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위.꿈>전 at 수애뇨 339 / 퍼블릭아트 2017년 3월 기고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객체’로 바라본다면 관찰하고, 탐구하고, 이해해야 하는 ‘타자’로 인식하게 된다. 정반합의 논리에 따르면 그 대상은 익숙해질 때까지 맛보고, 도전해서 익혔을 때야 비로소 ‘나’의 세계에 흡수된다. 그러나 어떤 우연한 만남은 낯선 객체나 타자가 아니라 내가 그 세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새로 생긴 공간이라고 해서 찾아간 평창동의 수애뇨 339는 탐구와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자체를 그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늦은 오후의 볕이 유리창 안으로 들어와 작품과 어우러지는 장면에 누그러진 탓일 수도 있겠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주는 미세한 진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을 열면 처음으로 보게 되는 조소희의 작품 <...where...>부터 시작이었다. 홀의 중앙, 움푹 파인 곳에 연기가 풀어진 듯 가느다란 실이 이어져 있는데, 자세히 봐야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이쪽 끝부터 저쪽 끝으로 연결된 실, 그리고 거기에서 아래로 늘어뜨린 또 다른 실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미지의 영역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은 여리고 나약해 강약의 리듬조차 희미하다. 그러나 클라이맥스가 없는 그 무형의 흐름에는 결코 건드릴 수 없는 강한 힘이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렇게 유약한 재료를 이용해 존재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조소희의 작업으로 들어서는 첫 공간은 ‘자, 여기부터 꿈이다, 힘 빼고 시작하자.’는 환각제처럼 정신의 무장을 풀어놓는다. 정정주의 작업도 이 연장선에 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nighthawk>을 재현한 그 공간에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움직이는 생명이라면 오직 시시각각 변하는 빛이 있을 뿐. 공간을 쉴 새 없이 훑고 지나가는 빛의 움직임을 애니메이션으로 담아, 애니메이션은 또 액자에 담겨 전시장 한쪽에서 존재를 지키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Bunker>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이 관찰하고 경험한 공간을 축소판으로 재현했다. 단, 공개된 곳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된 상자 안에서다. 안에는 집 모형이 있고 한쪽 벽면에 노을 지는 바닷가 풍경이 펼쳐진다. 숨겨진 몇 대의 카메라의 시선은 내부와 외부를 모두 바라보고 있는데, 상자 바깥 면에 설치된 화면에 감시용 CCTV처럼 순환해서 등장한다. 궁금증은 증폭되고, 상자에 길게 난 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 속을 한참을 들여다봐도 구조를 이해하는데 별 도움이 안 되자 시선과 의식은 바깥쪽의 화면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짐작만이 가능할 뿐 무엇을 촬영하는지, 전체 구조는 무엇인지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카메라가 주는 화면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한계와 거기에서 오는 불편함, 궁금증, 좌절이 교차한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우리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세상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 그때 겪는 무기력함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권대훈의 작품은 이와는 대조되는 긴장을 유발한다. 그의 작품에는 인물은 있지만 공간이 모두 생략되었다. 덩그러니 서 있는 사람은 주변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그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와 등 뒤로 늘어진 그의 그림자, 포즈, 표정. 아마도 자정쯤 된 늦은 밤. 그는 밝은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인생 최대 고민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전시장은 빔 프로젝트에서 벽면에 쏟아지는 강현선의 <Catch me if you can>과 거기서 나오는 묘한 사운드, 박용호의 캔버스 안에 덤덤하게 자리 잡은 건물, 그림자, 묘하게 어우러진 하늘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감각을 선사했다.
지나고 뒤돌아보면 환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눈에 비치는 장면이 혹은 손 끝에 닿은 감촉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서 아마도 꿈이었다고 생각되는 그런 때 말이다.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수반하는 이 증상은 그대로 그 상태를 즐기면 될지, 아니면 노력해 벗어나야 할지도 가늠을 어렵게 한다. 수애뇨 339의 <터.위.꿈>전의 느낌은 서서히 흩어지는 잔운처럼 그렇게 한동안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