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산책을 나간다
분리수거함 앞을 지나는데
쓰레기통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바다에 떠 있던 테왁이다
테왁과 망사리가 밤새 버려졌다
숨비소리도 함께 버려졌다
함부로 버려져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산책을 포기하고 집으로 모셔왔다
문 앞에 걸어두니 숨비소리 들린다
우리들의 삶은 함부로
분리수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 망사리 테두리로 사용하는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궁금하다
신천지
요즘 신천지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신천지란 말은 참 좋은데
미국이란 말은 참 좋은데
말 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신천지는 속히 말 값을 해야만 하고
미국 또한 말 값을 해야만 하리라
그렇다면 시인들은 어떤가
오늘도 시인들은 말만 다듬고 있는가?
지금은 기도 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
신천지는 모든 것을 내어 놓고
환자들을 돌보아 구해야만 할 때
미국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세계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야 할 때
시인들은 말 보다 먼저
진실과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때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꼬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꼬리 죽비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재선충 때문이라고 한다 솔수염하늘소 때문이라고 한다 매개충을 없애려면 기미가 보이는 소나무를 싹쓸이 해야 한다고 한다 포크레인이 탱크처럼 숲으로 진군한다
소나무 밑동을 잘라 쓰러뜨리고 토막낸다 약품처리 하고 덮어서 무덤을 만든다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솔방울을 줍고 삭정이를 부러뜨리고 도끼로 고자배기를 하고 솔잎까지 갈퀴로 긁어 와서 땔감으로 쓰고 생솔가지까지 잘라 와도 잘 버티던 소나무,
겨우 살아남은 소나무들도 은밀하게 잘린다 소나무재선충 때문이 아니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이제는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떠나간 엄마소 이야기를 할 곳도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꼬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 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꼬리 죽비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이제는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떠나간 엄마소 이야기를 할 곳도 없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벗은 몸으로 건네는 고요한 위로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밀물〉은 ‘가까스로’에 의지해 홀연 저녁의 고요를 드러낸다. ‘가까스로’는 버거운 것을 견뎌 낸 패배하지 않는 의지의 자랑스러움과 버거운 것을 상대하는 생명의 고단함을 함께 드러내는 부사어다. 세상의 잡담과 들끓는 욕망이 내는 소리들의 버거움을 견뎌 낸 뒤에야 비로소 고요는 제 존재를 나타낸다. 이 고요는 나와 세계 사이의 근원적인 조화와 평화의 느낌에 이어진다. 거칠고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고 마침내 항구에 닿은 두 배는 ‘가까스로’ 이 고요에 이르렀다. 아니 고요에 닿은 것이 아니라 고요 그 자체가 된 것이다. 바다는 잠잠하고 기우는 저녁의 빛은 그 바다의 잠잠함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전쟁광들도 잠들고, 서로 물어뜯고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는 미친개들의 울부짖음도 그 고요 아래로 숨는다. 절대적으로 고요한 세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쓰고 힘들여 얻은 것이다. 고요는 일체의 욕망을 비운 비움의 시간, 선정(禪定)의 경지에서 얻는 순도 높은 평화의 시간이다.
‘가까스로’라는 부사어는 귀환에 따른 피로와 수고를 감추며 드러낸다. 어디에도 피로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스로’ 돌아오는 자들은 늘 수고 때문에 제 존재 내부에 피로가 쌓인다. 우리는 죽음 속에서 살 수 없지만 피로 속에서는 살 수가 있다. 피로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고갈에서 비롯된 정신적 체감(體感)의 문제다. 피로의 출현은 갑작스런 것이 아니고 한없이 느리게 이어지는 것이다. 피로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지만 피로 때문에 불행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피로란 “불행 가운데 가장 대수롭지 않은 불행”(블랑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란 대수롭지 않은 작은 불행들을 무수한 잎으로 매단 나무가 아닌가!
