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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Feb 23. 2020

17. 수국을 심으며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수국을 심는다
불두화 같은 파마머리 보려고 심는다
붓펜이 된 가지로 초대장을 쓴다 지금
편지를 보내면 장마와 함께 오실 것이다


하늘에서도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물의 왕국 징검다리 건너
눈물의 여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때도 아마 장사 나가지 못하는 날
파마를 하시고 비닐 커버를 한 채
마르는 동안 잠깐 들르실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길었다는 처녀시절
막내딸이 맏며느리가 되면서 시작했다는 파마
얻은 삼씨 한 되를 팔면서 시작했다는 도붓장사


어머니는 평생 부처님 파마머리로
늦은 밤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시고
나 또한 평생 지게에 어둠을 지고 건너다녔지


어머니와 나는 늦은 밤에도 상을 펼쳤지
실, 바늘, 비누, 양말, 동정, 고무줄, 비누곽.., 
생필품과 바꿔 오신 조, 콩, 수수, 보리쌀..,
상에 펼쳐 놓고 좋은 것만 골라 담았지


어머니는 오일마다 시장에 나가
곡식을 팔고 다시 생필품을 사서 오셨지
가끔은 붕어빵도 몇 개 사 오셔서 참 좋았지


비가 오는 날도 어머니는 참 바쁘셨지
이고 다니는 물건들 젖어서 장사는 못하셨지
하지만 몸이 젖으면서도 일은 멈추지 않으셨지
그래도 가끔은 파전이며 배추전을 부쳐주셨지


나는 오늘 어머니가 보고싶어 수국을 심는다
붓으로 자란 이 수국 가지에 파마머리 피리라
장마가 시작되면 어머니는 머리하러 오시리라
장마 끝나면 어머니는 하늘로 돌아 가시리라


돌아 가시기 전에 나는 이제
파전도 부치고 배추전도 부쳐드리리라
하늘의 식구들에게 가져다 줄 
붕어빵도 한 봉지, 팥죽도 한 그릇 싸서 드리리라




폭낭과 야자수 / 강산



제주도 팽나무와

워싱턴 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가지 많은 나무가 허리도 펴지 못하고 그늘을 가꾼다

가지 하나 없는 나무가 하늘 높이 탑만 쌓아 올린다


벌레들에게도 젖을 물리며 숨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우리들의 하늘을 들쑤시며 함부로 붓질을 해대고 있다


야자수 쪽에서 붉은 해가 떠오른다

키 큰 야자수 그림자가 팽나무 가슴을 관통한다


팽나무 쪽으로 붉은 해가 기울어진다

넓은 팽나무 그림자가 홀쭉한 야자수를 안아준다


워싱턴 야자수와

제주도 팽나무가

나란히 눕는다



가슴이 넓은 나무 강산     


폭낭과 워싱턴야자수가 

나란히 서 있다     


붉은 해가 솟는다     


워싱턴야자수 그림자가

폭낭 가슴을 관통한다     


붉은 해가 기운다  

   

가슴이 넓은 나무가

홀쭉한 나무를 안아준다

     

* 4월 1일부터 제주4․3평화공원 문주에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시화는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완성될지 아직은 모른다. 우선 메모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4․3이라 말하지 않고 3․1절 발포사건”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외치던 3․1정신을 향해 발포한 미군정, 그리고 무자년 겨울의 초토화 작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승리를 위해서는 그런 적군까지 용서하고 안아줄 수 있는 가슴 넓은 민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이고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⑫ 이진명 <고아>

두려워 마라、 인간은 누구나 제 다친 심장을 들고 홀로 간다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두려워하지 마라 
 새가슴처럼 뛰는구나 
 팔딱임을 멈추지 못하는구나 
 여기는 자리가 아니다 일어나라 
 날지 못해도 
 너는 날았다 
 아비를 날았고 어미를 날았고 
 형제자매를 날았다 
 일가친척을 날았다 
 집도 절도 일찍이 무너뜨려 날았다 
 너는 처음부터 날았던 사람 
 떨어지지 않았던 사람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시방대천이 다 터졌다 
 만 개의 발우가 만발한다 
 문고리를 잡고 토하지 마라 
 심장을 다치지 마라 
 돌아보라 
 어머니가 서 있다 
 보관(寶冠)을 쓴 어머니가 
 약함(藥函)을 들고 서 있다 


 이진명 시인은 제 시의 밑자리에 원체험으로 들어앉은 전쟁의 상처를 드러낸다(그 사정은 시집에 소상히 드러나 있다). 그 표상적 이미지가 고아다. 고아란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집도 없고 절도 없는 아이, 즉 헐벗은 존재다. 누구나 고아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헐벗음으로 실존의 최소주의에 놓일 때 고아가 되는 것이다. 고아가 되었기 때문에 헐벗은 것이 아니라 헐벗어서 고아다. 헐벗음은 세계의 가난을 체화한 존재의 표식이다. 고아란 결핍으로서만 저를 드러내는데, 그런 점에서 고아는 가난뱅이, 이방인,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다. 헐벗음 그 자체는 악도 선도 아니지만, 헐벗은 자들을 헐벗음으로 내몬 상황은 악이다. 고아는 이 악과 싸울 운명의 강제에 놓인 존재다. 

