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음식,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
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음식,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
6. 물의 양과 눈물의 양
물의 양에 따라 밥이 되고 죽이 되고 누룽지가 되고 다시 숭늉이 된다. 물의 양에 따라 국이 되고 찌개가 되고 조림이 된다. 그렇게 음식은 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고 우리들의 인생은 눈물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에는 눈물이 얼마나 필요할까? 나의 인생은 밥이 될 수 있을까? 죽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은 누룽지가 될 수 있을까? 숭늉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은 국이 될 수 있을까? 찌개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은 조림이라도 될 수 있을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글이 있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나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글이 있다. 어머니의 마지막 글이 있다. 아마도 광주에 있는 병원을 몰래 빠져나오셔서 고향집에서 농약을 마시고 쓰신 것 같다. 그 농약이 온몸으로 퍼지는 순간에 쓰셨을 것만 같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수건을 입에 물고, 치아가 다 으스러지도록 입을 앙다물고 쓰신 듯하다. 자식인 나는 평생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음식에 들어가는 주재료가 중요할 것이고 소금과 된장 따위의 양념도 중요할 것이고 향신료 또한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음식의 맛과 형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먹는 음식은 대부분 물과 불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음식이 밥과 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흔히 밥과 국 그리고 반찬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우리 한식요리에서 물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밥, 죽, 국. 탕, 전골, 찌개, 조림, 찜, 볶음, 무침 등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본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밥은 물이 거의 없는 것을 말하고 죽은 물이 좀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죽도 밥도 아닌 어중간한 것들도 있을 수 있다. 진밥이 있을 수 있고 된죽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과 밥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과 탕과 전골과 찌개와 조림 등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나의 운명은 나의 심장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슴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가난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건강이 결정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문학이 결정했다.
째깍째깍, 나의 가슴속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쿵쿵쿵, 나의 심장 속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쓱싹쓱싹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2017년 12월 22일,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에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대적인 수술을 받았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심근증’이었다. 1990년 6월 8일에도 내 가슴은 열리고, 나의 심장은 멈추어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란 병명으로 수술을 받았으니, 나의 심장은 이렇게 두 번 죽고 세 번 살아났다.
이 심장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이다.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병이라고 밝혀졌다. 그러니까 내가 아마 산부인과 병원에서 태어났으면 나의 병은 태어나면서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그것도 지질히 도 못 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심장병의 경우에는 대부분 청진기만 대어 봐도 이상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아무도 모르게 나 홀로 알았다.
음식 조리를 할 때 물의 역할은 무엇일까? 물은 끓어서 약간만 증발하거나 약간만 넘칠 때도 있다. 대부분은 졸아들거나 양이 줄어서 끓일수록 탁해지기도 하고 더 맑아져 육수를 시원하게도 한다. 또한 수돗물로 끓이는 것과 약수나 시골 물을 받아다 끓이면 맛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똑같은 재료로 정성을 기울여도 먹는 장소에 따라서 현격한 맛 차이가 나기도 한다.
음식에서 물은 여러 재료들과 어울려 있다. 먹을 때까지 남아서 음식물의 일부분이 되기도 하고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국물 양에 따라 훌렁훌렁한 ‘국’이 되기도 하고 고기나 채소가 더 들어가 오래 끓인 ‘탕’이 되기도 한다. 물 양을 약간 줄여 몇 명이 한 끼에 한 솥에 끓여 비워내는 것을 ‘찌개’라고 한다. 여기에 약한 불로 지그시 끓여 달달 졸이면 ‘조림’이 되기도 한다. ‘볶음’은 물이나 기름 또는 고기와 함께 볶는다. ‘찜’은 물이 직접 닿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지만 솥 바닥에서 팔팔 끓는 물 수증기로 쪄진다.
