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산 May 25. 2023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2

수국과 산수국 그리고 닭죽과 삼계탕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2

밥에 담긴 가족 이야기와 공동체 정신 회복을 위한 두레 밥상 이야기




5. 수국과 산수국 그리고 닭죽과 삼계탕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에는 수국과 산수국이 많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올해도 많이 심었다. 지금 한창 수국과 산수국 꽃이 피어나고 있다. 수국과 산수국은 장마 예보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많이 먹고 살아가는 수국과 산수국은 장마철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다. 그래서 이름도 수국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 수국이 눈물꽃으로 보인다. 수국을 보면 먼저 어머니의 파마머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너무나 먹고 싶었으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고봉밥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올해도 부처님께 고봉밥을 올리니 어김없이 고봉밥 같은 수국꽃이 피어난다. 불두화 같은 수국꽃이 피어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 파마머리 같은 수국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니 곧 장마가 시작될 것만 같다. 장마가 시작되면 저승에서도 바쁘게 지내셨을 어머니께서 일 년 만에 다시 나를 찾아오실 것만 같다. 어머니께서는 왜 그렇게 서둘러서 아버지를 따라서 저승으로 가셨던 것일까? 살아생전 고생만 시키던 아버지였는데 왜 그렇게 농약까지 마시고 서둘러서 아버지 곁으로 가셨던 것일까? 어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던 바로 그 삼계탕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께서 어머니 생일날 끓여주셨다던 바로 그 닭죽 때문이었을까? 환갑을 앞둔 아버지 돌아가시고 인천 형 집에서 잠시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나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나를 자꾸만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니 아부지는 그래도 내 생일날이면 꼭 닭을 잡아서 삼계탕도 끓여주고 닭죽도 맛있게 쒀주었다. 나는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구나!"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골에 살면서도 논이 없었다. 논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자신들의 논에서 벼를 수확하고 쌀밥을 먹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들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방앗간을 하시기도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대부분의 시간은 기름소금 안주에 술을 마시거나 아랫목 구들장을 짊어지고 사셨다. 그 덕분에 늘 바쁘셨던 어머니께서 대신 우리 집 가장 노릇을 해야만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평생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처음에는 아는 동네 사람이 삼 씨를 주며, 그거라도 팔아서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팔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처음에는 삼 씨 장사를 시작하여 평생 동안 도붓장수로 살았다고 하셨다. 구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살다가 시집 한 번 잘못 간 바람에 쫄딱 망했다고 하셨다. 잘생긴 외모에 반해서 첫눈에  꽁깎지가 씌어 그만 평생 고생만 하였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중매쟁이와 함께 와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는 외양간에 가는 것처럼 하며 살짝 아버지를 훔쳐보았는데 첫눈에 그만 너무나 마음에 들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만남이었고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운명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머리카락이 엉덩이 아래까지 치렁치렁하셨다는 처녀시절이 끝나고 시집살이가 시작되면서 어머니의 삶은 끝장나고 말았다고 말씀하셨다. 시집에 들어와 보니 마당에 산만하게 쌓여 있었던 가마니는 모두가 왕겨였다고 하셨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시작되면서 곧바로 땅을 치고 후회를 하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팔 남매 중에 둘째 이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처음부터 맏며느리 역할을 해야만 하셨다. 큰 아들, 그러니까 나의 큰 아버지께서 먼저 결혼을 하셨는데 큰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큰 아버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둘째 아들인 아버지를 서둘러 결혼시켰다고 하셨다. 아버지를 결혼시키기 위해 부자처럼 위장을 하였다고 하셨다. 중매로 결혼을 하셨는데 어머니가 아버지 집에 갔더니 마당 가득 가마니들이 쌓여 있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혼자서 생각을 하였다고 하셨다. "아, 이 정도면 밥은 굶지 않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고 하셨다. 