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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희 Nov 24. 2020

42세 주부 공무원 도전기

얻은 것과 잃은 것

신랑 친구의 공무원 합격 소식

나는 집에서 공부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신랑이랑 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신랑 친구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랑 친구는 나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 어떻게 공무원이 되었냐고 나는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신랑은 심드렁하게 나를 쳐다보면서 공무원 시험 연령 제한이 폐지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 신랑 친구는 원래 일반 회사를 다니다가 회사가 어려워져 임시직 공무원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 공채와는 달리 시험 몇 개를 추가로 치르고 정식 공무원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던 때인 것 같다.

사회에서 나를 ‘경단녀’라고 불렀다. ‘경력 단절 여성’이라는 뜻이다. 내 열등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도 그 단어가 싫다. 왠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호칭이다. 여러 일을 그동안 했지만 취업은 아이 엄마에게는 힘들다. 여성인력개발원도 다녀보았지만 거기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공부방을 차리게 되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했을 뿐이다.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공무원 기출 시험지를 뽑아 신랑에게 디밀었다.

나 :  공무원 기출 시험지인데 같이 풀어 보면 안 될까?

       시험 경쟁률이 엄청나다는데... 한번 테스트해 보자! (머슥)

신랑이랑 나는 끙끙대며 한 시간 동안 영어 한 과목을 풀었다. (두둥) 신랑은 75점 나는 65점이 나왔다. 그때 난 아무것도 모르고 영어가 이 정도면 합격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헛웃음)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나중에 알고 보니 100분에 5과목이었다.

무작정 학원 등록

나는 낮에는 공부방을 하고 밤에는 인강으로 사회복지 2급 강의를 들었다. 그 당시 사회복지직을 엄청 뽑는다는 뉴스가 나왔던 터라 아무래도 행정직보다는 사회복지직이 낫겠다 싶었다. 공부방을 접고 공무원 공부를 해보겠다고 신랑에게 조심스럽게 선언을 했다. 막상 하려고 하니 ‘떨어지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스멀스멀 밀려오긴 했지만 강남에 있는 공무원 학원에 곧바로 등록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광역버스가 있어서 그 학원을 선택했다. 어차피 공부는 사람이 하는 거니까 학원은 다니기 편한 곳으로 다니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막내는 어린이집 종일반을 보냈다. 내가 늦는 날이면 초등학생인 큰 아이가 동생을 데리고 집에 데리고 왔다. 지금도 나는 다시 이 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곤 한다.

 

시험 실패와 큰 아이의 격려

11월에 학원 등록을 하고 이듬해 3월에 경험 삼아 시험을 보았다. 학원에 사회복지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긴장감을 갖는 걸 좋아해서 매년 시험을 보신다고 했다. 난 긴장감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게 부지런하지도 않다. 성실하기는 한데 그것도 진짜 TV에 나와서 새벽부터 밤까지 ‘이렇게 열심히 했어요’ 정도는 아니다. 평범한 성실함 정도가 딱 인 것 같다.

처음 시험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시험은 기상직이었다. 필수 과목은 똑같으니 나름대로 실전 테스트였다. 나머지 두 과목은 특수 직렬에 해당하는 전공과목이었다. 시험 보는 내내 여러 상식을 머릿속에서 뒤져가며 풀었다. ‘혹시 잘 찍어서 기상직 붙으면 어떻게 하지? 기상직은 지방 근무라고 하던데 어쩌나...’ 이런저런 어이없이는 상상을 하면서 시험을 치렀던 게 기억난다. 결과는 당연 불합격이다. 성적도 당연 40점도 안 되는 처참한 점수였다.

두 해를 넘기면서부터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도서관을 가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슬쩍 지나치면서 보게 되는 책들에는 중요한 메모가 가득 붙어 있다. 밑 줄도 엄청 많다. 그런 것들을 보면 나만 공부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시험은 계속 떨어졌다. 국어 점수가 잘 나오면 한국사가 망하고, 이렇게 성적이 들쭉날쭉했다. 집안 사정으로 교통이 불편한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온라인 강의가 여러모로 더 나았다.

2014년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이것은 내가 정한 기한이었다. 내가 이십 대도 아니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시간을 더 투자해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떨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깝게 떨어졌다. 떨어질 때는 한 문제 차이로 떨어지는 거다. 나는 시험 낙방 소식을 가족에게 알렸다. 큰 아이에게 내가 이제 시험공부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큰 아이한테도 그렇고 막내한테도 엄마로서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했다. 이런 마음이 전부 가짜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백 퍼센트도 아니었다. 시험에 붙을 자신도 없었다.

큰 아이는 내게 한번 더 해보라고 했다. 동생은 자기가 더 잘 돌보겠으니 지금까지 공부한 거 아까우니까 한 번만 더 해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큰 아이는 엄마는 성실하니까 합격할 거라고 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얻은 것은 남들 보기에 번듯해 보이는 직업

나는 그다음 해 2015년 운 좋게도 공무원에 합격했다. TV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친구들이 축하해 주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목표를 이루면 만사가 술술 풀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은 산 너머 산이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좀 더 큰 언덕이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어도 힘든 건 힘들다.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면 속세를 떠나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잃은 것은 큰 아들의 자퇴와 작은 아들의 학교 부적응  

모든 엄마는 자기 자식에게 미안함을 갖고 산다. 아기였을 때는 감기에만 걸려도 내 탓인 것만 같고 미안하고 그랬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자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반항아도 아니었으며 공부도 그럭저럭 했다.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 교우관계가 문제라고 할 만큼도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도 너무 뜻밖이라고 하셨다. 작은 아이는 초등학생이다. 학교 생활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친구가 별로 없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을 힘들어한다. 물론 아이들이 겪는 평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학교 상담에서 선생님들의 지적은 매번 비슷하다. 작은 아이가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자꾸 자책하게 된다. ‘그때 아이랑 같이 있어줬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깨달은 것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다. 욕심이었나 보다. 나로 사는 것과 엄마로 사는 것 모두 잘하고 싶었는데 둘 다 망쳐버린 느낌이다. 모든 건 선택이고 그다음은 책임지는 거다. 자꾸 자책하는 나도 아프다. 아직도 나의 이 자책감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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