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May 24. 2023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1

밥에 담긴 가족 이야기와 공동체 정신 회복을 위한 두레 밥상 이야기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1

밥에 담긴 가족 이야기와 공동체 정신 회복을 위한 두레 밥상 이야기




뿌리를 찾아서     


새로운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만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한식’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나와 인연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식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뿌리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몸은 우리들이 먹는 음식으로 만들어지고 우리들의 마음 또한 우리들이 먹고 마시는 공기와 물과 음식의 손으로 빚어지는 꽃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나는, 잘 자란 마늘을 갈아엎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오늘날의 농업은 필요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역점을 두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아프다. 마늘 가격이 폭락하여 인건비도 안 된다며 얼마간의 보상금을 받고 트랙터로 마늘 밭을 통째로 갈아엎고 있었다. 일 년 농사를 망친 농부도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만 밥상에도 올라보지 못하고 온몸이 절단 나는 그 마늘들의 안타까운 마음은 또한 어떠했을까? 돈은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조잡한 돈 자체가 모든 삶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돈이라는 하찮은 권력이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먹는 대부분의 음식들은 농부들의 땀을 기억하거나 작물을 길러준 땅의 고마움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저, 대형마트에서 돈만 지불하면 누구나 손쉽게 식자재를 구해서 요리를 하는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쩌면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부평초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젖을 먹지 못하고 뿔 달린 소의 젖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 자꾸만 마음속에 돋아난 뿔로 세상을 들이받듯이 세상 사람들은 이제 뿌리도 없이 흔들리는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겨우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도 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들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튼튼한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뿌리는 반드시 다시 찾아야만 하고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어린 사람들이라면 또한 반드시 자신의 뿌리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먼저 이렇게 나의 뿌리와 우리들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1. 한식(韓食), 아침의 나라 식사

     

한식(韓食)이란 말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나 식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韓) 이란 말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네이버 한자사전에 나오는 자원(字源)을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고 흥미롭다. 韓자는 ‘대한민국의 약칭’이나 ‘나라 이름’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韓자는 倝(햇빛 간) 자와 韋(가죽 위)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倝자는 햇빛이 찬란하게 대지를 비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햇빛’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韋자가 성(城)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니 韓자는 햇빛이 성을 비추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韓자는 대한민국의 약칭이니 ‘아침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은 글자이다.



그림 1. 네이버 한자사전에서 빌려온 이미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쩌면 '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식탁을 한 번 돌아보면 반성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지금껏 너무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서구 문명을 따라가기에 바빴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을 흉내내기에 바빴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고유 음식이나 거룩한 식사에 담긴 의미는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았다.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코로나 19를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소위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터무니없는 허점들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진면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우리들이 별생각 없이 매일 받아먹었던 밥상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매일 한결같이 먹었던 김치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매일 무심히 먹었던 된장국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 땅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좋은 식재료들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동안 우리들이 너무나 과소평가했던 아침의 나라 음식들을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신토불이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상부상조하는 두레 밥상에서 우리들의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우리들의 찬란한 미래를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아시아 문화와 서양의 유럽 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쌀과 밀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쌀과 밀의 가장 큰 특징은 일조량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쌀의 알갱이들은 햇빛 덩어리처럼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일조량이 풍부한 아시아는 그런 풍부한 햇빛을 품은 쌀을 먹고 쌀의 햇빛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일조량이 부족한 유럽에서는 햇빛이 많지 않은 곳에서도 잘 자라는 밀을 많이 생산하고 밀을 많이 먹고살았다. 따라서 아시아 사람들이 햇빛 덩어리들을 먹고 햇빛문화를 이루었다면 그에 비하여 유럽 사람들은 달빛덩어리를 먹고 달빛문화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식 이야기를 하려면 한식 요리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일 것이다. 한식 요리에 얽힌 가족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재미있고 행복한 일일 것이다. 음식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좋아하는 토란국 이야기, 제주도 잔치 음식의 대표선수 몸국과 돔베고기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제주 빙떡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어쩌면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구체적인 음식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음식을 만드는 식재료 이야기부터 하기로 한다. 한식은 결국 우리 신토불이 식재료로 만들어지는 음식들이므로 우리들의 주요 식량인 쌀과 보리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어쩌면 코로나 19 이후에는 식량전쟁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세계화의 단점을 직접 경험하면서 철저한 분업화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어쩌면 식량안보가 더욱 절실한 시절이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식량 자급자족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처럼 화폐로 환산되는 교환가치로만 따져서 농사를 지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직접 먹는 음식을 생산한다는 마음자세로 농사에 임해야 하겠기에 여려가지 식자재 이야기부터 풀어나갈 생각이다. 아침의 나라 식사 이야기인 만큼 햇빛이 뭉쳐진 햇빛 알갱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쌀 이야기부터 하나씩 풀어나가기로 한다. 



