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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17. 2020

7. 술

내가 어릴 적

집집마다 돌아가며 막걸리를 팔았다

주조장에서 한 통씩 가져와

소주 댓병과 간장병에 담아

마루 한 쪽에 두고 팔았다

새마을운동으로 회관이 지어지고

한 쪽에 구판장이 만들어졌다

우리 식구들은 그 구판장에서

막걸리와 소주와 과자들을 팔았다

가장 잘 팔리는 것은 막걸리였다


주조장에서 막걸리를 만들고 배달하던 코보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김씨 아저씨도 돌아가셨다. 그 김씨 아저씨의 아들인 내 친구 진섭이도 이미 죽었다. 그 아저씨들은 가끔 술에 곯아 떨어져 배달을 할 수 없었다. 그럴때는 내가 직접 그 무거운 짐발이에 술통을 싣고 와야만 했다. 두 통을 양쪽에 실을 때는 균형이 맞아서 오히려 쉬웠다. 하지만 한 통만 한 쪽에 싣고 올 때는 자꾸만 자전거가 한 쪽으로 기울어지곤 하였다. 술통은 주로 짐칸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짐칸 양쪽에 걸어서 운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게중심을 낮추는 것이 조금이라도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술통과 자전거와 길의 절창을 노래한 송수권 시인도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났다. 송수권 선생님은 몇 번 뵈었는데 정말 막걸리 같은 선생님 이셨다.


하지만 나는 너무 어린 시절부터 술장사를 하다보니 술의 뒷모습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나는 독한 결심을 하고 말았다. 나와 술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술 때문에 세상 한 쪽을 잃고 살았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④ 

송수권 시인의 <시골길 또는 술통>

술통이 술도가에서 주막에 온 까닭은?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송수권 시인
문공부예술상, 서라벌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山門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啞陶)》, 《우리들의 땅》,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등 다수의 시집이 있고,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시인 송수권의 풍류 맛 기행》, 《아내의 맨발》 등의 산문집이 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치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취한 시골길

송수권의 시에는 생취(生趣)가 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에도 이 생취를 불어넣으면 시드는 꽃도 금강체의 빛과 향기로 형형해진다. 남도의 풍류가 생취를 만나 이룬 것이 송수권 시의 리듬이요, 가락이다. 그이의 시세계 밑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흐르는 유장한 서정성은 서정주, 박재삼 이후의 절창이다. 송수권 시의 “세류청청(細柳靑靑) 휘늘어진 말씨로만 빚은 서정시”에 담긴 슬픔과 흥겨움은 북방의 김소월이나 백석이 도달한 서정성과는 또 다른 남방의 가락이요, 곰삭은 장맛과 같은 깊은 서정성이다.

한 화가가 절의 벽에 용 네 마리를 그렸다. 그런데 굳이 용의 눈동자에 점을 찍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점을 찍으면 용이 하늘로 올라가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화가의 말을 크게 비웃었다. 화가가 마지못해 한 마리 용의 눈동자에 점을 찍었다. 그 순간 천둥과 번개가 치더니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에 얽힌 고사다. 빼어난 재능을 가진 예인들은 병풍 속의 닭을 울게 하고, 벽 속의 용을 하늘로 솟게 한다. 청나라 때 오대수는 《시벌(詩筏)》에서 이렇게 쓴다. “대개 뛰어난 솜씨의 시인이 구절을 단련하는 것은 지팡이를 던져 용으로 변하게 하여 꿈틀거리며 솟아오르는 것과 같아서, 한 구절의 영활(靈活)함이 전편을 모두 살아 움직이게 한다. 또 글자를 단련함은 용을 그려 눈동자를 찍자 용이 번드쳐 솟구침과 같아, 한 글자의 빼어남이 전구를 모두 기이하게 할 수 있다.”여기서는 정민, 《한시미학산책》(솔, 1996)에서 재인용

대저 문장에 뜻을 둔 자는 “지팡이를 던져 용으로 변하게 하여 꿈틀거리”는 신기(神技)를 꿈꿀 일이다. 자, 그 솜씨가 무르익어 가히 신기를 넘보는 자의 솜씨를 한번 감상해 보자. 여기 시골길이 있다. 보라, 시골길 전체가 살아 꿈틀거린다. 자전거, 자전거 짐받이 위의 술통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이, 자갈이 박힌 시골길, 풀섶들이 다 살아 영동(靈動)한다. 술통과 길, 사람과 자전거, 들숨과 날숨을 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객체와 주체가 한몸으로 놀아나는데, 그 어느 하나 멈춰 있는 것이 없다. 뛰고, 돌리고, 튀기고, 넘고, 떨어지고, 마시고, 비틀거린다. 이 움직씨의 주동자들은 시골길 위에 있다. 자갈을 밟고 그 반동으로 공중에 튀는 자전거. 자전거만 솟는 게 아니다. 짐받이 위의 사람도 솟고 술통들도 솟는다. 그 바람에 술통들이 멀미를 참지 못하고 제 몸속에 그득 찬 술의 일부를 밖으로 덜어 낸다. 그 바람에 시골길이 단박에 취하고 만다. 술은 액화된 불이다. 술은 취기의 혼몽함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지운다. 술은 즐거움 속에서 영각(靈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마법의 물이다. 취한 눈은 진흙 속에서 극락을 보고, 바다 속에서 살롱을 본다. 이게 술의 비의다.