우리들이 즐기는 한식 중에서 불을 이용하여 요리를 할 때 떡과 전과 튀김은 좀 다르지만 대부분의 음식들은 물을 이용하여 조절을 한다. 그렇다면 국, 탕, 찌개, 조림, 볶음, 찜, 무침이 차지하는 물 구성비는 대체로 얼마나 될까? 같은 재료로도 물 양만 잘 조절하면 위에 열거한 모든 음식을 해낼 수 있으니 우리들의 음식문화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심장 전문가는 아니지만 50년 넘게 심장병과 함께 살다 보니 심장에 대한 각별한 지식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의학계에서는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는 심장질환에 대한 정의를 최근에 내린 듯하다. 내가 1차 수술을 받을 당시에는 ‘비후성심근증’ 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고 하였다. “대동맥 판막 아래쪽에 선천적으로 혹이 있어서, 좌심실에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출구가 좁아져 있다. 그래서 온몸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적어서,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유발하고 있으므로 그 혹을 떼어내면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거기까지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심장수술을 받은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비후성심근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그 원인과 증상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심장 돌연사의 대부분은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이 바로 이 ‘비후성심근증’으로 돌연사하는 장면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사랑하면 죽는 병으로 알려지게 되어서 각별한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녀가 함께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들의 몸이 피를 많이 필요로 하는데, 온몸으로 나가는 출구는 좁아져있고 심장은 더욱 힘차고 부지런히 뛰어야만 하는데, 병든 심장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후성심근증’ 환자들은 언제라도 돌연사를 당할 수 있고 갑자기 복상사를 당할 수 있으므로 과로뿐만 아니라 과도한 사랑 또한 자제해야만 한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무리하지 않고 늘 조심해야만 한다. 그야말로 사랑을 하려면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병이라고 한다.
* 비후성심근증
정의 ― 좌심실 비후를 유발할만한 대동맥판막 협착증이나 고혈압과 같은 다른 증세 없이 좌심실 벽이 두꺼워지는 심장 질환이다. ……,
원인 ― 비후성심근증은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된다. 11개 근절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비후성심근증의 발생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증상 ― 좌심실의 수축 기능이 유지되면서 심부전의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운동 시 호흡 곤란, 피로감,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호흡, 발작성 야간성 호흡 곤란 등이 특징적인 증상이다. 협심증과 유사한 특징적인 흉통이 동반될 수 있는데 이는 주로 좌심실의 미세혈관 이상에 의한 허혈 때문으로 생각된다. 실신이나 어지럼증, 두근거림 등의 증상이 부정맥에 의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장 돌연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심부전 증상은 주로 좌심실의 이완 기능 장애에 의한 것이므로 좌심실 유출로의 폐색이 있는 환자와 없는 환자 사이에 증상의 차이는 별로 없다.
앞에서 인용한 의학정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루하고 재미없는 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의 직접 당사자인 나로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나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송곳이거나 칼끝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이 음식을 할 때 ‘눈짐작’이나 ‘적당히’라는 양으로 요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눈대중이나 느낌 차이를 감안하고서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 등 문화 각 분야에서 체계적인 계량화가 되지 않아 사람마다, 집집마다, 지역마다, 때론 같은 사람일지라도 기분에 따라 표준화 또는 일반화되지 않은 구체성의 결여 때문에 새롭고 창의적인 재창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본이 충실하게 잡혀있으면 뭐든지 다음 사람이 따라가기 편하다. 그에 따라 더 나은 창조물을 기대할 수 있겠는데 당대의 대가가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수대에 걸쳐 전수되어 온 전통기법과 혼이 일시에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하곤 한다.
우리 문화 곳곳이 발전하듯 음식도 날이 갈수록 나날이 더 나은 모습이 되기 위해선 조목조목 하찮은 것부터 기록하고 그걸 후대에 올곧게 전하는 장인정신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 차원에서 한식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음식의 수위 조절 즉, 물의 양을 이해하는 건 남다른 의미가 있다. 나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 번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도록 할 예정이다.
우리들은 보통 훌렁훌렁한 국이라고 말한다. 된장국, 김칫국, 콩나물국 등은 물이 80% 정도 될 것이다. 억세지 않은 한 가지 국감이 기본이다. 단일한 채소와 멸치나 돼지고기 등이 1:1 정도로 결합을 한다. 잡탕이 아닌 바에야 한 가지만 쓴다. 간도 짜지 않다. 국그릇에 퍼서 말아먹거나 국물로 떠먹을 뿐이니 농도가 진하지 않고 훌렁훌렁하다. 식구가 많고, 먹을 게 없던 시절에 먹었던 국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칫국도 열 명 내외가 먹으려고 푸짐하게 한 솥에 가득 끓이지만 실상 돼지고기는 반 근을 넘기지 않은 양을 잘게 도막내서 이게 고깃국인지 냄새나 맡아보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미약하였다. 오죽하면 ‘태평양에 돼지 한 마리’라는 비유가 유행했을까. 국은 싱겁다 보니 한 그릇이 더해진다. 많이 먹어도 배가 쉽게 꺼지고 만다. 국물을 떠먹기도 하지만 대개 밥을 말아서 먹는다. 국물과 건더기는 소화를 돕고 술을 깨는데 이롭다. 진한 고기국물이나 라면국물을 기피할 것이지 된장이나 김치로 끓인 국물은 오히려 배를 부르게 하므로 많은 양을 섭취하는 것 자체를 방지하므로 살을 빼는데 효과적이다. 국은 짜지 않은 데다 국감이 섬유소가 많다는 건 다 알고 있다. 한식에서 간단하면서도 즐겨 먹는 국을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꽤나 고생을 해야 한다. 알고 보면 국이 건강으로 가는 식단이라는 걸 깨달아야만 한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지게질을 하였다. 물론 꼴 베기와 나무하기는 그전부터 하였다. 내가 지게질을 시작하면서 짝사랑도 시작했다. 나는 남몰래 선생님을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짝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여수 오동도 앞바다에서 돌아가셨다. 오동도 앞바다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사랑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으로 끝장나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잘하지 못했다. 진똘이 놀이도, 나이 먹기 놀이도 잘하지 못했다. 조금만 달려도 왼쪽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파서 잘 달릴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내 몸이 허약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몸을 튼튼하게 하려고 밤이면 학교 운동장에 가서 남몰래 달리기 연습을 하였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말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철저한 외톨이였다. 나는 내 몸이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참 바보 멍청이였다.
