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일찍
출근 하려고 밖으로 나오니
달도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막 동쪽 하늘
월라봉 위로 나오고 있다
달은
야간근무만 하는 줄 알았는데
퇴근 시간에 출근 하는
저 달의 마음은 지금 어떨까
다시 한 번 생각하니
저 달은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도 포기하고
해를 가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먹먹해진다
기다린 보람은 있을까
밤새 기다리던 해가 나오면
저 달은 또
구름 뒤로 숨을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행복할 것이다
제 모습 드러낼 수 없어도
숨어서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같은 하늘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으니
기다린 보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처지가
꼭 저 달처럼 벌써 그믐이다
다시 한 번 하늘을 보니
별 친구 하나가 지켜주고 있구나
깊은 밤 산책을 나간다
개 짖는 소리 멀어지고
지상의 불빛 모두 사라진다
계곡 물소리가 나를 감싼다
물소리를 짚고 가는 지팡이 소리에
하늘에는 젖은 별빛들이 피어나고
월라봉에서는 노루가 노루를 부른다
유반석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달도 보이지 않는데 박수기정에서
항아가 내려와 샘물 마시는 소리 들린다
‘김광종영세불망비’ 앞에 앉아서 나는
도깨비들의 춤을 보며 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휴대폰 메모장에 물소리와 별빛을 받아 적고
다시 하늘을 보니
그 많았던 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나는 다시 별빛을 찾아서 계곡으로 돌아가는데
별들은 보이지 않고 동백꽃들만 길가에 내려앉아
깊고도 푸른 물소리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있다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꼬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꼬리 죽비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재선충 때문이라고 한다 솔수염하늘소 때문이라고 한다 매개충을 없애려면 기미가 보이는 소나무를 싹쓸이 해야 한다고 한다 포크레인이 탱크처럼 숲으로 진군한다
소나무 밑동을 잘라 쓰러뜨리고 토막낸다 약품처리 하고 덮어서 무덤을 만든다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솔방울을 줍고 삭정이를 부러뜨리고 도끼로 고자배기를 하고 솔잎까지 갈퀴로 긁어 와서 땔감으로 쓰고 생솔가지까지 잘라 와도 잘 버티던 소나무,
겨우 살아남은 소나무들도 은밀하게 잘린다 소나무재선충 때문이 아니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이제는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떠나간 엄마소 이야기를 할 곳도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섬은 돌로 만든 심장이다
돌 속에 묻어 놓은 솥이 깨지고 숟가락이 부러지는 시절이 있었다 방사탑을 무너뜨려 성벽을 쌓던 시절이 있었다
한라산은 신에게 올리는 제사상이었다 오름들은 모두가 술잔과 밥그릇이었다
옥황상제께 올리던 백록담 술잔과 사라오름 퇴주잔에 술이 마르면서 사람들은 돌집을 짓고 돌담으로 바람의 길을 만들었다
음복에 취한 바람이 퇴주잔까지 깨뜨리고 제사상을 뒤엎으면서 가슴에 돌덩이를 품었다 돌의 큰 가슴 속으로 숨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빌레못동굴과 다랑쉬굴에서 솥이 깨지고 숟가락이 부러졌다 너븐숭이 애기돌무덤에서 아직도 울음소리 들린다
돌담에 바람의 길이 있고 잣담에 발자국소리의 길이 있다 죽어서도 숨을 멈출 수 없는 산담에 영혼의 길이 있다 돌 속에 숨구멍이 있고 곶자왈에도 숨골이 있다
바람과 파도가 바위를 갈아 몽돌을 만들고 있다 우리들의 가슴으로 다시 데워진 돌에서 새싹이 돋아날 것 같다 숨비기꽃이 피어난다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백록담 술잔에 달빛이 차오른다
구름 뒤에서 붉은 화산을 품은 시지포스의 돌이 구른다 굴러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나는 땅에서 발자국소리와 숨소리를 듣는다 방사탑 안에 묻어둔 솥에 함께 먹을 쌀을 앉힌다 검은 돌 위에 쌀밥 같은 눈이 내려 덮는다
달은 문이다 문은 열리고 달은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달은 달(達)이고 문은 문(文)이다
가슴을 열고 반월문을 바꾸니 달문 열리는 소리 들린다 가슴에 묻은 사람들 숨소리 들린다
달이 자꾸만 문을 기웃거린다 나는 아직 안토니오 가우디를 모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모른다 달빛으로 백 년의 꿈을 심는다