마침 아버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던 어머니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서둘러서 덜컥 결혼을 하였다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결혼식을 마치고 시댁이라고 들어갔는데 벼가마로 생각했던 그 가마니들은 모두가 왕겨로 가득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속아서 결혼한 어머니는 아버지 동생들까지 모두 먹여 살리느라 그야말로 죽어라고 식모살이만 하였다고 하셨다. 게다가, 할머니는 얼마나 못살게 구박을 하였는지 말로는 도저히 표현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꼴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는 바람에 8년 동안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는데 8년 동안이나 하늘을 볼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시어머니는 엄마가 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꼴도 보지 못하고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겨우 어찌어찌하여 8년 만에 지급을 나갔는데 보리쌀 한 되와 간장 한 병 주면서 따로 나가서 살아라고 하였다고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때가 너무나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따로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가까운 남의 집 행랑채를 얻어서 살았는데 바로 그때부터 삼 씨 장사를 시작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한 곧바로 누나를 임신하게 되면서 줄줄이 다섯 명의 자식들을 낳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시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오일장에서 생활용품을 사다가 먼 동네까지 이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뚜껑이 하나로 되어 있는 커다란 미원 박스에 생활용품들을 담아서 이고 다니셨다. 빨랫비누, 세숫비누, 바늘, 동정, 검정 고무줄, 애기 고무즐, 이태리 타울, 비누곽, 양말, 버선, 수건, 구루무와 콜드크림, 립스틱, 메리야스와 빤스... , 기타 등등 주로 어머니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시며 장사를 하셨다. 이불만큼 커다란 보자기를 바닥에 깔고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희고 질긴 자루들을 접어서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 물건들이 담긴 미원박스를 놓고 맨 위에는 곡식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되와 홉을 올리고 그 커다란 보자기를 대각선으로 묶으면 장사 나갈 준비가 되었다. 그렇게 아침에는 봇짐 모양을 거의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이고 나가셨다가 밤에 돌아오실 때에는 둥그런 보름달 모양의 봇집을 이고 돌아오셨다. 그때는 대부분 현금이 아니라 곡식들로 물건 값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나갈 때보다 돌아오실 때 더욱 무거운 봇짐을 이고 돌아와야만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봇짐이 무거울수록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 나와 어머니는 밤새 그날 벌어온 곡식들을 다시 한번 되와 홉으로 측량을 하기도 하고 곡식들을 상에 펼쳐놓고 뉘나 벌레 먹은 놈들을 골라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때는 계란도 귀해서 계란도 받아오시곤 하였는데 오일장 전날에는 짚으로 열 개씩 이쁘게 포장을 하기도 하였고 손바닥만 한 치부책인 외상장부를 대신 정리해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렇게 벌어온 곡식들을 장날마다 나가서 팔고 또다시 동네 사람들에게 팔 생활용품들을 사서 늦게 돌아오시곤 하셨다. 그런 장날에는 가끔 붕어빵도 사 오시곤 하셨는데 그 식은 붕어빵이 그렇게도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늘 누구보다도 바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확독에 보리쌀을 갈아 밥을 하여 날마다 아버지 아침밥을 챙겨드리고 장사를 나가시곤 하였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에는 아직도 확독이 있다. 돌확이 표준말 같은데 우리 고향에서는 확독이라고 불렀다. 절구보다는  홈이 약간 크고 가마솥보다는 약간 작은 확독은 쓸모가 참 많았다. 아침마다 보리쌀을 갈았고 조 콩 수수 등도 갈았다. 또한 콩떡과 쑥떡을 할 때 바로 이 확독에 찐 찹쌀을 넣고 메로 쳤으며 여름철 우물가에서 놀 때 그곳에 물을 담아 놓고 물놀이도 하였다. 김치 담글 때 고추와 마늘과 보리밥을 넣고 잘 갈아 열무김치도 담가 먹곤 하였다. 또한 콩국수를 삶아 먹을 때에는 바로 이 확독에서 콩을 갈아 콩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주로 보리밥을 해 먹던 시절에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품이었다. 맷돌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나무절구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었지만 이 커다란 바위에 홈을 파서 만든 이 묵직한 확독은 우리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고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 확독에서 떡을 할 때에는 주로 내가 떡메를 치고 어머니는 물을 발라가며 쌀 반죽을 뒤집어주시곤 하셨는데 그때 우리들의 호흡은 참 잘도 맞았다. 그리고 떡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할 때에는 주로 보리쌀이나 다른 곡식들을 작은 돌로 엎드려서 갈곤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께서 온몸을 흔들어가며 확독에서 했던 일들은 요즘에는 주로 믹서기로 대신하는 것들이 많다.  