나는 체육책에서 읽었다. 나처럼 왼쪽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를 체육책에서 읽었다. 나는 그때 나의 예금통장이 따로 있었다. 누나와 형님들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꼭 내 힘으로 중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리를 기르고 토끼를 기르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산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서 팔았다.
나는 나의 통장에서 돈을 찾아서 곡성 읍내 병원에 남몰래 혼자 찾아갔다. 늙은 의사 선생님께서 내 왼쪽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보시더니 바로 심장병이라고 말씀하셨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어봐도 잡음이 많고 심장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틀림없이 선천성 심장병이라고 단언하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주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온몸이 축 처지고 말았다.
탕과 전골은 대부분 육수가 진하다. 탕(湯)은 고기가 듬뿍 들어가 있다. 국물이 걸쭉한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추어탕, 매운탕, 보신탕, 삼계탕, 설렁탕, 토란국 등이다. 맑은 국과는 달리 3~40% 내외의 고기가 묵직하게 들어간다. 만약 탕에 고기가 없거나 국물이 희멀건 하다면 사람들은 “그 집 음식 별로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러니 요즘엔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국물에 얹어주는 집이 흔하다. 가열하는 정도에서도 높은 온도로 고깃덩어리가 부서질 지경으로 팔팔 끓이고 뼈를 고아서 칼슘 알맹이를 죄다 꺼낸다. 고기 안에 있는 육즙이 밖으로 빠져나와 고루 퍼지도록 조리하였으니 파와 각종 향신료를 곁들여야 본래 갖고 있던 누린내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탕에 국물이 너무 많으면 진한 맛이 나지 않고 부족하면 걸쭉한 걸 넘어 고깃덩어리만 씹어야 하니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감자탕에 왜 감자가 들어갈까? 전분이 섞여 구수한 맛을 더하기도 하지만 빤한 고기 양에 감자덩어리 몇 개 더 들어가면 푸짐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전골은 탕과 찌개의 중간이다. 조리법이 탕과 같지만 즉석식이며 국물을 잘박하게 붓고 진하게 다시 끓이는 측면이 강하다.
나는 며칠 후에 또다시 남몰래 광주까지 가서 검사를 받았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이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하셨다. 심장 판막증은 무조건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엄청 비싸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내가 심장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에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가난이 나의 입을 스스로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누나가 흑백텔레비전을 사 오셨다. 그 당시에는 수사반장과 수사본부, 그리고 전우와 타잔이 인기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이 너무 자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님께서 어린이 심장재단을 만들어 홍보하던 시절이었다.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들을 외국으로 데려가서 심장수술을 시켜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오는 화면이 많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볼 때마다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먼 들판으로 뛰어나가 홀로 펑펑 울었다. 그러면 나를 내려다보던 별들도 눈가에 눈물이 함께 맺혔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의술이 발전하지 못해서 심장수술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서 수술비용이 엄청 비싸다고 하였다. 집안에 심장병 환자 하나 있으면 집안이 망할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홀로 결심했다.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수술비를 마련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수술을 시키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이 어떨까? 어쩌면 심장이 아픈 나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고 안타까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 나 혼자 남몰래 아프다가 홀로 사라지면 남은 가족들은 그래도 나를 잊고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고 말았다.