새가슴처럼 뛰는구나 
팔딱임을 멈추지 못하는구나 

 고아로 산다는 것은 심장이 새가슴처럼 뛰는 것, 무릎을 꿇는 것, 문고리를 잡고 토하는 것이다. 그것은 눌림과 따돌림과 헐벗음으로 얼룩진 최저낙원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다. 고아란 뛰어넘어야 할 숭고한 의무를 불러오는 인간의 조건이다. 그것이 넘어가야 할 불행과 불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시인은 ‘날았다’라는 동사를 여섯 번이나 반복한다. ‘날다’는 초월의 뜻을 품은 어사다. 초월은 자기동일성 안에서의 자기갱신이다. ‘나’이면서 ‘나’가 아닌 존재로 넘어가는 것, 내 안에 머물면서 ‘나’의 조건들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초월이다. 시인은 헐벗음에 대한 존재론적인 인식을 밀고 나가 나-고아를 타자화하며,

여기는 자리가 아니다 일어나라 

 라고 독려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인데, 이 목소리가 나오는 타자의 얼굴은 고아의 얼굴이다. ‘일어나라’라는 명령은 고아 내부에 있는 어머니에게서 나온다. 고아-어머니는 교묘하게 동일자로 겹쳐진다. ‘일어나라’는 명령은 불행의 상습화와 있음의 최소주의에 맞서 그것을 넘어 날아가는 일의 숭고함을 개시한다. 초월에의 욕망을 일깨우는 이 목소리는 한 번 더 장엄하게 변주된다.

문고리를 잡고 토하지 마라 

 천진무구한 너는 헐벗은 자다. 아파서 문고리를 잡고 토하는 자다. 건강이 사회적 현실에 맞서는 잉여적 활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너는 기댈 어떤 것조차 없는 고갈된 사람, 다시 말해 아픈 사람이다. “문고리를 잡고 토하지 마라”라는 명령은 아픔을 딛고 일어나라는 명령이며, 불행에 지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 대목에서 고아-어머니의 분리가 일어나는데, 발화자의 얼굴에서 고아는 흐릿해지는 대신에 어머니는 뚜렷해진다. 시의 끝부분에서 치유자이자 전적으로 이타성(利他性)의 존재인 어머니가 돌연 그 모습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면서 시적 반전의 효과가 극대화한다.

보관(寶冠)을 쓴 어머니가 
약함(藥函)을 들고 서 있다 

 헐벗은 네가 돌아보는 바로 그곳에 어머니가 서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참사람, 천지만물의 스승, 헐벗고 아픈 자들의 치유자다. 어머니는 보관(寶冠)을 쓴 관세음보살이고, 약함(藥函)을 들고 서 있는 약사여래(如來:tathagata)가 아닌가. 시인은  “각각 부와 모를 잃은 슬픔 아픔이 같다는 걸”(〈윤희 언니〉) 새겨 놓는다. 우리는 모두 고아다. 상처받은 자가 아니라 상처받을 가능성이 있는 자로서, 헐벗은 자가 아니라 헐벗을 수 있는 가능성에 놓인 자로서 그렇다는 뜻이다. 고아란 그 슬픔 아픔을 앓는 존재의 부조리한 양태(樣態)다. 고아가 간절하게 부르는 존재는 어머니다. 그래서 시인은 고아에게 그 어머니를 내준다. 이 관음보살-어머니, 약사여래-어머니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본디 고아 자신의 내부에 있던 존재다. 우리 모두는 고아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그 둘의 존재, 즉 고아-어머니다. 이 시의 숨은 전언은 우리는 피구원자이면서 동시에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진명(1955~ )은 서울 사람이다. “속이 연하고 조용”(〈죽집을 냈으면 한다〉)한 이진명 시인의 겉모습은 원불교 정녀 같다. 그 연함의 본질은 부성(父性)이 배제된 여릿함, 일체의 굳고 단단함을 무화해 버리는 식물성의 세계다. 이 연성(軟性)의 세계는 미수복 지구인 함경북도 명천에 남아 분단으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이복 언니를 생각하며 쓴 시에 그대로 펼쳐진다. “60년 세월의 고난과 고절, 황폐를 넘어 / 내 아기야, 엄마야, 내 손주야, 할머니야 / 이런 원음(原音) 저절로 발음할 것 같아요.”(〈윤희 언니〉) 전쟁은 부성의 날카로운 대립의 산물이다. 전쟁은 행방불명과 이산(離散), 실향과 망향을 낳고, 많은 과부와 고아를 만든다. 찢기고 일그러진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은 속 깊은 모성(母性)이다. 모성에서 나온 연민과 사랑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세계는 원음의 세계다. 

얼마 전 이진명 시인의 새 시집 《세워진 사람》이 나온 걸 축하하려고 천양희 시인과 함께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성북동에서 커피를 마셨다. 바로 근처에 간송미술관이 있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했는데, 관리인이 입구에서 가로막았다. 시인은 “늦게 결혼해 애 낳고 애 키우”(<손거스러미의 시간>)는 자신을 “희박한 존재”(<나의 눈>)라고 한다. ‘국제연등선원’의 양철 표지판을 따라 비포장도로를 거쳐 찾아간 그곳은 뜻밖에도 ‘국제’에 걸맞지 않은 고즈넉한 곳이었다. ‘국제’라는 말이 이끄는 소란과 거창함이 없어 시인은 놀란다. 그곳에서 시인의 후각에 붙잡힌 것은 “조용하고 외딴 것”(<국제연등선원>)의 냄새다. 시인은 안도한다. 그게 실은 시인의 냄새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 《topclass》200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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