2. 모내기와 잊을 수 없는 새참 이야기


인간은 수렵과 어로 그리고 채집생활을 거쳐 농업사회로 진입하면서 급격한 생활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다. 흙에 씨앗을 파종하여 작물을 재배하고 짐승들을 길들여 직접 기르는 목축생활을 하면서 정착 생활과 함께 가족공동체와 마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흙을 갈아서 엎는 쟁기의 발명으로 우리들의 농업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쟁기의 보습과 볏의 발명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광활한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경운기와 트랙터와 이앙기 등의 농업기계들을 만들어 결국 과잉생산의 시대를 만들고 말았다. 우리들은 이제 가난하고 배고픈 시대가 아니라 영양의 과다섭취로 인한 다이어트가 화두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제 우리들의 올바른 먹을거리와 올바른 밥상에 담긴 우리들의 소중한 공동체 두레 밥상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만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제주도에서는 모내기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다. 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논이 있어도 모내기를 하지 않고 직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직접 씨를 뿌려서 벼농사를 짓는 농사법은 물이 부족한 경우에 주로 하는 특별한 농사법이다. 모내기를 하지 않고 직접 파종하여 농사를 지으면 모내기를 하는 농사법에 비하여 좀 더 쉽지만 그만큼 소출이 적은 단점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에는 모내기할 논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밭에 볍씨를 뿌려서 벼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우리 가족들은 시골에 살면서도 논이 없었다. 우리 소유의 밭도 없었다. 먼 거리에 있는 산밭을 일구어 밭농사를 조금 지었을 뿐이다. 심 씨 문중의 심산을 개간하여 ‘띠야굴’이라는 곳에서 밭농사를 지었는데 일 년에 한 번씩 그 심산 주인에게 ‘밭수’라는 이름으로 일정량의 곡물을 주어야만 했다. 그 밭수가 아까워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밭수를 대신 받아주는 일을 하여 우리네 밭수는 면제받을 수 있었다. 나중에 반월산 아래 할아버지 산소가 생기면서 작은 밭이 만들어졌는데 그곳을 ‘댓등밭’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나는 논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다못해 집안에 감나무라도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논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는 감나무 하나 심을 수 있는 마당도 없었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지금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감나무도 심고 살구나무도 심을 수 있는 밭이 있어서 나는 참 좋다.      


나는 가끔 모내기하는 사진을 꺼내서 본다. 한쪽에서는 소로 써레질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모를 심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다. 다랑이 논 하나 갖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을 꺼내서 본다. 어머니께서 다른 사람 논에 모내기하러 가시면 점심때쯤 꼭 나를 부르시곤 하셨다. 새참을 얻어서 먹이려는 어머니의 사랑이 깃든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아는 주인집 아주머니도 반갑게 맞이하며 아낌없이 밥을 퍼 주셨다. 그러면 나는 또 밥값을 한다고 못줄도 잡아주고 못단도 던져주고 때로는 모를 함께 심어주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다리에 거머리가 붙어서 내 피를 빨아먹곤 하였다. 나는 거머리가 내 다리에 붙은지도 모르고 한참을 있다가 거머리를 발견하곤 하였다. 그러면 나는 또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거머리가 핏줄 속으로 들어가 내 몸속에서 평생 살아가지나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내 푸른 핏줄을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내기하는 풍경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대부분 기계를 이용하여 모내기를 할 것이다. 성능이 좋은 이앙기를 사용하여 혼자서도 모내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모내기를 떠올리면 소와 어머니와 거머리가 함께 따라 나온다.  


