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014
평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학이란 무엇일까
교란 무엇일까
그리하여
평생학교가 있다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어도공화국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내가 꿈꾸는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산이나 아름다운 섬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산이나 섬을 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우선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만든다. 그 전초기지를 나는 <평생학교> 혹은 <달문moon> 혹은 <이어도서천꽃밭>이라고 부른다. 평생학교는 평화학교와 생명학교를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그냥 <이어도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산책을 나갔다. 일곱 시가 되어도 조금 어두웠다. ‘퍼물’ 바로 옆 민박집 주차장에 버스가 서 있었다. 버스 안에는 불도 켜져 있었다. 가방을 등에 진 사람들이 보였다. 민박집 단체 손님들이 일찍부터 어디론가 출발하려고 준비하는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민박집 손님들이 아니었다. 좀 더 지켜보니, 그들은 오늘 ‘퍼물논’의 유채 나물을 수확하려고 온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 논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고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생학교 ‘꿈숲’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평생학교 ‘꿈섬’이 나온다. 화순은 강정과 함께 물이 많고 논이 많기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일 강정 이 화순’이라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제주도는 평소에는 물이 없는 건천이 많은데 화순은 물이 마르지 않는 안덕계곡과 용천수들이 많다. 그리하여 물소리를 좋아하는 나는 물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마음속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씻겨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퍼물논’으로 알려진 평생학교 ‘꿈섬’을 나는 연꽃단지로 만들고 싶은데 약 5천 평 되는 논 중에 이제 겨우 5백 평 확보하여 연꽃을 심고 관찰을 하는 중에 있다. 연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늘 연꽃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연꽃단지 논을 지나면 개끄리민교가 나온다. 다리 아래 개끄리민소가 있어서 붙여진 다리 이름이다. 바위 속으로 개를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깊이 파여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물길이 약간 꺾어지는 부분인데 아마도 바위 중에서 비교적 약한 부분이 물의 힘으로 파인 듯하다.
개끄리민교를 건너가면 월라봉이 나오고 올레길 9코스가 나온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으로 올라가면 도채비빌레와 보막은소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황개천과 월라봉 단애 앞바다가 나온다. 박수기정에서 바라보는 마라도 풍경도 좋고 더 멀리 보일 것 같은 이어도 바다도 아름답다.
나는 우선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 길은 원래 수로가 있었던 곳인데 몇 년 전에 관에서 데크 공사를 하여 새로 만든 길이다. 데크 공사를 하기 전에 나는 보막은소에서 퍼물논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정비하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니던 길이었다. 이 수로는 김광종이라는 사람이 바위를 뚫고 만든 인공 수로였다. 지금은 논보다 밭이 더 인기가 있어서 밭으로 되돌아가는 추세에 있지만, 논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참으로 위대한 공사였던 것이다. 최근까지 퍼물논 주인들은 퍼물논에서 벼농사를 지어 제사상에 곤밥(쌀밥) 올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지만 이제 퍼물논에서 벼농사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채비빌레 바위 언덕에 안내판도 있고, 퍼물논 답회에서 오래전에 세웠다는 공덕비도 세워져 있는데, 데크 공사를 한 이후에 오히려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옛날에는 이 공덕비를 찾아오는 문화유산답사팀 사람들이 가끔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아예 발길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이 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많이 아프다. 길 만드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에 이 데크 길은 만들어졌다. 계곡이 깊고 위험하여 1년 넘게 난공사를 하였다. 공사비도 엄청나게 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 길은 개통도 하지 못하고 벌써 길이 망가지고 말았다. 공사 진행 중에 세워진 출입금지 간판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글씨 색깔이 다 닳아 없어진 채로 버려져 있다. 우리 국민들의 혈세가 아무렇지 않게 낭비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길 말고도 내가 아는 많은 길들이 이와 비슷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것저것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든 이후에 잘 관리하고 잘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김광종영세불망비’는 나란히 두 개가 서 있다. 1938년 5월에 세운 것과 1968년 4월에 세운 것이 길을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들이 있는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당시 수로 공사를 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이제 나 혼자만의 전용 산책길이 되고 말았다. 가끔 낫을 들고 가서 가시덩굴을 쳐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나는 이 길이 참 좋다. 물소리도 좋고 김광종 선생님의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다. 바위를 쪼아대는 정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처음에는 세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깊이 감사하고 있다. 안덕계곡의 거센 급물살로 망가진 구간도 새로 개선하였다. 물길보다 높이를 더 높여 수리를 하여서 지금은 아주 좋아졌다. 덕분에,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듯하다.