두 척의 배는 고요 속에서 비로소 나란히 눕는다. 여기서 배는 배[船]고, 배[腹]다. ‘벗은’이라는 형용사가 배[船]에서 배[腹]로 교묘하게 그 형질과 정체성을 바꾼다. 한낮의 사투에서 살아 돌아온 두 척의 배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생명의 세계에서 물고 물어뜯는 경쟁은 숙명이자 곧 본능이다. 만인은 만인을 상대하는 늑대들이다. 내가 산다는 것은 네가 죽음을 뜻한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곧 네가 산다는 것을 뜻한다. 돌아왔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경쟁에서 이겼다는 징표다. 서로의 배를 쓰다듬으며 그 배에 난 상처를 보듬는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안쓰럽다. 살아 있음은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딛고 서 있는 살아 있음이기 때문이다. 두 배는 살아 있음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안식에 든다. 시의 모두(冒頭)에서 시행들을 이끄는 ‘가까스로’라는 부사어는 바로 이 안식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생명이라는 이름의 배는 세상에 뜯어 먹히고 부서지며 낡아 간다. 누군가 그 뜯어 먹히고 부서지며 낡아 가는 상처의 자리에 손을 대는 일은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된다. 두 배의 속삭임은 밥벌이의 현장에서 돌아온 부부의 어조로 바뀐다. 바닷일을 끝내고 무사귀환한 어부와 그 무사귀환을 반기는 아내의 어조다. 아내가 말한다.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남편이 대답한다. “응, 바다가 잠잠해서.” 두 사람은 따뜻한 어조로 서로의 수고와 피로를 감싸 안으며 위로한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변주된다. “어차피 한 악기에 정박한 두 현 /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 줘” (〈현 위의 인생〉) 이 상처를 보듬는 위로의 말들이 집을 피난처, 공생의 공간, 그리고 휴식과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장소로 만든다. 내 손이 위로와 치유와 염원을 안고 당신의 상처에 가 닿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분리된 자아, 분리된 인격 사이에 경계가 지워지며 두 자아와 인격이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다. 집은 분리된 것들이 융합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정끝별(1964~ )은 전라남도 나주 사람이다. ‘끝별’은 본명이다. 그이의 부모는 출산의 고통 끝에 얻은 어린 생명의 어여쁨에 뿌듯했을 것이다. 그 뿌듯함으로 갓난아이에게 ‘끝별’이란 이름을 지어 준 그이들은 세상의 안쪽에서 끝내 빛나는 별이 되리라는 기대와 열망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 기대와 열망대로 그이는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대학을 나와 박사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었다. 시와 평론을 종횡으로 누비며 이름을 내고 문단에 제자리를 찾아 우뚝 섰다. 본디 그이의 꿈은 크지 않았다. “내 어릴 적 꿈은 한적한 종점에 떠 있는 / 집어등 같은 수예점 하나 갖는 것이었는데 / 베갯모마다 한 배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과 / 크낙한 떡갈나무 그늘을 수놓는 것이었는데 / 삐끗했으리라 먹물길 한가운데 들어 / 시시로 곤한 몸이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토정비결을 보다〉). 그이의 꿈은 한적한 종점 어느 모퉁이에 있는 수예점 주인이 되어 수를 놓고 사는 것인데, 그리 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작고 그윽한 꿈을 이루지 못해 “곤한 몸이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그이는 무른 살 없이 마른 사람이다. 제 기운을 몸 안에 쌓기보다 세상의 ‘끝별’이 되기 위해 밖에서 저를 구동하는 데 다 쓴 탓이리라. 밖에 드러난 것은 안에 숨은 것들을 기어코 드러낸다는 사실에 유추하자면 그이의 마른 몸은 곧 무르지 않은 정신의 곧고 날 선 태(態)다. 몸과 마음을 옹졸함 저 너머로 끌어가려는 윤리의 엄격함이, 일과 공부에 매진하는 자의 열심과 삼엄함이 잉여를 덜어 내고 덜어 내 마침내 저 곧고 날 선 태를 만들었으리라. 그이와 나는 한 시 잡지가 창간하면서 나란히 편집위원이 되어 네 해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때 그이가 두루 많이 알되 그 앎에 매임 없이 자유롭고, 저와 다른 것마저 두루 품는 열린 사람이고, 다정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사람인 걸 알았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 《topclass》2008년 0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