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몰랐다
아니, 아직도
나는 너무 모른다
<기생충>
영화를 보니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나는 상을 받고도 인사 한 번 가지 않았다. 나는 시집을 내고도 시집 한 권 보내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삶을 몰랐다. 나는 지금껏 문단을 너무 몰랐다.
안도현 시인이 그랬다. 술을 먹지 않으면 시인 될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그만큼 공감 능력과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너무 고마움을 몰랐다. 나는 너무 인색하게 살았다. 나는 너무 각박하게 살았다. 나는 너무 표현 할 줄 몰랐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그럴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사람이 있다. 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를 도와주려고 시집을 내자고 했던 출판사 사장님이 있었다. 책도 잘 만드는 출판사였다. 그런데 나는 원고를 주었다가 편집까지 다 끝난 시집 출판을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참으로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도와 주려는 고마운 사람의 성의도 모르고 나는 야멸차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원고료든지 인세든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선불로 충분히 준다면서 사정을 하였는데, 기고만장했던 나는 철없는 행동으로 큰 상처를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잘 만들던 시집 시리즈 출간도 중단을 선언하였다. 나 또한 미안한 마음과 뒤늦은 후회로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시인은 시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를 쓰는 테크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고 먼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랑에서도 그렇듯 사정보다 중요한 것이 전희와 후희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서로 마음을 합쳐 함께 손 잡고 산을 오르고 내려올 때 더욱 서로에게 배려하며 더욱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발을 맞추어가며 함께 내려와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될 것이다.
요즘에는 자식을 낳아도 그럴 것이다. 자식을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낳은 후에 잘 길러야만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낳은 후에 잘 길러서 오늘날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잘 낳은 자식도 그냥 방치하면 자식은 잘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잘 쓴 시라 하더라도 어디에 발표하느냐에 따라 그 시의 운명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시를 낳은 시인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시의 운명 또한 달라진다. 시는 시를 낳은 부모인 시인과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생들 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후속 발표 시들에 따라서도 그 시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늘 한 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도 많다. 나는 가끔 페이스북을 이용한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입장에서 이용을 한다. 나는 내 생각의 저장 창고로 이용을 한다. 다른 사이트에는 저장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페이스북의 고유 목적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활용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주요 활용 목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가장 큰 목적일 것이다. 가끔 내 생각을 저정하기 위해 들어가 보면 참 부지런히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람들이 많다.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여러사람들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 글들을 다 읽고 좋아요를 누르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지 못하는 내 자신이 반성할 때도 있다. 좋아요에 너무 인색한 내가 바보스러울 때도 있다. 나의 페이스북 자료에는 대부분 나만보기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페이스북 운영진에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아마도 제한을 두는 모양이다. 요즘에는 글쓰기도 잘 안 되고 저장도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지난 날 내가 저장해 둔 자료들이 불현듯 나타날 때는 참 신기하기도 하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는 3년 전 나의 생각이 툭 튀어 나왔다. 요즘에는 회사에서도 쓸 수 있는 브런치를 발견해서 브런치에 내 생각들을 저장하는 중이다. 이 브런치에 글쓰기도 언제 차단 될 지 모른다. 회사에서는 딴 생각 하지 말고 오직 회사 일에만 집중하라고 다른 것들은 모두 차단하는 중이다.
참 나를 찾아서 55 ― 마음
눈이 내린다 검은 눈이 내린다
처음부터 검은 눈의 세상이 눈부시다
꽃이 핀다 모든 꽃들이 검게 피어난다
처음부터 검은 꽃들의 세상이 눈부시다
날이 밝는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검었던 세상이 눈부시다
처음부터 검은 세상에서
검게 태어난 사람들이 검게 빛난다
검은 세상에서는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인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더 잘 보듯이
우리들의 마음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물속의 달 그림자가 검게 빛난다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를 쓰듯이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를 쓰듯이
우리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씩 기억된다
처음에는 없었던 텅 빈 허공에
하나 둘 마음의 돌덩이 쌓여간다
검은색 혹은 흰색이 그렇게 태어난다
세상이 처음부터 검거나 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게
검거나 흰 것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휘황한 검은 머리카락이
흰 그림자를 휘날리며 찬란하게 늙는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③
김신용의 <도장골 시편-민달팽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서늘한 외침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문단에 데뷔. 제7회 천상병문학상, 제21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고백》(1, 2권), 《기계앵무새》 등의 소설이 있고, 시집으로 《몽유속을 걷다》, 《버려진 사람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이 있다.
