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평생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평생
하지 못한 말
죽는 순간에도
죽어서도 차마
하지 못할 것 같은 말
꿈에서는 몇 번
고백을 했지만
당신은 별거 아니라고
쉽게 용서를 했지만
나의 서툰 고백이
더 큰 상처를 줄까봐
차마 고백하지 못한 말
먼 훗날 혹시 알더라도
부디 용서하시기를...,
고양이 한 마리
나를 빤히 보고 있다
술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술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아버지는 오후가 되면 비틀거렸고 저녁이면 술이 되었다.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칼을 감추어도 귀신처럼 부엌칼을 찾아 휘둘렀다. 나와 어머니는 밤새 도망다녔고 막내는 그런 아버지를 자빠뜨렸다.
아버지를 쓰러 뜨린 것은 정작 술이 아니라 담배였다.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쓰러져서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요양병원에 갇혀서도 몰래 담배를 피우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밥을 드시게 하려고 매일 싸웠다. 밥 보다 술을 더 좋아하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끔찍하게 챙기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 밥상이 날아가고 구타가 이어지고 칼에 찔려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다시 밥상을 차렸다.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런 아버지가 환갑을 앞두고 먼 길을 떠나셨다. 그런데 쌍수를 들고 좋아해야할 어머니도 따라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래도 니 아버지는 꼬박꼬박 내 생일을 챙겨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어이 살리려는 이유는 바로 그거였다.
아버지가 떠나고 내가 아버지가 되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자꾸만 몸이 아파서 쓰러지면서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외로움을 알았다. 아버지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미워했을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어머니라도 괴롭히는(?) 것 만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스스로 아버지를 서둘러 따라가신 것을 보면 아버지의 작전이 어느정도 성공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를 살리는 나름의 방식 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더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약을 털어마시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떠나셨다. 그곳에서도 아마 그렇게 사실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마도 아버지가 어머니 밥상을 차리고 있을 것이다.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⑤
황인숙 시인의 <강>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황인숙 시인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나는 고독하다》, 《인숙만필》, 《목소리의 무늬》, 《나만의 공간》, 《일일일락》 등이 있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가에서는 우리 / 눈도 마주치지 말자.”
마치 토라진 누이처럼 말하는 이 시의 서정적 주체는 심신이 몹시 지쳐 있거나 상처받은 상태다. 누가 제 외로움과 괴로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을 만한 여력이 없다. 다 귀찮다. 내 한 몸이 지어 만드는 생도 질질 끌고 가는 형편인데, 누군가 제 짐을 들어 달랜다. 그러나 나는 피로의 극한상황이거나 마음이 닫힌 상태다. 누군가 고독의 공포에 질린 내게 와서 도와 달라고 매달리는 게 끔찍한 일이겠다. 외재적 대상들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주체에게 여유가 있을 때이다. 내가 그의 속 깊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독백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할 때 나와 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만,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하지 않을 때 그의 언어는 소통이 끊긴 독백과 고립의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그에게 ‘말함’을 허락하고 그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나의 ‘자기성’을 유보하고 그를 향해 나의 현존을 아무 조건 없이 열어 주는 것이다. 소통을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말을 바꾸면,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내가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하는 것은 당신의 타자성, 그 낯섦을 조건 없이 받겠다는 약속이다.
소통의 불능이 불러오는 비극은 얼마나 끔찍한가. 이 시를 읽으며 프란츠 카프카를 얼른 떠올린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이 한 마리 끔찍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프란츠 카프카, 《변신》) 카프카의 소설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현대사회에 대한 끔찍한 알레고리다. 이 가족의 충직한 일원이자 부양자인 그레고르의 말은 어느 날 아침부터 갑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동생에게 소통되지 않는다. 어제까지 사랑스런 누이의 오빠이자 부모의 신뢰를 받는 아들이던 그레고르의 타자성이 극대화되자 그는 흉측한 외관을 가진 동물이 되고 만다. 그로 인해 공중(公衆)과의 소통하기가 아니라 가족과의 소통하기가 불능에 이른 것이다 ! 소통을 할 수 없는 한 식구를 나머지 식구들은 이종(異種)의 그 무엇으로 대한다. 식구 중 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다른 종(種)으로 건너가며 의사소통의 불능상태에 빠져버리자 이들이 누리던 자족적 세계의 평화는 유리그릇과 같이 쉽게 깨지고, 식구들은 미증유의 혼란과 재앙에 빠져 허우적인다. 이 가정에 불안과 절망, 그리고 우울의 그림자가 덮이고, 평화와 질서의 자리를 울부짖음과 고함, 소란이 대체한다. ‘흉칙한 갑충’으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에 박혀 몸이 썩고 끝내는 죽음에 이른다.