그 시절에는 참 집안일이 많기도 많았다. 콩을 삶고 찧어서 메주를 만들고 고추장 메주도 따로 만들고 청국장도 아랫목에서 띄우고 도토리를 주워와서 도토리 묵도 만들고 짚을 태워 콩나물시루에 콩나물도 기르고 간장을 담그고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고 배추김치 무김치 신건지와 총각김치도 만들고 그뿐이겠는가? 틈틈이 밭에 나가 토란을 키우고 고추와 마늘을 키우고 오이와 참외와 옥수수를 키우고 무와 배추와 열무를 키우고 참깨와 들깨와 감자와 고구마를 키우고....., 어머니는 장사를 하시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집안일과 밭일을 혼자 다 하시곤 하였다. 또한 자식 없이 일찍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 제사는 어찌나 정성을 많이 기울여 지내시는지 일주일 전부터 제사 준비를 하시고 일주일 전부터 날마다 목욕을 하시고 몸가짐 마음가짐을 조심히 하시던 모습과, 날마다 새로운 물을 떠서 올리고 조왕님께 기도하시고 밤에는 가장 키가 큰 장독에 물을 떠서 올리며 손을 싹싹 비벼가며 또다시 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그렇게 너무나 바빠서 머리 할 시간도 없으셨던 어머니, 장마가 시작되면 겨우 파마를 하셨던 어머니. 머리를 할 때에도 머리를 말고 비닐 커버를 쓰고 오셔서 집안일을 하다가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머리가 너무 뽀글뽀글 해졌다며 한 분 밖에 없었던 미용사는 미안해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오래도록 풀리지 않아 좋겠다며 잘 되었다고 웃으시던 어머니. 쌀이 없어도 보리쌀이며 조며 수수며 무까지 넣어 밥 양을 늘리시던 어머니. 수시로 개떡을 찌고 방아잎을 넣고 전을 부치고 호박죽을 쑤고 팥죽을 쑤고 온갖 음식을 만들어주셨던 어머니. 매운탕을 끓이고 추어탕을 끓이고 장어탕을 끓이셨던 어머니. 밥을 할 때 밥솥에 계란찜을 함께 하셨던 어머니. 대접에 계란이나 오리알을 풀어 넣고 부추를 썰어 넣고 참깨도 살짝 뿌려 밥물과 함께 익혀 먹었던 어머니표 계란찜. 장날이면 김을 사 오셔서 아궁이 잔불에 살짝 구워 가위로 사등분으로 잘라주셨던 어머니. 그러면 더 아껴서 먹는다고 손으로 더 작게 잘라서 아껴먹던 그 고소한 김 같은 어머니.


내 기억 속에는 장마철에 어머니께서 파마머리를 할 때 비닐커버를 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더욱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마철마다 자꾸만 그런 모습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수국꽃이 피어나는 장마철이면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나고 눈물도 더욱 많아지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나이를 먹고 아버지처럼 자꾸만 몸이 아파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고생하셨던 어머니뿐만 아니라 늘 아프셨던 아버지 생각도 함께 난다. 그리고 날마다 술만 드셨던 아버지 마음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누나와 큰형과 작은형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먼 객지로 나가셨다. 너무나 가난하여 누나와 형들은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돈을 벌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한다. 비록 누나와 형들은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다른 어느 누나들과 다른 어느 형들보다도 인생을 훌륭하게 잘 사셨다. 그래서 나는 누나와 형님들께 늘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또한 마음 깊이 존경하고 누구보다도 말을 잘 듣는다. 학벌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나와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리한 여건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와 형님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살았고 성실하게 살으셨고 또한 아름답게 살아오셨다. 말씀은 하지 않으시지만 그동안 남들 모르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으며 얼마나 많은 서러움과 억울한 일들이 많았을지 나는 아마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보다 훨씬 현명하고 나보다 훨씬 잘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존경스럽다. 스스로 잘 사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와 동생을 도와주시면서 잘 이끌어주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와 동생은 그런 누나와 형님들 덕분에 이렇게 편안하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복 받은 인생이며 행복한 삶인가를 생각하면 더욱 깊은 곳에서 뜨겁고 진한 눈물이 솟아 나온다.