나는 오늘 아침 ‘불가능을 넘어선 사람 김광종’ 안내판을 다시 한번 자세히 읽는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세월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는 중에 있다.
이 안내판에는 12장의 만화가 그려져 있다. 여행을 온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이 등장하여 김광종 선생님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들과 아버지가 ‘김광종영세불망비’에 적혀있는 내용을 본다. ‘穿山引水(천산인수) 漢西開始(한서개시) 多費己財(다비기재) 以裕後世(이유후세) 食我香稻(식아향칭) 賴公德基(송공덕기) 功擬召父(공의소부) 歲祈田祖(세기전조)’ ― 산을 뚫고 물을 당겨 한라산 서쪽에 논을 개척하는데 자신의 재산을 많이 털어 후세를 넉넉하게 하였다. 우리에게 향기로운 쌀을 먹게 한 것은 공의 덕기에 기인했으니 그 공이 소부에 비길 만하여 해마다 전조로 제사를 지낸다 ―
이 비석을 보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설명을 한다. ‘김광종(金光宗)이 관개농업을 할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수리시설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기 1938년 5월 화순답회(和順畓會)에서 건립한 기념비지’ 라고 대답한다. ‘비문에 의하면 순조 32년 착수하여 10년 만인 헌종 7년에 완공하였고 수로 길이는 안덕계곡에서부터 1,100m로 되어 있다는구나’라고 말하자 아들이 ‘와, 10년 동안 수로공사를 했다는 거예요?’ 라며 되묻는다.
그러자 동네 어르신이 등장하여 설명을 덧붙인다. ‘김광종은 본디 화순 사람이 아닌데도 볼 일이 있어 이곳에 왔다가 이 지역의 농지가 넓고, 가까이에 수량이 풍부한 안덕계곡이 있음에도 전부 밭인 것을 안타깝게 여겼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안덕계곡의 지류인 황개천 암반하상(巖盤河床)에 흐르는 냇물을 밭으로 끌어댈 수로공사에 착수했어’ ‘처음에 그의 계획을 지역주민에게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겨우 석수(石手) 두어 명을 구하여 황개천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암벽을 뚫기 시작했지’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몇 년이 지나도 수로공사는 그리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암벽에 달라붙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철매로 암반을 깨어나갔어’ ‘애초에 이를 수 없는 역사(役事)를 한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그를 측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의 집념이 그 누구도 비웃게 놔두지 않았던 것이었지’ ‘그가 약 700m나 되는 암반을 뚫고 마침내 물길을 내니 사람들은 감복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밭에 물을 대려고 보에다 물꼬를 이으니 도착하기도 전에 전부 새어버리는 게 아닌가’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도수로(道水路)를 수정하여 재정비하고 봇물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드디어 봇물이 새는 걸 막는 데 성공했다.’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마지막 공정을 거들었다. 암반에 첫 철 매질을 한 지 꼭 십 년이 되는 해 9월에 드디어 1만여 평에 이르는 밭에 물을 대니 땅이 생긴 이래 늘 메말랐던 농토가 순식간에 논으로 바뀌었지’ ‘이후 밭을 논으로 눈 깜짝할 새에 바꿨다는 뜻으로 이 수로 끝에 해당하는 황개천언덕 위 암반지대를 도채비빌레라 불렀다고 하지’
그러자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아들이 ‘우와~ 김광종이라는 분은 끈기가 정말 대단한 분이시군요’ 라며 감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안내판이다.
내가 좀 살아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은 꾸준히 해야만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10년이라는 세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이다. 정말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도 한 10년은 공부를 해야만 하리라. 하물며, 이어도공화국을 만드는 일이야 적어도 100년은 걸리지 않을까? 그런 장기전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아침이다.
나는 하나의 물방울
아버지가 흘리신 물방울
물은 오늘도 흐른다
강은 흐르지 않고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가슴을 비워준다
물이 강의 가슴을 두드린다
귀를 기울이면 들린다
망치소리도 들리고
정으로 쪼아대는 소리도 들린다
물은 그렇게 스스로
물길을 만들며 흐른다
내가 흘린 물 한 방울
아들의 땀방울이 흐른다
물길은 그렇게 바다로 흐른다
푸른 지구를 따라
둥그런 수평선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