생기기까지 정강이를 꽝꽝 부딪히는 바람에 영광의 상처가 가득했다.
2시가 식사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1시 30분부터 밥을 먹고 싶었다. 언제 밥 먹나 했는데 식사하시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함박미소를 지어버렸다. 식사를 포함한 휴게시간은 1시간이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많이 먹고 싶었다. 자유 배식이기 때문에 양껏 담아도 된다는 사실이 설렜지만, 하필 내 차례에서 함박스테이크가 얼마 남지 않아 단 한 개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밥을 많이 먹었다.
이 식사의 값은 1천 원이었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천 원이라니. 식대도 식당도 없었던 직장에 있다가 식당이 있는 곳에서 천 원짜리 밥을 먹는 게 정말 색다르고 매우 좋았다. 천 원이면 그냥 밥값 내는 시늉만 하는 거 아닌가? 엊그제 사 먹은 프랜차이즈 소프트콘도 천원인 시대에 이런 복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다니. 내 주머니를 아껴주는 복지에 힘입어 절로 돈을 아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밥으로 충전한 기운을 다시 쏟아낼 시간이 왔다. 아침이던 창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둑해진 창밖에 동요된 건인지 퇴근 시간 30분 남기니 시간이 정말 안 갔다. 언젠간 가겠지... 비트가 빠른 노래들을 마음속 플레이리스트를 끊임없이 추가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7시가 됐다. 했던 물류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위해 다시 사무실로 올라왔다. 기존 직원들은 모두 퇴근 시간이었는지 사무실은 텅 비어있었는데, 유니폼을 제공해 주셨던 매니저님이 아직 남아계셨다. 왜 안 가고 계시냐고 여쭤보니 오늘 일이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아직 남아 계셨다고 하셨다. 중후하고 따뜻한 미소를 가지신 여자 매니저님은 그렇게 나의 이케아 일일 헬퍼 리뷰까지 듣고 너무 수고 많았다는 말과 함께 퇴근하셨다. 인사 차원인지 개인적인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 회사에 대한 호감도가 또 한 번 올라간 순간이었다.
씻고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퉁퉁 부은 종아리와 요령 없이 찍어댄 정강이가 쓰렸지만 그래도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또, 이케아라는 기업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온 것이 나에겐 꽤 큰 수확으로 남았다. 여러모로 익숙한 기업을 새로운 시각에서 경험했다는 점이 그랬다.
지옥이라는 회사 밖에서의 8만 8천 원이라는 사회적 스탯을 한층 쌓았더니 졸음이 몰려온다. 내일의 나는 또다시 백수지만, 백수의 시간적, 정신적 공백을 이런 식으로 만 쌓아간다면 제법 괜찮은 백수가 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