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나는 가지
불합격 공고를 확인한 당일, 태림에게 가장 무겁게 다가왔던 것은, 자기 일 년이 수포가 되었다는 사실도, 어쩌면 영영 정식 교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도 아니었다.
흐름, 날씨보다 차갑고 바람보다 매서운 태림의 집에 내려앉은 실망의 분위기 흐름이 태림을 짓눌렀다. 태림이 부모에게서 느끼는 서늘함은, 태림의 혈관에 흐르는 피마저 차게 식히는 듯했다.
태림이 살면서 누려온 것, 물적 지원뿐만 아니라, 태림의 몸의 각 구석까지도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빚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부모의 외면에 동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림은 공포감을 느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자책골을 넣은 선수가 되어 수십만 관중의 야유를 한 번에 받는 듯한, 우레와 같은 질타가 귓전에 들린다고 생각했다.
떠밀리듯 방문을 닫고 재빨리 걸어 잠근 뒤, 곧장 방에 틀어박혀 이틀을 꼬박 외출은커녕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태림에게 노크하지 않았고, 태림도 자신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난한 삶의 폭풍이 휩쓴 자리에, 태림은 그렇게 홀로 남은 앙상한 가지가 되었다.
마신 것도, 먹은 것도 없이 이틀을 지새우자, 태림은 문득 현기증과 몸 떨림이 잦아들며 몇십 시간 만에 눈을 제대로 떴다. 살기 위한 몸의 마지막 발악인지, 갑자기 몸이 더없이 가볍고 정신이 맑아졌다.
집을 나가자, 아니 여긴 집이 아니지. 집을 찾자. 태림의 짧은 결심은 이내 방향을 찾았다.
'자연에서 찾는 미래, 시드 스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린시로 이사를 오던 당일,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이어지는 시의 외곽에 자리한 시드 스쿨을 보며 태림의 아버지는 늘 그렇듯,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비난했다.
"교사는 나라 밥을 먹어야 진정한 스승이라 할 수 있지. 임용도 통과하지 못하면서 교육자라고 불리고 싶은가 보지? 자연에서 미래를 찾는다니, 그야말로 궤변이군."
살 길이 절박한 순간의 태림에게 그때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었을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태림은 어쩌면 그때부터 시드스쿨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라고 믿었다.
'정교사/보조교사 긴급 채용, 전 교원 기숙사 제공'
공고는 일반적인 교사 채용 공고였지만, 태림에게는 그것이 꼭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가항력적인 부름으로 느껴졌다. 이런 큰 결정을 혼자 해도 되는 걸까, 찰나의 고민이 지나가는 순간, 태림의 눈이 텅 비었지만 날 선 빛을 띠었다.
태림은 지금껏 자신이 결정한 것은 아주 어린 시절 학교 숙제로 키우던 강낭콩의 이름을 짓는 것 정도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 괴로웠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 '강낭콩은 쌍떡잎식물'이라는 해당 교과 시간의 내용에 맞게 '쌍강이'로 지으며, 별다른 애착을 갖지도 못했다.
태림은 머릿속 사전에 '확신'이라는 단어가 없음을 느꼈다. 외부의 명령과도 같은 결정에 맹목적으로 따라왔을 뿐, 스스로 결정해 본 경험이 없으니 확신의 여부는 애초에 태림의 인생에 존재 필요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반항심과 후회, 방향 모를 분노와 근원 모를 의지로 지원서를 즉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태림은 지원서의 마지막 칸을 채운 뒤 한참을 고민했다. 교육 대학교 졸업과 임용 고시 준비밖에 쓸 것이 없는 두 칸짜리 표가 자기 인생의 전부라는 것이 태림을 씁쓸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 옳은 선택인지, 이래도 되는지, 질문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대답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태림은 '지원' 버튼을 두 번이나 눌렀고, 아주 천천히, 큰 숨을 두어 번 내쉬었다.
그리고 그 여유는, 캐리어를 끈 태림이 시드 스쿨 정문에 서서 숲 내음이 가득한 공기를 한껏 머금는 장면에 다다를 때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서류 지원을 마친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태림의 휴대전화가 웅웅 거리며 울렸다.
"안녕하세요, 시드 스쿨 교감입니다. 지원하신 서류 확인했습니다. 오늘 오후 면접 어떠세요?"
태림은 순간 자기 몸이 에너지가 너무 부족해 절전모드로 며칠을 보낸 게 아닌지 의심했다. 지원서에 그린시에 거주한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었는데도, 온라인 화상 면접을 통해 최종 심사를 거친다고 했다. 자연을 사랑한다더니, 이동하는 데 드는 탄소 연료를 줄이겠다는 목표인가, 하는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실습 때 입었던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딱 맞게 떨어져 내심 만족스러웠던 정장은 몇 년 새 태림이 한 명 반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단추를 다 잠가도 펑퍼짐한 재킷을 입고 배와 팔 부분을 조금씩 누르니 그나마 나아 보였지만, 입어보지도 않고 산 것처럼 큰 치수에 태림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대비라 할 것도 없이 면접 시간이 되었다. 화상 카메라 속 태림의 모습이 어색하게 비쳤다. 어깨가 구부정했고, 눈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교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자기소개, 성장배경 등 몰아치는 순서가 태림을 어지럽게 했지만 교감은 곧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이들의 자율성입니다. 마지막으로, 태림 선생님은 어떻게 아이들과 관계를 맺으실 계획인가요?”
태림은 잠깐 생각했다. 솔직하게는, 자신이 외운 내용을 열심히 복기했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되, 책임감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와 격려를 통해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교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합니다. 태림 선생님이 우리 학교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군요.”
철학이라, 이 학교 철학이 뭐였더라. 자연 사랑? 자율성이 철학이라는 건가? 학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없었지만, 태림은 그간 임용고시를 위해 준비해왔으니, 나름 유연한 대처를 한 것인가 싶었다.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기숙사 입소는 담당 직원 통해 연락 갈 거예요."
"네?"
당황한 쪽은 태림이었다. 어버버 하는 사이 교감은 화면에서 사라졌고, 태림은 자신이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면접보다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몇 없는 옷가지들을 챙기고 캐리어를 끌며 집을 나서자, 집에 있는 줄도 몰랐던 태림의 어머니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태림 앞에 와 섰다.
태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런 얼굴을 한 어머니를 태림은 그간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허락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태림은 달랐다. 불과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불합격' 딱지가 붙은 수험생이었지만, 지금은 당당한 '교사'가 되었다는 자신감이 불쑥 솟아올랐다.
어머니는 순간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입술을 꾹 다문 얼굴에는 태림에게서 처음 보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태림은 처음으로 어머니를, 어머니의 감정을 밀어냈고, 어머니는 처음으로 태림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를 것 같은 어머니를 뒤로하고, 태림은 집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낮의 해는 뼈만 남은 가로수들의 껍질도 윤이 나게 했다.
태림이 태림으로서 살아가는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