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밝아오는 잎맥

by 이우선주



잠시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태림은 본인이 처한 이 조용한 재앙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수업 계획부터 완전히 새로 짜야 해. 내가 너무 안일했어.'


시드스쿨의 수업은 교과 교사의 수업과, 담임교사의 수업으로 구성되었는데, 매일 마지막 교시를 제외하고는 교과 교사의 담당 과목 수업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교시는 '홈룸 타임'으로, 담임 교사가 운영하는 시간이었다. 교과와 담임교사를 동시에 맡는 경우가 대다수인 듯했지만, 태림이 담임교사만 맡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학교가 제공한 교직원용 노트북을 비장하게 연 태림은 기존의 수업 계획서 파일을 삭제하고, 새 창을 열었다. 노트북의 왼쪽에는 교감이 태림이 기숙사에 입소한 첫날 건네준 수업 가이드라인과 참고용 교안을 가지런히 펼쳐두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교사용 다이어리 뒷부분의 빈 메모 페이지를 펴두고, 학교명이 각인된 삼색 볼펜을 올려놓았다.


하얗게 빈 노트북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 태림은 '자율성이 존중되는 교실'을 적고, 폰트를 키우고 볼드체 설정을 한 뒤, 가운데 정렬을 완료하며 자신의 마음에도 해당 문구를 못 박는 각오를 다졌다.


태림의 부모 말에 따르면, 태림은 '자율적'인 아이였고, 학교생활 기록지에도 태림은 '학습 욕구 및 동기가 높으며, 스스로를 독려하는 학생'이었다. 태림 또한 이에 동의하면서 커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림은 한 번도 부모에게서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부모의 심기가 불편해질라치면, 그 분위기를 온몸으로 감지한 태림이 자동으로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태림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학습의 필요를 느껴서 행동으로 옮긴 것이라 생각해 왔다.



태림은 공부가 힘들지 않았다. 태림에게 공부란 특정한 활동이라기보다는, 숨쉬기나 눈 깜빡이기 같은 아주 일상적인 영역에 속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성적은 달랐다. 태림의 모든 실수가 마이너스로 기록되었고, '실수도 실력'이라는 선생님의 말은 태림이 스스로가 얼마나 실력 없는 학생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럴수록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태림의 성적이 못마땅할 때 태림의 부모는 늘 이렇게 운을 띄웠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늘 본인들의 말을 배반했다.



태림이 아직 '어린이'이던 시절, 태림의 모든 세상은 부모였다. 부모의 칭찬 한마디에 태림은 자신의 방을 가득 채울 만큼 부풀었고, 부모의 한숨 한 번에 벼랑 끝까지 밀려 날아갔다. 그렇기에, 매주 돌아오는 단원평가나 쪽지 시험의 모든 결과는 태림에게 세상 끝 날의 심판과도 같았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이전보다 나은 점수를 얻지 못하면, 태림은 다음 기회가 오기까지 세상의 전부를 잃었다.


태림과 부모의 이러한 관계는 태림이 입시 준비를 하며 더욱 공고해졌다. 태림은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매일의 시간을 분 단위로 계획하며 형광펜으로 채워나갔다.


또한 태림은 '자발적'으로 교대 진학을 꿈꾸었다. 교육자가 되는 것은 태림의 세상의 태양이 자신을 향해 그 어떤 때보다 큰 웃음을 지어줄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태림의 삶에서 빛과 어둠을 교차시키며 계절을 만들던 부모가 태림을 빙하기로 몰아넣은 지금, 태림은 더없이 춥고 황량한 극야(極夜)에 갇힌 셈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던 태림은 이내 계획서 작성에 다시 몰두했다.

태림은 한동안 손끝으로 삼색 볼펜을 굴리며 화면 속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무언가 부족한 듯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하던 태림은 손끝으로 볼펜을 멈추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구체화. 어떻게 구현할 건지를 정해보자.'


교감에게 학교의 철학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자율성'에 대해 태림은 집중하기로 하고, 이를 어떻게 현실화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안 1. 아이들이 홈룸 시간을 돌아가며 계획한 대로 끌어나가게 한다.'


해당 방안이 왜 자율성을 함양하는지를 적어 내려가던 태림은 순간 망설이다 백스페이스를 여러 번 눌렀고, 이내 마우스로 '방안 1' 전체를 드래그한 뒤 모두 지워버렸다.

아까의 질문 폭격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직접 홈룸 시간을 이끌어가게 한다면 이전과 같이 통제되지 않은 분위기가 얼마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태림을 사로잡았다.


'방안 1. 아이들에게 홈룸 시간에 원하는 것을 써서 내라고 한 뒤, 알맞은 것을 교사가 채택한다.'


태림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스스로 선택한다고 해서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두는 것은 방종이자 직무 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 문장을 곧바로 이어 나갔다. 손끝에 딱 맞춰 단정히 정리된 손톱 덕인지 키보드 소리는 날카롭지 않고 조용한 무게감을 갖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안전한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안전한 범위 내에서의 선택'. 태림은 자신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 고개를 약간 내리고 뿌듯함과 기대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러한 설명이 계획을 지지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 같았다.


화면 속 단어들은 점점 또렷해졌고, 태림의 생각도 정리되어 가는 듯했다.

태림은 자신에게 '적절한' 규칙만을 제공하고, 구체적인 부분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한 부모의 교육방식이 자신을 얼마나 성실하고 강하게 만들어왔는지를 떠올렸다. 태림은 자신의 계획에 세세한 설명을 더해나가며 희뿌연 불안감과 막연한 걱정들을 가장자리부터 하나씩 지워나갔다.


곧바로 오후에 있을 홈룸 시간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태림은 첫날의 점심도 거른 채 계획에 몰두했다. 너무 집중한 탓일까, 태림은 교감이 자기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지도 교감이 언제부터 자신의 뒤에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어 화들짝 놀랐다.


교감은 선 채로 허리를 숙여 태림의 모니터에 가까이 다가갔고, 태림은 반대쪽으로 멀찍이 떨어져 그녀가 편안히 자신의 계획서를 볼 수 있게 했다.

태림의 계획안을 훑어본 교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시드스쿨의 철학과 잘 맞는 계획이네요. 학기가 너무 바로 시작해서 잘 적응하실지 걱정했는데,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태림 선생님의 성장 배경이 훌륭하다 보니, 교육관도 훌륭하네요. 이만 식사하러 가시죠."


교감의 교육 철학의 견고함에 감탄하며 태림은 황급히 채비하고 교감을 따라나섰다. 오피스의 긴 통유리는 관리를 자주 하는지 물때나 얼룩도 없이 투명했다. 교감의 뒤를 따라 걷는 태림에게는 이제 확신에 찬 자신감이 차올랐다. 막막함으로 좌절했던 마음의 창도 이미 말끔히 닦인 뒤였다.


"자율성은 혼란을 통제하는 가장 세련된 방식이죠, 안 그래요?"

교감이 자동문을 먼저 지나 태림을 살짝 돌아보며 들릴 듯 말 듯 하게 말했다.


태림은 그 말에 답하려다 잠시 멈추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통제와 자율성의 조화를 스스로 실현해 낸다면, 이 학교는 단순히 직장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펼치는 무대가 될 것만 같았다.


겨울의 햇빛이 투명한 창을 뚫고 들어오며 차가운 바람 대신 온기를 선사했다.

태림은 새로운 뿌리를 이식받은 엷은 줄기처럼, 가느다란 생명력이 피어오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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