동쪽에는 평화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평화학교가 있다 생명학교와 함께 있다 그 평생학교에서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가끔은 저 멀리 이어도와 서천꽃밭이 보인다
평생 베옷을 만드는 갈대와 억새가 있다 평생 곡비 노릇을 하는 새들이 있다 백 년을 날려 보내고 백 년을 울어야 비로소 하늘문에 닿을 수 있을까
수의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낮에는 꽃들이 촛불을 켜고 밤에는 별들이 촛불을 켠다 달은 밤새 메밀밭 백비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파도는 밤낮으로 절벽에 비명을 썼다가 지운다 그렇게 백 년을 써야만 주춧돌 하나 온전히 세울 수 있을까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야자수 쪽에서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폭낭 쪽으로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폭낭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백 년의 꿈이 낳은 폭낭 가지에 달문이 열린다 초승달 살이 환하게 오르고 있다
* 폭낭 : 팽나무의 제주도 사투리
칼바람 추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쪽파들이
팔을 쭉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눈송이인지 수선화 꽃잎인지 매화 꽃잎인지
새하얀 것들이
입춘 하늘을 온통 흔들어대고 있다
탐라국(耽羅國) 신들이 까마귀 궉새들 앞세우고
한라산 구상나무 숲으로 내려온다
동자복 미륵과 서자복 미륵이
용두암에서 헛기침을 크게 한다
신구간(新舊間)에 하늘 다녀온 탐라국 신들이
관덕정(觀德亭) 앞으로 내려온다
일만 팔천 신들이 시내까지 내려와 둘러보고 있다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로 속속 모여들고 있다
신들과 사람들이 깃발 앞세우고 관덕정으로 몰려오고 있다
자청비가 앞에서 낭쉐를 끌고 온다
새로운 씨앗 뿌리려고 새 씨앗 가지고 자청비가 온다
바람신(風神) 영등할망도 함께 온다
어지러운 세상 한 번 뒤엎으려고 서둘러서 온다
바다도 뒤집고 하늘도 뒤집어 세상 한 번 바꾸려고 온다
천지왕 허락 받아 작심하고 불어온다
바다에도 뿌리고 땅에도 뿌리고 하늘에도 뿌리고
온 세상에 알토란같은 씨를 뿌리려고 풍요신이 온다
천지왕의 두 아들 대별왕과 소별왕이 함께 온다
해도 둘 달도 둘 혼돈의 세상
거대한 활로 하나씩 쏘아 없애고 송피가루 뿌려
천지 질서를 바로 잡았던 두 신이
큰 활 둘러메고 보무도 당당하게 씩씩하게 온다
자청비를 따라 문도령도 오고 정이 없는 정수남이도 온다
풍물패와 난장패와 걸궁패와 함께
세경신 세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탐라국을 손수 만든 설문대할망이 온다
옥황상제의 호기심 많은 셋째 딸이 온다
자식들 모두 불러 모아 오백장군들과 함께 온다
깃발에 쓰인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 선명하다
흔들릴 때마다 부자천하지대본(富者天下之大本)으로 펄럭인다
흔들릴 때마다 권력자천하지대본(權力者天下之大本)처럼 펄럭인다
북치고 꽹과리치고 나팔까지 불어대며 춤추며 몰려온다
신은 사람 같고 사람은 신 같이 파도치며 몰려온다
등불처럼 몰려온다 등대불처럼 몰려온다
환하게 불 밝히며 불빛처럼 몰려온다
신명나는 굿판에서 낭쉐 한 마리
백비 속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남원읍 의귀리 송령이골 지나 백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어둠 속에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연꽃을 피우기 위해 뼈를 뽑아 뼈를 깎아
뼈의 송곳으로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뼈의 칼로 비문을 새기 듯
깊은 어둠 속에 연못을 파기 시작한다
관덕정(觀德亭) 앞 십자가에 매달려 지금껏 지켜보던 이덕구
신들을 따라 제주목관아지로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들을 따라 탐라국 왕궁으로 입궐하지 않는다
주머니에 꽂혀있던 빛나는 숟가락 던져 버리고
『한라산』시집 한 권 펼쳐 들고 강정으로 달려간다
온통 하늘을 뒤흔들던 꽃잎들
백록담의 백록이 뛰어 오르고 오름마다 꽃들이 피어난다
#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아, 큰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의 눈동자
길에서 나를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아, 입구가 너무 좁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 들린다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 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나는,
#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아,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 헛묘