찌개는 국물 반 재료 반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찌개를 먹기 시작했을까? 찌개는 국의 변형된 형태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섞어서 혼탕이 된 경우도 여기서 시작하였다. 국물 양뿐만 아니라 모든 감이 대폭 줄어들어 ‘몇 인분’으로 계산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릇도 바뀌어 자그맣다. 국물을 바특하게 잡아 되직하게 끓이되 소금 간과 양념, 찌개 재료가 듬뿍 들어가 있다. 그러니 물이 절반 이하로 현저히 줄어든다. 대개 1인분이나 2~3인분이니 먼저 끓인 육수에 준비된 재료를 넣고 파르르 끓여 떠서 먹는 인스턴트 국이다. 응당 맛을 찾다 보니 간을 중요시한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외식이 늘어나면서 국물을 찾는 사람들은 찌개를 꼭 찾다 보니 당장 팔팔 끓을 때 간이 맞는 찌개를 선호한다. 이게 식으면 짭조름하기 일쑤다. 밥 한 숟갈에 찌개 한 숟갈이 반복된다. 뜨거울 때 먹다 보면 염분을 얼마나 많이 섭취했는지 자신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식습관에 길들여지게 되는 약점이 있다. 게다가 국에서 찌개로 식단 문화가 바뀌면서 제철을 어기는 경우가 다수 발생하게 된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국은 보통 다섯 명에서 열 명까지 적잖은 숫자가 두 번 퍼먹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양을 끓이다 보니 자연스레 많지 않은 고기즙을 안간힘을 내서라도 죄다 빼내 골고루 섞어주고 푸성귀마다 뒤섞여 상호작용을 하는 2차 조리과정을 겪는다. 반면 적은 양, 소수를 위한 찌개는 이미 마련된 육수에 물을 붓고 설익었을 때 가져오는 동안 재료가 익고 물이 줄어들므로 완성품이 아니면 사람들 성화에 배기지 못한다. 찌개는 짜고 찐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건강은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심장이 아픈 것보다 오히려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내 몸이 자라면서 내 몸은 더 많은 피를 요구했고 나의 병든 심장은 더욱 힘들어했다. 나는 계단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지 못하고 계단 중간에서 쪼그려 앉아 쉬어야만 했다. 계단을 오르다가 쪼그려 앉아 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장병 환자들이 많다. 심장병 환자들은 앉아서 몸을 굽히지 않으면 숨쉬기가 힘든 기좌호흡이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취직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국어선생님께서 꼭 고등학교는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라며 원서까지 직접 써 주셨다. 학비뿐만 아니라 기숙사비도 모두 무료이고, 옷이며 신발까지 모두 무료인 학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학 한, 서울에 있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는 나의 삶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당시 한국전력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전기공고를 비롯하여 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철도공고 그리고 구미전자공고 등이 있었다.
나의 서울 생활은 그렇게 강남에서 시작되었다. 주위가 온통 배 밭이었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은마아파트에서 걸어가면 중간에 일본인학교 딱 하나만 있었다. 학교 뒤에는 대모산이 있었고 앞에는 구룡 마을과 개울이 있었다. 배 밭 주위에는 작은 시골마을이 있었는데 비만 오면 우리 학교 강당으로 대피해 와서 며칠씩 지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실습 위주의 공업학교 생활보다 오히려 기숙사 생활이 더 힘들었다.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도 무섭고 선배들이 무서웠다. 바로 위층에는 1년 선배들이 있었는데 난방용 스팀라인을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우리들은 언제라도 바로 뛰어올라가야만 했다.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선배는 타오르는 태양이었고 후배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커다란 돌에 ‘면벽삼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고 우리는 3년 동안 “나 하나는 수도의 전부다”라는 구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 특히, 매일 밤마다 있었던 저녁점호 시간이 가장 긴장되고 힘이 들었다. 모기가 물어도 움직일 수 없었고 등이 가려워도 긁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먼지 하나라도 발각될까 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저녁점호를 무사히 받기 위해서 방 청소를 꼼꼼하게 하고 사물함 정리를 아무리 잘해도 중대장과 대대장들은 꼭 하나씩 지적을 하였다. 방문 바로 옆, 벽을 등지고 복도에 줄 서 있던 우리들은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특히 사물함의 이불뿐만 아니라 런닝과 팬티 그리고 양말까지 모두 사각으로 각이 맞지 않으면 우리들은 어김없이 지적을 당하고 기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은 아예 사각으로 만들어 꿰매서 점호 때마다 사물함에 놓고 실제로 입거나 신는 속옷과 양말은 가방에 숨겨놓곤 하였다.