냇가의 돌 위를 /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 입어도 벗은 것 같은 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민달팽이가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이는 저 노숙 시절 천애고아로 떠돌던 나날들을 겹쳐 보았을지도 모른다. 민달팽이의 느린 걸음은 이 드센 경쟁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자의 걸음이다. 그것은 “하반신에 고무타이어를 댄 그림자가 느릿느릿 기어온다”(<폭설>)는 시구가 보여주는, 하반신을 잃은 불구를 가진 이의 이동 속도와 겹쳐진다. 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노마니즘은 눈물겹다. 민달팽이는 사회의 주류적 흐름에서 이탈한 소수자다. 차별받는 가난한 사람, 장애인, 흑인, 여성, 유대인, 자이니치,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바로 민달팽이들이다. 소수자란 다수자의 지배적 척도에서 탈주한 자들이다. 여기서 다수자란 양적인 과잉이 아니라 표준의 결정 권력을 틀어쥔 상태를 말한다.
사회의 주류에서 탈락한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의 척도에 의한 억압과 소외와 차별이 일상화된 세계에서 산다. 소수자들이 쓰는 역사는 차별과 추방과 떠돎과 학대와 죽음의 역사다. 소수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디아스포라(diaspora)다. 다수의 척도에서 이탈한 순간 소수자들에게 디아스포라의 운명이 굴레처럼 덧씌워진다. 그들은 남성 세계 속의 여성이고, 게르만 인종 사이의 유대인이고, 백인 속의 흑인이고, 내국인 속의 이주노동자, 일본인 속의 재일 조선인이고, 정규직 속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이성애자 속의 동성애자이고, 병역 의무를 강제하는 사회 속에서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다. 소수자의 삶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는 시인은 아무런 자기 보호 장치를 갖지 못한 채 추방당한 민달팽이라는 디아스포라에 주목한다. 다수자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다수자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다. 소수자는 어디서나 표 나게 드러난다.
민달팽이는 건조한 햇살에 “부드럽고 연한 피부”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순간 “말라 바스라질”지도 모른다. 생존의 압력으로 하루하루를 전전긍긍하며 이어 가던 저 먼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무의식에서 서로의 처지를 동일시했던 민달팽이에게 쏟던 연민의 시선은 곧 거둬진다. 처처재불(處處在佛)! 부처가 따로 없다. 민달팽이가 부처고, 부처가 민달팽이다. 민달팽이의 느릿느릿한 걸음은 온몸 던져 가는 자발적 고행의 길이 아닌가! 저 처사를 무주택자라고 함부로 업수이 여길 일이 아니다. 묵언정진하는 수행이 깊은 선사(禪師)다! 그이의 삶에 여유가 생기자 만물을 보는 눈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이의 삶이 극단적인 곤핍에서 벗어났다는 증표일 것이다. 민달팽이의 느릿한 걸음에서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의 갈짓자 걸음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탁발승의 무소유로 자유로운 운수납행의 걸음이 비로소 보인다. 더 나아가 민달팽이의 저 느릿한 발걸음은 장애에서 비롯된 지체(遲滯)도 아니요, 우주의 아기가 제 생명의 리듬에 따라 열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장엄한 “우주율의 발걸음”이다.