정방폭포로 간다 정방폭포 앞바다로 간다 태평양으로 간다 혹시, 아는 사람이 뼈 한 조각이라도 가져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간다 동광리로 간다 무등이왓으로 간다 삼밭구석으로 간다 혹시, 살 한 점이라도 붙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또 다시 낭떠러지 위로 간다 절벽의 바위를 뒤진다 폭포 아래 바위를 뒤지고 물속을 뒤지고 바다 속을 뒤지고 바다 속 물고기들을 뒤지고 물고기 뱃속을 뒤진다 혹시, 숨결 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허공 속을 뒤진다 더 높은 하늘을 뒤진다 구름 속을 뒤진다 빗방울 속을 뒤진다
뒤지다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지상을 떠난 뒤에도, 집 앞으로 몰려든다 죽어서도 몸을 찾지 못한 영혼들이 작은 단서라도 얻어 들으려고 찾아든다 이렇게 찾아와 밤새 이야기하는 영혼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목백일홍 이라고 말한다 백일홍 나무라고 말한다 배롱나무라고 말한다 그 곁에 있는 충혼묘지에도 백일기도하는 붉은 꽃이 있다 죽어서도 영혼을 찾지 못한 몸들이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순례를 멈출 수 없다
한라산 어욱은 새가 되지 못하여
봄부터 베를 짜기 시작한다
초가지붕에도 오르지 못하여
베옷 한 벌 장만하기 시작한다
천둥 번개 요란한 여름에도
베틀소리 멈추지 않는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지 못하고
만가(輓歌)도 없이 숨 죽여 가신 님들
해 좋은 날, 어욱꽃 마을까지 내려온다
수의 한 벌 챙겨들고
요령소리 앞세우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잊지 않고 찾아온다
무너진 돌담 하나 대답이 없어
빈 상여 소리에
빈 수의 한 벌 흩어져 날아가고
갈 곳 잃은 바람의 곡비
온몸이 휘청거린다
뼈만 남은 한라산 억새
흰 눈 내려 헛묘에 묻히고
한라산 자락에는 해마다
메김소리 가득한 오름 하나씩 늘어난다
* 어욱 : 억새의 제주도 사투리
섯알오름 연못에 연꽃이 없다
소나무들이 온 몸으로 젖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까치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작교가 보이지 않는다
두개골과 척추 뼈 하나씩만 묻히고
나머지 뼈와 살과 영혼들이
오름 어딘가에 흩어져
칠석날에도 만나지 못한 채
자꾸만 달과 별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 있는 백조일손묘역(百祖一孫墓域)에도
안장되지 못한 영혼들
섯알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저
소나무들의 뿌리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다
길을 가던 달이 별들을 데리고 조문을 온다
소나무가 그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이 자꾸만 발목을 내려다본다
새벽이 조문을 오고 아침이 조문을 오고
동알오름쪽에서도
조문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두 개의 연못이 해처럼 환해진다
섯알오름 연못에 오작교 같은 연꽃이 돋아나고 있다
오후 네 시의 평화공원
온몸이 부서져 내린 보름달 부스러기들이
가을 억새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다시 보름달을 함께 만들기 위하여
가을바람에 온몸을 내던지며
스스로를 반죽하는 저 빛나는 영혼들
아, 어머니가 밀어 만들어주시던
칼국수 반죽처럼
크고 둥글고 납작하게 늘어나는 흰 영혼의 숨소리들
평화공원에 아직은 달이 뜨지 않는다
무지개도 검은 무지개만 떠 있다
거친오름 기슭에 너무 많은 관이 묻혀있다
관들이 병풍으로 쌓여있는 위패봉안실 뒤로
행방불명자 비석들이
궤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아직은 밤이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 함께 먹으려면
우리들의 밤은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동굴 속 하얀 혼백의 관으로 누워 있는 저 백비에
저 많은 죽음이 통일의 첫걸음 이었다고
저 많은 통곡이 평화의 씨앗 이었다고
아직은 새길 수 없어
코스모스는 길 밖에서만 피어나고
어머니가 만드는 칼국수 반죽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채
검은 동굴 속에서 흰 관으로 묻혀 숙성되고 있다
그때 불에 타버린 나무가 어찌
선흘리 후박나무 뿐이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한 나무가
어찌, 북촌리 팽나무 뿐이랴
불이야아~ 불이야아~ 불이야아~
아무리 소리쳐보아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아무리 빌어보아도 아무도 살려 주지 않는다
아무리 호소해보아도 누구 하나 살려주지 않는다
붉은 태양이 무섭다 푸른 하늘도 무섭다
밤하늘의 별들도 너무 뜨겁다
달은 지금도 그때 입은 상처가 선명하다
온 세상을 쉬지 않고 돌고 있는 달을 보아라
불이야, 를 뜨겁게 외치는 둥근 저 영혼을 보아라
