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009
취우(翠雨)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
취우(醉友) 술에 잔뜩 취한 친구
취우(驟雨) 소나기와 같은 말
이슬과 취우는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슬과 취우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이슬은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고 취우는 먼 곳에서 온 것이다. 나는 이슬도 좋고 취우도 좋다. 취우라는 말은 세 가지의 뜻을 품고 있다. 한자로 쓰면 다르지만 우리말로는 그냥 '취우'라고 쓴다. 취우(翠雨)와 취우(醉友)와 취우(驟雨)는 다른 말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면 같은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연꽃도 좋아하고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토란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였는데 요즘에는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자주 한다. 연잎은 물에서도 물에 젖지 않는다. 연잎은 아무리 오래 물방울과 함께 놀아도 물방울에 젖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연잎이 좋다. 연잎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물방울도 참 좋다. 그 연잎의 물방울 속에서 물방울과 함께 살고 있는 나의 모습도 참 좋다.
취우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늘에서 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빗방울의 크기는 지름 0.5∼5㎜로서 보통 1∼2㎜ 정도이고, 소나기의 경우에는 2∼7㎜ 정도가 된다. 빗방울이 매우 큰 경우에는 낙하 도중에 작게 갈라져 버리고, 0.5㎜ 이하인 경우에는 낙하속도가 매우 느려져 마치 안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안개비를 형성한다.
구름을 형성하는 물방울의 크기는 지름이 0.004∼0.02㎜ 정도의 대단히 작은 것이며, 부력 때문에 작은 구름물방울이 그대로 떨어져 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물방울들이 서로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어야 하므로 10만∼100만 개 정도의 구름물방울이 합쳐져 비로소 1개의 빗방울이 형성되는 셈이다.
살아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비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대부분 비를 피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동물들도 많지만 비에 젖지 않기 위하여 피하는 동물들이 많다. 그중에는 사람들도 있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는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의 양식이지만 직접 몸에 맞고 몸으로 젖는 것을 싫어하는 동물들이 많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잠시 피했다가 더 많은 물방울들이 뭉쳐져 있는 샘물이나 강물을 맛있게 마시는 동물들도 많다.
태반처럼 둥근 연잎에서 물방울 놀이를 하며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이란 어쩌면 연잎 위에서 뒹구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어쩌면 신들이 좋아하는 물방울 놀이인지도 모른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쪼개지기도 하고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물방울은 결코 물방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태반과 탯줄을 보면 꼭 연을 닮았다. 연잎에는 숨구멍이 뚜렷하다. 그 숨구멍을 따라가면 비로소 내가 보인다. 이제 막 자궁벽에 착상된 배아가 보인다. 작은 씨앗 모양의 나는 이제 콩깍지 모양이 될 것이고 등 굽은 태아로 성장할 것이다. 연잎 아래서 연근이 자라나 듯 나도 그렇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양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수의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작은 물방울로 태어나서 시작한 내 삶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아가 양수를 마시듯 물방울이 물방울을 마시며 자란 따뜻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어도공화국 연못에 비가 내린다. 연잎에 비가 내려앉는다. 연잎 끝에 취우가 맺히고 나는 그 취우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물방울 속의 나는 물방울 밖의 나를 보고 웃는다. 물방울 밖의 나는 물방울 안의 나를 보고 살짝 윙크를 한다. 태반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연잎 밖에서 물방울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태반의 뿌리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이고 나는 연근의 뿌리에서 연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들의 숨소리가 취우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슬처럼 시작될 것이다. 취우처럼 시작될 것이다. 푸른 나뭇잎에 빗방울이 맺히듯 시작될 것이다. 가끔은 소낙비처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에 완전히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늘 어딘가에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비에 취하고 하늘에 취하고 너에게 취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에게 취하면서 취우가 되고 사랑이 되고 하늘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들은 푸른 나뭇잎에서 함께 뛰어내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껴안고 떨어지는 그곳이 바로 어쩌면 우리들 사랑의 옹달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