그리고 비록 환갑을 앞두고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 또한 아버지 처지에서는 그래도 참 잘 살고 가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난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은 하루종일 남몰래 숨어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저물녘이면 언제나 아버지 얼굴은 붉은 노을이 되셨다. 나는 날마다 태양이 아버지 얼굴로 지는 줄로 알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술을 드셨으면 내 마음속에 그렇게 각인이 되었겠는가? 저녁노을은 늘 아버지의 엎질러진 술이었으며 붉게 타오르는 아버지의 술기운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밤마다 술에 취하셔서 비틀거리다 쓰러지곤 하셨다. 그리고 장사를 하고 늦게 돌아오신 어머니와 밤새 지치지도 않고 싸움을 계속하셨다. 누나와 형님들은 일찍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하여 집을 떠나셨기 때문에 내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집안일을 해야만 했고 함께 싸워야만 했다. 동생은 철이 없어서 밖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놀기에 바빴고 집에 돌아와서는 일찍 잠이 들어서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엄마 편에 서서 아버지와 다투어야 했으므로 아버지와는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느 한계를 넘어 술에 취하면 완전히 눈빛이 달라지고 무서운 괴물로 변신을 하곤 하셨다. 저녁밥상이 날아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부엌칼로 어머니와 나를 찌르려고 사정없이 달려들곤 하셨다. 나와 어머니가 힘을 합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나와 어머니가 함께 어두운 곳을 찾아서 달아나면 아버지는 또 끝까지 따라와서 어둠 속으로 부엌칼을 던지기까지 하셨다. 참으로 대책 없이 아득하고 무섭고 끔찍한 밤들이었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밤새 도망을 다녔고 남의 집 담장 뒤에 숨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꼼짝없이 밤을 지새워야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그런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기도하기도 했도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많이 날 때에는 내가 차라리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면 그때는 내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몰랐던 비밀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의 출발은 늘 같았다. 한결같은 싸움의 출발은 바로 저녁 밥상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저녁밥을 안 드시겠다고 버티시고 어머니는 그래도 끝까지 아버지께 저녁밥을 드시라고 강요를 하셨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먹었으니 밥은 따로 먹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고 어머니는 술을 먹었어도 밥은 꼭 따로 먹어야 한다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아버지가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면 그냥 상을 물리면 될 것을 어머니는 끝까지 밥 한 술이라도 뜨셔야만 한다고 강요를 하셨다.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그렇게 날마다 밥상이 엎어지고 밥상이 날아가도 왜 끝까지 아버지께 저녁밥을 먹도록 강요를 하셨던 것일까?


내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렇게 죽일 듯이 싸운 다음의 일들이었다. 그렇게 밤새 원수처럼 싸우고 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나와 어머니는 헐레벌떡 도망을 다니다 보면 아버지는 어느 정도 술에서 깨어 나오시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에 또다시 밥상을 차려오셔서 아버지께 꼭 늦게라도 기어이 저녁밥을 드시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새롭게 또 하루를 시작하시곤 하셨다. 지금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은 겉으로는 아버지가 이긴 듯 보였으나 알고 보면 언제나 어머니가 이긴 싸움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위험한 싸움을 즐기면서 싸움꾼이 되어 가셨고 나중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패싸움에서도 어머니는 언제나 대장 노릇을 할 정도가 되셨다.  