잊을 수 없다 온 동네가 불타오르던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뜨거운 몸이 먼저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병든 사람이 문지방을 기어 나오다 불타오르고, 갓 낳은 아이를 끌어안고 쓰러진 젊은 엄마가 불타오르고, 대나무밭에 숨어 숨죽이며 지켜보던 눈빛이 불타오르고, 우리 안의 돼지가 불타오르고, 외양간의 소가 불타오르고, 닭들이 불타오르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쏘아 죽이며 온 동네에 불을 질러대던 사람들, 배고픈 개와 돼지들이, 올레에 쓰러져 죽은 사람들을 뜯어 먹고, 그런 개와 돼지들을 또 다시 잡아먹는, 군복 입은 사람들까지 모두 보아버렸으니, 어찌 멀쩡한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아, 온 동네가 불타오르는 밤하늘의 별들
이제 겨우 눈빛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밤새 불이야, 를 외치며 쉬지 않는 달빛의 목소리에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하는 어둠의 빛나는 눈빛들
밤이 깊을수록 더 깊은 어둠일수록, 더 밝은 별빛을 낳는다
죽음을 가지고 놀게 해다오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군산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통통 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튀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1982년 〈풍장 1〉을 월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한 뒤 같은 잡지 1995년 7월호에 〈풍장 70〉을 발표하며 이 연작시편을 끝냈으니,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렸다. 〈풍장 1〉은 70편으로 이루어진 〈풍장〉 연작시편의 맨 앞머리에 오는 시다. 풍장(風葬)은 유해를 땅에 묻지 않고 들판이나 산 따위에 방치함으로써 새나 들짐승이 먹어 치우게 하거나 자연 부패하게 놓아두는 장법(葬法)이다. 한반도 서남쪽에 있는 섬들에는 오랜 유습으로 이런 장법이 남아 있다. 〈풍장〉 연작시편들에서 죽음은 그 유한성에 갇힌 실존의 어두운 조건이기보다는 일상화된 사건들이다.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라는 첫 줄에서 드러나는 죽음을 말하는 어조의 담담함과 초연함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죽음이란 “바싹 마른 몸이 마름에 취해 색깔의 바람 속에 둥실 떠”가는 것(〈풍장 2〉)이거나, “몸속 원자들 서로 자리 좀 바”꾸는 것(〈풍장 35〉)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죽음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절박하면서도 황홀하게 살아내는 한 방법인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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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일으키는 번민과 괴로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번민이요 괴로움이다. 누구도 죽음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없고, 우리가 죽으면 역시 죽음에 대한 인식도 그것이 만드는 고통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생명을 받아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은 화살촉처럼 삶의 중심을 꿰뚫고 지나간다. 시간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데려다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분배하고 쓰는 주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간에 휘둘리는 노예이기도 하다. 실은 사람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들이다. “시간은 모든 것이고, 사람은 무가치하다. 사람은 고작해야 시간의 시체일 뿐이다.”(칼 마르크스) 시간은 삼라만상을 변화 속으로 이끄는데, 오직 죽음만이 그 변화와 상관없이 유일하게 영구불변하는 것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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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기어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시인은 그것을 갖고 놀기로 작정한다. 그 놀이의 한 방식이 곧 탈골 여행이다. 〈풍장 1〉의 첫 연은 그 여정을 구체적으로 펼쳐낸다. 전자시계를 차고 옷도 입은 채인 유해를 가죽가방에 넣어 군산이나 곰소항에서 통통배에 옮겨 싣고 무인도까지 데려간다. 그리고 무인도에 바람 속에 방치해두면 유해는 풍화되어 뼈만 남는다. 그런 죽음에 이르러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경지에 든다. 