민달팽이의 걸음은 느려 가도 간 듯하지 않고 지지부진(遲遲不進)인 듯 보인다. 허나 느린 그 걸음이 의연하고 신성한 우주적 생명의 걸음이다. 과연 민달팽이의 가는 길이 당당하다. 민달팽이는 제 알몸을 덮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떨쳐 버리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봐라, 노자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밝은 길은 어두운 듯 하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하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다. 가장 높은 덕은 골짜기 같고, 가장 흰빛은 검은빛 같고, 가장 큰 덕은 부족한 듯하고,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하다. 가장 참된 덕은 변질된 듯하고, 가장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고, 가장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가장 큰 음에는 소리가 없다. 명도약매(明道若昧), 진도약퇴(進道若退), 이도약류(夷道若類), 상덕약곡(上德若谷), 대백약욕(大白若辱), 광덕약부족(廣德若不足), 건덕약유(建德若偸), 질진약유(質眞若偸),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晩成), 대음희성(大音希聲)” (노자, 《도덕경》 제41장) 생멸조차 넘어서 가는 이 숭고한 수행의 길에 배추 잎사귀 하나로 드리우는 그늘 동정 따위가 웬 말이냐 ! 수행은 자발적으로 고난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고난을 피하라니! “치워라, 그늘 !” 이 서늘한 외침이 심인을 꽝, 하고 찍는다. 이 외침은 이미 참-나에 도달한 자만이 내지를 수 있는 도저한 자존과 자긍의 외침이다.
김신용(1945 ~ )은 부산 사람이다. 해방둥이다. 시인은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고 한다. 오래전에 시인이 쓴 《고백》이란 두 권짜리 자전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10대 때 낯설고 물선 서울로 상경하여 밑바닥 일 중에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는 그이의 고백은 처연하다. “380cc 채혈병 속으로 비루한 피가 쪼록쪼록 떨어진다. 피는 밥이다. 채혈실 밖에는 뱃속이 쪼르륵거리는 빈대꾼들. 비루먹은 개 같다. 돈 외에 따로 주는 빵 둘을 노린다. 이틀치 밥값을 손에 쥔 ‘쪼록꾼’은 서대문 네거리 옛 적십자병원을 나서 전라도 밥집으로 향한다.” 한 끼를 때우기 위해서 매혈을 하고, 정관수술을 하는 대목을 읽으며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어디까지가 체험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부랑자의 밑바닥 삶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그 책은 페이지마다 굶주림, 날품팔이, 매혈, 윤간… 등으로 참혹했다. 그이는 남대문시장, 서울역 광장 일대, 사창가, 중랑천변 등의 바닥을 떠돌았다.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라고 쓸 정도로 지게를 지고 짐을 나르는 막노동꾼이었다. 한때는 거지로 떠돌며 끼니를 이었다. 14세에 집을 나와 굶기와 노숙으로 얼룩진 부랑자로 버티며 한국의 장 주네라고 부를 만한 실팍한 밑바닥 삶 체험의 두께를 만든다. 삶의 최소주의라는 악조건을 뚫고 마침내 시인으로 나오는데, 초기 시의 상당 부분은 빈민굴과 지옥의 소굴을 탁발승같이 맨발로 부랑했던 체험에서 그 자양분을 길어 온다.
그이가 《도장골 시편》(2007)이라는 시집을 냈다. 시집의 표제로도 쓰인 도장골은 충북 충주 인근의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이 빼어난 시집은 그 시골에서 만난 천지만물의 생명현상이 마음에 불러일으킨 놀라움을 담고 있다. 이 말은 부랑자로 떠돌던 시절의 어두운 과거 기억들이 이번 시집에서는 희미해졌다는 뜻이다. 물론 “풀의 짐은 이슬!”이라는 생각에 이어지는, “등의 짐 / 무거울수록, 두 다리 힘줄 버팅겨 / 일어서는 풀잎, // 그 달빛 아래 / 빛나는 풀의 / 푸른 잔등”(<도장골 시편-이슬>)이라는 구절들은 그이가 아직도 과거의 쓰린 기억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흔적이다.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 무거운 짐 지고 비계(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넝쿨의 힘>)에서 공사장에서 무거운 등짐을 지며 힘겨웠던 기억을, “뱀이 햇볕을 쪼기 위해 나와 있었다 / 아직 동면(冬眠)의 집을 구하지 못한 것 같은 어린 뱀이었다”(<立冬>)에서 집 없이 떠돌던 노숙자의 흔적을 엿보는 것은 비약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 도장골에서 나온 그이는 경기도 시흥의 소래 벌판에서 새 삶을 일구고 있다.
사진 : 이창주
* 《topclass》2007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