황인숙 시의 자아는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의 역상(逆像)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당신과의 어떤 소통도 거부하는 이 시구는 서정적 주체의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있음을 암시한다. 나는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할 수가 없다. 당신이 외로운지 괴로운지 미쳤는지 미치고 싶은지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당신의 ‘말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까닭이다. ‘말함’은 말하는 주체가 자기를 이 세계에 계시하는 것, 특히 유일무이한 청자(聽者)에게 “자기 자신을 위험스럽게 폭로하는 일 속에서, 솔직성 속에서, 내면의 깨어져 나감과 모든 은신처를 포기함 속에서”(레비나스) 말하는 주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신에게 ‘말함’을 허락하는 것은 그 ‘말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하겠다는 잠재적 약속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말함’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청자가 타자를 향해 기꺼이 자기를 열어 주는 것, 더 나아가 실제적 차원이든 윤리적 차원이든 당신을 책임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함’을 허락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은 내게 와서 당신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나를 향해 달려오는 당신을 피해 계속 달아나겠다는 의지는 매우 단호하다. 나는 당신을 실제적이든 윤리적이든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 이 시의 서정적 주체를 지배하는 것은 권태, 피로, 무기력이다. 이 시의 문면 뒤에 숨은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말함’을 허락할 수가 없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제발 나를 건드리지 말고 내게 아무런 응답도 요구하지 말고, 나를 ‘응답할 수 없음’,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익명성에 그냥 있게 놓아 다오. 나는 당신과의 되먹임(feedback)이 끊긴 장소에서 쇠나무[鐵木]가 허공에서 꽃을 피우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대로 살겠다.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 당신이 직접 /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누군가에게 제 존재를 의탁해야만 겨우 살 수 있는 존재에게는 이 매정한 말은 그 외로움과 시림이 뼛속까지 식초보다 더 아프게 내려오겠다.
사진제공 : 마음산책
황인숙은 서울 사람이다. 그이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지금은 나라 안에서 몇 번째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유명해진 소설가 신경숙 씨와 함께 공부했다. 1980년대 중반 그이의 대학교 스승인 오규원 시인이 그즈음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서 문단에 막 나온 제자 황인숙을 추천해서, 내가 하던 출판사에서 내는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그이의 시 스무 편가량이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그이가 출판사로 와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 그이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사탕 몇 알이다. 그 무심함이 잘 잊히지 않는다. 그 뒤로 스무 해가 넘는 동안 드문드문 그이를 보아 왔는데, 그 세월 동안 그이는 다달이 봉급을 받는 직장에 매임 없이 글만 써서 생계를 이어 왔다. 얼마 전까지 어떤 광고에서 어여쁜 여배우가 생글거리며 “모두들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다. 이 외침은 한반도 사람에게 이 사회가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자본 권하는 사회’에 들어섰음을 선포하는 나팔소리다. 우리는 날마다 몸과 영혼에 더도 덜도 아닌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포획되어 있음을 못 잊게 이 외침을 새기며 산다. 이 사회는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리는 ‘소비 천국’이다. 이 ‘천국’에서는 자본이 뻔뻔스럽게 주인 됨을 주장하는데, 이 ‘천국’의 사람과 조직과 제도가 오로지 자본에 의해서만 움직이니 틀린 주장도 아니다. 돈이 없으면 그 ‘천국’을 한가롭게 주유(周遊)하기는커녕 아예 그 입구에서부터 입장을 거부당한다. 그 종류도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국폐(國弊)와 없는 자들을 마른 수건에서 물방울 짜내듯이 쥐어짜는 이 자본이 주인 된 사회가 빚어 낸 민곤(民困)들은 다 이 돈의 흐름이 바르지 않은 까닭이지만, 그 흐름에 맞서 그것을 바로잡기보다는 너도나도 그 뒤를 좇기에 바쁘다. 모든 시간과 행위들이 철두철미하게 다 돈으로 환산되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세상에서 가진 것 없이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다. 하루아침에 궁에서 내쳐진 멸망한 왕조의 막내 공주처럼 늘 가난이 사무쳤겠지만, 놀라워라, 그이가 글을 써서 생계를 꾸리느라 적빈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을 때에도 궁상이나 엄살을 떠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 했다. 그이는 20대 청춘시절의 시고 떫은 곤고(困苦)를 훨씬 지나서도 지칠 줄 모르고 우아하고 발랄하다. 외모와 인격과 시의 그 변화 없이 한결같음에 나는 다시 한 번 놀란다.
* 《topclass》200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