시인은 그런 놀이로서의 죽음을 시적 명상을 통해 선험한다.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손목시계 부서질 때”,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백금 조각도/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라는 구절을 보면 시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타자화시켜버린다. 아마도 이것이 삶에 내재하는 죽음을 내면에서 길들이려는 기획의 일부일 것이다. 죽음을 타자화한다고 해도 사람은 죽음이라는 숙명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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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은 벗의 장례식장에서 친구의 웃는 영정사진을 들여다보고, “달라진 게 없다고” 독백한다. “영안실 밖에 내리는 저 빗소리도/옆방에서 술 마시고 화투치는 조객들의 소리도/화장실 가기 위해 슬리퍼 끄는 소리까지도/다 그대로 있다고.”(〈풍장 35〉) 하지만 죽은 벗은 그 자리에 없다.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속에서 영안실 밖에 내리는 빗소리와 영안실에서 화투 치는 사람들의 소리와 산 자의 슬리퍼 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은 그 소리들이 가리키는 삶의 생생한 기미들과 더불어 삶을 관조하는데, 불현듯 삶에 대한 관조는 삶 속에 깃든 죽음에 대한 관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 관조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뜻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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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삶의 시작에서부터 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은 인류 전체의 유적(類的) 삶을 균등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실존의 조건이다. 죽음은 인류의 유적 삶을 본래 그럴 수밖에 없는 유한성 안에 가둔다. 죽음이 만든 그 유한성이라는 조건으로 말미암아 삶은 하나의 황홀경으로 바뀐다. “죽음에 관한 명상이자 희롱이면서 죽음에 대한 길들이기”라는 〈풍장〉 연작시편들은 죽음을 삶으로서 살아낸다는 점에서 뛰어난 시편들이고, 한국시의 외연을 넓히는데 기여한 작품이다. 시인은 죽음을 갖고 놀음으로써 그것과 소통하고 길들이려고 한다. 시인은 자신의 주검에서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거부한다. 오직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바람과 함께 놀게 해다오”라고 소박한 소망을 피력한다. 이 소망을 피력하는 낙천적인 어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자의 천진성마저 엿보게 한다. 삶이란 죽음이 안무해낸 춤이다. 우리는 시간이란 무도장에서 살아 있는 동안 삶이란 춤을 추는 것이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시간의 흐름은 끝나지 않는다. 그때 이 시간이란 무도장에서는 죽은 우리가 아닌, 산 누군가가 삶이란 춤을 출 것이다.
황동규(1938~ )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황순원이라는 거목이 드리운 그늘을 벗어나 한국 현대시의 거목으로 우뚝 자라났다. 그는 서울대학 영문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다가 정년퇴임했다. 19세 때 훗날 그토록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즐거운 편지〉를 써낼 정도로 조숙했다. 그의 시들은 생의 기미를 드러내는 말들의 풍경을 빚어낸다. 그의 시에서 한국어는 명석하면서도 화사하고 우아한 언어라는 게 분명해진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한국시를 대표하는 시인이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1958년 월간 <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되어 시인으로 등단한 뒤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어로 시를 쓰면서 한국시의 생태계에서 그만큼 제 자리를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인도 드물다. 1995년에 내놓은 시집 《풍장》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은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사진 : 김선아
* 《topclass》2012년 0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