그 당시 내가 먹었던 새참 음식들은,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진수성찬은 아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갈치와 고등어와 명태가 참 많았다. 주로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끓인 조림이 많았다.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명태조림 등을 많이 먹었다. 가끔은 국수를 삶아서 먹기도 하고 생두부를 먹기도 하고 도토리묵을 먹기도 하였다. 내가 살았던 동네에는 밤마다 두부를 만들어 파는 가정집이 있었다. 콩을 맷돌에 갈아서 은근한 불에 오래도록 끓인 다음에 간수를 조금 넣으면 콩물의 앙금들이 달라붙어 두부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두부를 두어 판씩 만들어서 밤마다 몰래 팔았다. 그렇게 막 만들어진 두부는 참으로 고소하고 맛이 일품이었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도 맛이 참 좋았다. 그래서 모내기할 때 새참에도 두부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곤 하였다. 또한 우리 동네에는 막걸리를 만들어 파는 주조장이 있었다. 따라서 새참을 먹을 때에도 어른들은 꼭 막걸리를 함께 드시곤 했는데, 어린 우리들에게도 장난 삼아 막걸리를 먹어보라고 권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술과 사연이 많은 나는 끝까지 술은 받아먹지 않았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막걸리를 팔았는데(주조장에서는 소량의 막걸리는 팔지 않았다. '통개'라고 불리는 한말짜리 술통에 팔았다. 그래서 마을마다 막걸리 소매상이 있었다. 막걸리 한 통을 가져다가 소주병이나 간장병에 덜어서 팔았다. 마루 한쪽에 그런 막걸리가 담긴 병들을 나란히 세워두면 필요한 동네 사람들이 그 막걸리를 가져다 먹고  나중에 돈이나 곡식으로 그 막걸리 값을 지불하였다. 지금 다시 생각하니 막걸리 장사가 아니라 막걸리봉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는 회관을 새로 지으면서 구판장도 함께 만들어졌다. 구판장이  새로 생기면서 우리 가족들은 그 구판장에서 막걸리를 팔기도 하였다. 그때는 주로 항아리를 땅에 묻어두고 시원한 막걸리를 즉석에서 주전자에 담아 팔거나 역시 소주병이나 간장병에 담아 팔았다. 또한 잔술로도 팔았다. 그 잔술을 왕대포라고 하기도 하였다. 술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할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술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한다. 나는 다만 그때 얻어먹은 음식들을 평생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새참의 맛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새참을 함께 먹어본 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림 2. 내가 가끔 꺼내서 보는 내 고향 모내기하는 모습



3. 나의 들판에서는 언제나 보리타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제주도에서는 모내기하는 모습은 잘 볼 수 없어도 보리밭은 가끔 볼 수 있다. 가파도 청보리밭과 내도 알작지 곁의 보리밭이 나는 참 좋다. 그리고 내가 사는 화순을 비롯하여 많은 곳에서 보리밭을 볼 수 있다. 보리밭도 많고 밀밭도 많다. 그리고 특히, 맥주보리밭이 많다. 가파도 청보리 축제가 유명하다. 가파도에서 제주도 본섬을 바라보는 감회도 새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가파도에는 자주 가지 못한다. 내도 알작지와 내도 보리밭은 나의 주요 산책코스여서 자주 가는 편이다. 보리밭을 보면 나는 마냥 기쁘거나 아름다운 추억만을 떠올리지 못한다. 보리밭에는 나의 아픈 어린 시절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보리는 가지런한 벼와 달리 마구 뿌려져서 빽빽하게 자란다. 이모작을 하는 논에서는 벼를 수확하고 늦가을에 보리를 파종한다. 보리는 물이 없는 밭에서도 경작할 수 있다. 겨울에는 어린 보리들이 추위를 견디며 더디게 자란다. 자란다기보다는 차라리 견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린 보리 싹들은 서로 몸을 비벼대며 추운 겨울밤을 뜬눈으로 견뎌야만 한다. 가난한 흥부의 자식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잠을 청하듯 그렇게 힘겨운 밤을 견디며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겨울을 넘겨야만 한다. 날씨가 추운 관계로 벌레들도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래서 따로 농약을 뿌리지 않아도 병충해가 거의 생기지 않는다. 내가 좀 살아보니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도 가난을 알고 추운 겨울을 온몸으로 겪어본 사람들이 더욱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면 보리밭 밟는 일을 많이 했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잔디밭도 그렇고 다른 작물들을 밟으면 혼이 나는데 왜 보리밭은 일부러 밟아주는 것일까? 농촌봉사활동한다고 전교생이 몰려가서 보리밭을 밟아주기도 하고 심지어 크고 무거운 쇠바퀴를 굴려 밟아주기도 하였다. 겨우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들뜬 뿌리를 다시 땅에 밀착시켜서 보리 뿌리의 활착을 돕기 위해서 밟아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도 이렇게 가끔 자신들의 들뜬 마음을 밟아줄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요즘이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방앗간 일을 하셨다. 물레방아와 디딜방아가 있던 자리에 새로 만들어진 현대식 정미소를 하셨다. 시골에 살면서도 가진 땅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정미소 일부터 시작하셨다. 하지만 그 선택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고를 당하셨다. 바닥에 있던 발동기와 천정에서 도는 축을 연결하는 벨트에 끼어 천정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 사고로 아버지는 머리와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 아버지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병원비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린 아버지는 더 깊은 산골마을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또 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람에게 속아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너무 순진하여 다 썩은 정미소를 인수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완전한 거지가 되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늘 그 방앗간을 소개해주신 김재원 아재를 원망하셨다. 중간에서 돈도 많이 떼어먹고 또 발동기가 고장 나면 고쳐준다면서 또다시 속이기를 반복했다며 평생 원망을 하시며 사셨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는 행경리에서의 생활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좀 자란 다음에 혹시 기억이 날까 싶어서 가끔 행경리에 가 보았으나 그때는 이미 방앗간도 없어져서 보이지 않았고 나의 잃어버린 기억도 찾을 수 없었다. (가끔 꿈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다. 벽도 반듯하지 못한 아주 작은 방에서 방바닥에 세숫대야를 놓고 빗물을 받는 모습인데 혹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모습이 아닐까 혼자서 생각하곤 한다.)