다시 시를 찬찬히 읽어 보자. 누군가 술 배달이라도 가는지, 자전거 짐받이에 술통들을 싣고 시골길을 간다. 포장을 하지 않아 자갈들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시골길을 가는 자전거는 자갈들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춤을 춘다. 풀 비린내는 자전거 바퀴살을 돌리고, 짐받이 위에 실은 술통들은 뛴다. 그때마다 술통에서 술이 넘어 길바닥이며 풀섶으로 튄다. 이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은 시골길이 이윽고 취한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골길을 달리자니 자전거는 더욱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자전거와 시골길과 풀섶이 함께 취한다. 자전거를 모는 이는 취흥에 겨워 세월아 네월아 하며 한가롭게 시골길을 간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이 사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다. 구수한 유행가 한 자락이라도 흘러나왔으리라. 술도가에서는 떠난 지 오래라는 기별을 받았건만 하마 기다려도 술 배달이 오지 않으니 마음이 급한 주모가 길 밖으로 나와 기다린다.

당신은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을 아는가? 모른다고? 그렇다면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은? 아무 까닭도 없다. 다시 묻겠다. 술통들이 술도가에서 주막에 온 까닭은? 이승의 시름과 신명과 즐거움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신명이 오르면 세상은 무릉도원이요, 시름과 걱정이 사라진 피안으로 변한다. 술이 평등하게 내리는 축복 속에서 사람들은 신명에 지펴 눌리고 찢긴 제 마음을 다독이고 달랜다. 세상 안에서 감히 세상 밖으로 나가볼 수 있는 것은 술이 베푸는 은덕이다. 술의 즐거움은 그 태반이 망각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술통들은 그 즐거움 때문에 주막집까지 뛰어간다. 물론 술통들은 자전거 짐받이 위에서 자갈의 반동으로 튀어 오른 자전거와 함께 공중으로 뛰어오른 것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마치 술통들이 흥에 겨워 뛰어서 주막까지 온 것으로 느껴진다. 애면글면하는 세상살이가 이 술통들 때문에 즐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술통에서 넘쳐 나온 술을 냉큼냉큼 받아 마신 길은 어찌 되었을까? 이미 시골길은 음주과량(飮酒過量), 몽롱한 취기에 널브러져 주모의 치맛자락에 숨어 죽은 듯 잠들었다.

송수권(1940 ~ )은 전남 고흥사람이다. 그이의 시에 전라도 토속어들이 질펀하고, 지리산 뻐꾹새, 섬진강, 채석강변, 격포, 순천만 갈밭, 화개장길, 남해군도 세석철쭉꽃밭, 만경들과 같은 한반도 서남 지명이 빈번하게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들이 그이의 시에 살을 주고 피를 준 탓이다. 그이는 196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온 뒤 한반도 서남 일대의 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이가 반듯한 교사 노릇만 충실하게 이어갔다면 ‘송수권’이란 ‘보릿닢 홍어앳국’ 같은 남도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은 없었을 것이다. “산밭뙈기 다 팔아” 학비를 대어 주신 아버지 덕분에 대학 문을 나왔지만, 산천은 험준하고 세월은 뻣센데 기껏해야 “개똥보다 품계가 낮은” 시 쓰기를 버리지 못했으니 입신양명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문학은 애당초 입신양명과 거리가 멀다. 문학은 그이에게 방랑의 피를 주어 사찰 떠돌이로, 혹은 제 신명에 못 이겨 깨끼춤이나 추는 궁발거사(窮髮居士)의 허랑허랑한 삶으로 내몰았다.

1970년대 서울에 올라와 객지의 여관방에서 원고지도 아닌 갱지에 시 몇 편을 끼적거려 이어령이 주간으로 있는 <문학사상> 신인상 공모에 응모하는데, 갱지에 성의 없이 휘갈겨 쓴 시는 예심을 거치지도 못한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우연히 이 원고 뭉치가 그 잡지의 주간이던 평론가 이어령의 눈에 띄어 그이의 원융회통으로 빛나는 서정시들은 빛을 본다. 자칫하면 쓰레기통에 버려져 휴지가 될 운명이었던 시들이 눈 밝은 이의 눈에 띄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 자조적으로 내뱉는 말마따나 그이는 ‘휴지통에서 나온 시인’이다. 그게 1975년이다. 어느덧 시인의 시력이 서른 해를 훌쩍 넘어섰다. 그이는 덧없는 세월만 보낸 게 아니라 십장생 무늬 같은, 육간 대청마루에 뜨는 불빛 같은 시들로 득음(得音)의 경지에 올랐다. 그이는 호남의 신명과 흥과 슬픔을 담아내는 시들로 일가를 이루고 가히 “옥당(玉堂)이다 !”라는 찬탄을 들을 만한 자리에 우뚝하니 섰다. 올해 늦은 봄 지리산 화엄사 아래에서 시인을 처음으로 만났다. 남도의 햇볕에 얼굴이 검게 그을린 시인은 유기농 농사를 짓는 토박이 농부 같았다.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같이 남도 서정의 채도(彩度)가 높은 그이의 시들을 필독한 독자로서 나는 시인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그이의 손은 씨감자와 같이 거칠거칠하면서도 따뜻했다.

사진 : 신규철


* 《topclass》 2007년 11월호


송수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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