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하나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혼자 있기를 잘하려면 우선 나는 나와 친해져야 한다는 것. 친해지려면 일단 잘 알아가기부터 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좋아하는 것들을 잘할 수 있도록 하고 싫어하는 일들은 줄이려 노력도 해야 한다. 여전히 나는 나를 잘 모르지만, 확실한 건 과거의 나 보다는 지금 내가 나를 훨씬 더 가깝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에는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한 채 정해진 일상에 나를 맞췄었다면, 지금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들을 느끼는지 먼저 살핀다. 그 덕분인지 세상 급하게 흘러가던 성격이 조금 느긋해졌고, 죽고 사는 일이 아닌 다음에야 그럴 수 있다는 마음이 조금 커졌다.
잘났든 못났든 나를 끌어안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숙명처럼 받아들여지면서 더디지만 나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은 나를 위한다는 핑계로 누군가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대부분 대척점에 있는 것들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정도로 얇디얇아서 항상 깨어있기란 참 어렵다. 그래서 나름으로 내게 득이 되면서도 남에게 누가 되지 않는 기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한다.
"나라면 나 같은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을까?"
즉, '남'의 기준이 내가 되는 거다. 내가 남이라도 나와 친하게 지낼 마음이 드느냐를 내게 묻는 것. 내게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싫게 마련이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터. 내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이걸 남이 내게 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 지점에서 나름의 기준이 생긴다. 물론 전적으로 이 기준이 모든 상황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소소한 일상 속의 실수나 후회는 줄여준다는 게 내 지론이다. '생각 없이 던진 말(혹은 행동)'이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경우를 자주 목격했고, 그래서 생각 없음이 주는 무례함과 위험성은 크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이라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이 말을 내가 들어도 괜찮을지 아닐지 정도는.
살다 보니 인간관계의 붕괴가 꼭 대단한 사건으로 일어나는 일은 아나리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자잘한 실망과 오해, 서운함들이 쌓여 결국에는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았다. 나와 나도, 나와 남도 모두 인간관계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해야 하고, 내가 나에게 탐탁지 않으면서 남과 잘 지내겠다는 것은 무리한 욕심일 뿐이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너그럽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무척이나 자주 목격했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참 말이 안 된다. 나에게 너그럽지 못한데 어떻게 남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가, 아마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욕심에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자기 객관화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자기애를 발휘하기에 앞서 내가 가진 요건들의 객관적인 정보를 익혀야 한다. 분명히 잘하는 게 있고 취약한 부분이 있으며, 어떠한 지점에서 즐거운지 어디에서 분노를 느끼는지 섬세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나에 관해 쌓인 정보가 어느 정도 객관화되면 그 이후부터는 필요 이상으로 내가 나를 몰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피곤해질 것 같은 상황이면 굳이 무리해서 끼어들지 않는다던가, 내가 즐거울 것 같으면 고되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한다. 물론 예상 밖의 변수들로 인해 시작과는 전혀 딴판인 결과를 얻기도 하지만, 그 또한 나에 대한 정보를 하나 더 쌓은 것이라 여기고 잘 접어둔다.
이렇게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조금 더 좋아졌다. 전에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투영된 내 모습이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내 마음에 조금 더 드는 내 모습들이 늘어났다. 방향도 모른 채 돋아있던 가시들을 조금 무뎌지게 만들거나 필요 이상의 것들을 잘라낸 기분이다. 나의 삶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던 때와 그 이후로 나뉜다.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모두 알지는 못할 것 같다는 어렴풋한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