젊은 아버지는 그렇게 두 번의 큰 실패를 하고 다시 아버지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그래도 정미소 일에 미련이 남으셨던지 이번에는 작은 발동기 한 대와 허름한 타맥기 한 대를 장만하여 동네 사람들 보리타작을 대신해 주고 그 보리 일부를 삯으로 받는 일을 하셨다. 그 당시에는 이미 경운기가 보편화되어서 다른 경쟁자들은 경운기와 타맥기로 보리타작을 하는 시대였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경운기에 타맥기를 싣고 가서 바로 보리타작을 해주고 빨리빨리 다른 논이나 밭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보리타작을 할 수 있었으므로 훨씬 편리하고 신속하게 보리타작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은 경운기가 없었으므로 발동기와 타맥기를 분리하여 지게로 지고 가서 다시 조립한 다음에 보리타작을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경쟁이 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들은 그런 생활을 꽤 오랫동안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돈이 없어서 경운기를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다. 그리하여 형들과 누나는 어린 나이에도 참 많은 고생을 했었다. 나는 그 시절의 기억이 너무나 아프고 선명해서 나중에 '경운기'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들판에서는 늘 보리타작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미소 주인이셨던 아버지가, 벨트에 물려 끌려가던 날부터 축이 헛도는, 천장에서 다시 떨어지듯 우리 식구들은, 빈 들판으로 내쫓겼다. 발동기 같은 큰 형은, 발동기를 뜯어 짊어지고 논둑길을 넘어 다녔다. 타맥기도 부서진 아버지 갈비뼈처럼 풀어, 옮겨 맞추곤 했다. 경운기들이, 손쉽게 해치우고 들어가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들판에서 밤늦도록 이슬에 젖어야 했다. 카바이드 불빛 아래서 카바이드를 녹이는 물처럼, 우리 식구들의 가슴은 애타게 들끓었다. 불이 꺼진 뒤에도, 카바이드 깡통 속에는 몸살 나게 아름다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보리 한 됫박 퍼내어 바꿔온 복숭아를, 보리 창고에서 나눠먹곤 했다. 큰 형 몸에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고, 바뀐 논에 말뚝을 박을 때마다, 우리들의 들판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함부로 골병들어, 거덜 난 보릿대를 곁에 쌓는 작은 형, 보리무덤에 검불을 쓸어내는 누이는, 갈퀴와 고무래처럼 한없이 슬픔을 후볐다. 가마니 한 장 크기의 그늘 속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잠들곤 하던 나는 자연 숙제로 기르던, 거꾸로 매달린 형의 무, 그 속에서 싹트는 콩, 거꾸로 자라던 허약한 순만 바라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많은 날들 다음으로 오는 오늘, 털털털 탈탈탈 털털털털털 탈탈탈탈탈, 들판을 온통 뒤집어엎어버리던 경운기가, 골목마다 들쑤신다. 추곡수매 공판날 줄서가는 아침, 하곡수매처럼 저 멀리 노인들이 손수레 밀고, 끌고 오신다. 빈 들판에 바람이 껍질을 벗고, 지나간다. 그 길가로 바람의 껍질이 차갑게 쌓여 있다. 월경리 사람들의 깊은 사랑을 실어 나르는, 경운기는 힘센 들짐승이다. 그러한 아침 나는 다른 계절 속으로 떠나, 눈길에 경운기 발자국을 만들며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 간다.