이제 와서 다시 한번 조용히 깊이 생각을 하여 보면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더욱 특별한 비밀들도 있었던 것만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만 같다. 내 눈에는 날마다 싸움만 하는 것 갔았던 두 분 사이에는 둘만 아는 아주 은밀하고 각별한 사랑의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때 일들이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원수처럼 싸우면서도 해마다 가을이면 함께 꼬박꼬박 가을여행을 떠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며 놀 때에는 어찌나 재미있게 잘 노시는지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장구를 가장 잘 치셨고 어머니는 동네에서 춤을 가장 재미있고 열정적으로 잘 추셨다. 그리고 또한 그 시절에는 가족계획을 하라고 보건소에서 피임약과 콘돔을 나누어주던 시절이었다. 내가 여자가 아니어서 자세히는 잘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여자들이 먹는 피임약은 날마다 작은 한 알씩 먹는 피임약이었다. 한 달 서른 개의 알약이 한 세트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보건소에서 그런 피임약을 한 통씩 받아오곤 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 피임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함께 준 콘돔으로 풍선을 불고 놀았던 기억이 많다. 다른 어떤 풍선 보다고 그 콘돔은 크게 불 수 있었고 또한 질겨서 아무리 풍선을 크게 불어도 잘 터지지 않아서 참 좋았다.


기타 등등 여려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확실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는 내가 몰랐던 은밀하고 특별한 사랑이 있었음이 확실해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머니는 불행하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불행하지 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록 내가 효도를 하지 못하고 일찍 보내드린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저승에서도 재미있게 오손도손 신혼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어쩌면 살아생전 해마다 가을 여행을 함께 다니셨듯이 올해 장마철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정답게 손 잡고 내가 사는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다시 한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내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번진다. 이번에 오시면 꼭 한 번 물어보아야만 하겠다. "왜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께 저녁밥을 끝끝내 드시라고 강요를 하셨나요?"


마음 한 번 돌려 다시 생각하니 눈물의 꽃 수국이 환하게 웃으며 피어난다. 올해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나란히 손 잡고 신혼여행처럼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오실 것만 같다. 일 년에 한 번씩 여행을 다니셨던 부모님께서 나에게로 다시 한번 신혼여행을 오실 것만 같다.  나에게 오시면 올해는 꼭 삼계탕을 대접해야만 하겠다. 생일날이면 꼭 끓여주셨다던 닭죽도 대접해야만 하겠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함께 환하게 웃으실 수 있도록 맛있는 음식으로 웃음꽃을 피워야만 하겠다. 올해는 꼭 누나랑 형님들 그리고 동생도 함께 불러서 오랜만에 온 식구들 잔치를 벌여야만 하겠다. 부모님께서 낳아주신 자식들이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아무 걱정 하지 마시고 저승에서 알콩달콩 싸우지 말고 재미있게 잘 사시라고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다. 저승에서는 시어머니도 없으니 마음 편히 잘 사시라고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다. 이승에서 못 다 한 사랑 원 없이 하시며 행복하게 사시라고 꼭 말씀을 드려야만 하겠다. 그래야만 지금껏 내 가슴을 짓누른 확독 같이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질 것만 같다.


수국 꽃들이 날마다 더욱더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올해는 시대에 맞추어서 어머니께서도 칼라로 파마를 하시고 계신다. 올해는 특별히 수국꽃들이 더욱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동안 희고 푸른색 계열로만 피어나던 수국꽃들이 올해는 붉은색 계열과 자주색 계열과 보라색 계열의 수국꽃들이 더욱 풍성하게 많이 많이 많이 허벌나가 많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그림7. 우리집에 있는 확독은 왼쪽 그림처럼 크고 무겁게 생겼고 오른쪽 그림은 공이돌을 보여주기 위해 빌려온 사진 입니다
그림 8. 수국과 산수국의 비교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한식, 그 뿌리를 찾아서 - 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