그림 3.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경운기로 보리타작을 했는데 우리 식구들은 경운기 대신 발동기를 돌려 보리타작을 하였다



4. 연어의 종착역과 징검다리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 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우리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 나의 고향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그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그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 바로 전에 살았었다는 ‘행경’이란 마을에서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들었다. 원등리 2구에 있는 좀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월경리 1구 시절,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이었던 바로 그 옛날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봇짐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길은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본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시멘트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그 전날 밤에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하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물가에서 살아서 그런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장어를 잡아먹고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참게를 잡아먹고 자라까지 잡아서 먹었다. 물론 피라미와 붕어와 중태기와 민물새우도 많이 잡아서 먹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그야말로 물고기 천지였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 장어와 잉어들이 수두룩했고 미꾸라지는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서는 섬진강에 가셔서 은어들을 잡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투망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투망질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불법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투망질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자동차 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끝에 장착한 구리선으로 전기를 관통시켜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자전거 바퀴로 돌리던 작은 발전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까지 민물낚시는 기본으로 하였고 겨울에는 주로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그리고 족대라고 하는 작은 그물로도 잡고 맨손으로도 돌 속이나 풀 속을 뒤져가며 물고기들을 잘도 잡아서 먹곤 하였다. 그때는 워낙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물고기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며 산짐승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학대죄로 모두 잡혀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서 먹고 고라니며 산토끼며 꿩들까지 잡아먹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 있었던 추억을 내가 옛날에 썼던 '징검다리'라는 글이 지금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    


하나

길이었다. 덜 자란 몸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어머니는 방물을 파셨고 새벽 샛강의, 입김 자욱한 안갯속으로 떠나시곤 했다. 나는 담장 밑에 펼쳐놓은 꼬막껍데기에, 쑥국 끓이기 놀이를 하며 자랐다. 노을만 어렵게 어렵게 감아 들이던, 바람개비가 스스로의 바람결을 가늠할 수 있을 때, 물오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파랑 간짓대 들고 오리 떼를 몰아내던 골목이 심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뒷모습을 지우던 안갯속으로, 하얀 꽁무니가 사라지고 나도 그 속으로 따라 날아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산소가 보이는 징검다리 사이로 햇살이, 주검처럼 부서지며 흘러갔다. 하류에서 한 몸으로 몸을 섞기 위해 취로사업 나가신, 아버지가 무너진 둑에 묻히고 작업복이 천수답 허수아비에 내걸리던 날도 나는, 그 저수지 뚝에서 삐비 꽃을 뽑아먹고 돌아오는 길, 가로수 구멍 속에 몇 개의 돌을 더 던져 넣었다. 어머니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줄도 몰랐다. 그 해 여름 장마는 담장의 발목을 적셨고, 두꺼비 같은 우리 식구들은, 한밤중에 회관으로 기어 올라갔었다.


학교 앞 코스모스로 기다리기를 즐겼다. 하학종소리 사이로 보이는 형의 검정고무신 앞은, 발가락이 먼저 나와 있었고 생활 보호 대상자 가족 앞으로 달려오는 옥수수 빵과 건빵, 나는 그것이 좋았다. 우리는 뿔 필통 속 몽당연필로 흔, 들, 리, 며, 징, 검, 다, 리, 건, 넜, 다. 끈이 풀리는 소리로 흘러가는 여울물 소리는, 우리를 다시 묶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어 끼고 기차놀이하던 우리들은 그 새끼줄 속에서 자유로웠다. 우리들의 기차는 징검다리를 비로소 건너 다녔고, 오후의 서툰 기적소리 울리며, 동구 밖까지 나가 놀던 소아마비 동생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찾다가 찾아보다가, 어린 집배원이 된 큰 형도, 동생의 소식은 가져오지 못하고, 한 떼 건너가는 동네 아이들만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다섯
여울물 소리는 끈이 풀리는 소리였고 또다시 묶이는 소리였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던 누이가 파란 눈의 아이를 보듬고 돌아와 빨래터에는 방망이질 소리가 잠들지 않았고, 헛발 짚은 어머니는 물속에 더욱 자주 빠지셨다. ……………… 배고픔과 어머니 ……………… 들판에 흐드러진 달맞이꽃 사이로 그렇게 어머니는, 젖은 보름달을 이고 늦게 돌아오시곤 했다.




그림 4.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집은 구멍가게를 하기 위해 화장실 자리에 지은 아래채, 안채는 지붕만 살짝 보인다


그림 5. 나는 어린 시절 집 앞에 있었던 징검다리를 잘도 건너 다녔다 






그림 6. 내가 어린 시절 날마다 건너 다녔던 징검다리가 물안개에 싸여 희미하게 보인다






이 글은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2>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사랑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집은 어떨까요? 좋을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