우리들은 또한 밤낮으로 자주 운동장으로 불려 나갔다. 자정에 운동장에 모여 운동장 흙바닥에서 굴러야만 했다. 우리 전교생은 새벽마다 운동장에 모여 대치동에서 오신 태권도 사범의 구령소리에 맞추어 새벽하늘이 놀라 깨어나도록 힘차게 기합을 넣으며 태권도를 해야만 했다. 새벽 운동이 싫어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사감 선생님께 걸려 벌점과 함께 심하게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거기가 바로 서울 강남의 개포동이었는데 우리들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땅에 파일을 쿵쿵쿵 박기 시작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개포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유명한 고등학교들이 이사 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개들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동네로 바뀌고 말았다.
조림은 보통 물이 10% 이내인 경우가 많다. 조림이 완성됐을 때 국물이 10% 이내라는 뜻이다. 주재료인 생선에 보조재료 무, 호박 따위를 깍두기보다 서너 배, 또는 손바닥만큼 납작하고 크게 썬다. 가마솥에 장작을 메우고 물을 원재료의 30% 정도 되게 자작자작 붓고 처음에 센 불로 강하게 끓인다. 한번 끓고 나면 불을 2단으로 줄여 끓이는 둥 마는 둥 하면 부재료에 있던 수분이 외부에서 침투한 간기를 먹고 슬쩍슬쩍 물기를 뱉어낸다. 밀어주고 당겨주는 기분 좋은 화학반응이라고나 할까. 국물이 꽤나 불어나 있지만 걱정할 게 없다. 이내 줄어든다. 자글자글 끓이다 보면 바닥엔 물기가 5%나 남아있을까. 물러지면서 쪼글쪼글 타기 일보직전이다. 거무튀튀하지만 쫄깃하다. 생선보다 맛있는 즙을 빨아먹은 무나 호박 잘라먹기 바쁜 게 조림이다. 조림은 젓갈과 함께 밥도둑이니 두어 조각으로 밥 한 그릇 비우기 쉽다. 조림에 있어서 주의할 점은 양조간장과 집 간장을 섞는 비율이다. 둘 사이를 1:2 정도로 맞추면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으면서 희멀건 한 색도 아니면서 약간 검은색을 띠며 식욕을 자극하기까지 하니 불조절과 함께 농도조절에도 힘써야 한다. 여기에 쇠고기, 돼지고기, 달걀로 만든 장조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나는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의 꿈이 바뀌었다. 고향을 떠나니 고향이 더욱 그리웠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고 하더니 고향을 떠나니 지지리도 못 살고 도망치고 싶었던 고향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향에서는 교과서 외에는 잘 읽을 수 없었던 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밤 점호가 끝나면 우리는 모두 소등하고 강제로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방과 복도를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별이 빛나는 밤마다 나는 그렇게 옥상에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달빛과 별빛에 젖어 시인의 꿈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크게 떠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의 꿈은 재벌이 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그런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시야가 좀 넓어지고 나 자신을 깊이 돌아보니 재벌보다는 시인이 더 어울릴 것만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와 결탁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재벌이 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아예 나의 꿈을 바꾸고 말았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꿈을 바꾸었다. 그리고 또한 나의 꿈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양념 찜은 조림에 가깝고 그냥 익히는 찜은 물의 양이 0%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생선을 쓰느냐에 따라 멸치찜, 아귀찜, 병어찜, 대구찜, 황태찜, 코다리찜, 전어찜, 고등어찜 등으로 나뉘고 채소 종류에 따라 호박찜, 무찜, 감자찜이 된다. 이 둘을 합치면 병어감자찜, 무코다리찜 따위가 탄생한다. 주로 한번 푹 삶아 국물을 자작자작하게 하는 방법인데 조림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제사와 차례 때는 양념을 거의 하지 않고 소금 간만 하여 원재료에 실고추와 고명을 올려 오색(五色)을 맞추고 시루에 올려 밑바탕에서 위에 있는 재료에 넘치지 않도록 끓여 수증기로 쪄낸다. 고기의 원래 순수한 맛을 보기에 적당하다. 첫 번째 조리법으로 하면 물이 5% 내외로 거의 없는 듯하며 두 번째는 전혀 물기가 남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밤새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기숙사 한 방에 여섯 명씩 함께 살았다. 그렇게 열 개의 방에 60명의 한 반이 살았고 한 과는 두 개의 반이었다. 그리고 다섯 개 과가 있었다. 그런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초저녁부터 코피가 나오기 시작해서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다. 베개와 이불이 다 젖도록 많은 코피를 흘렸다. 기숙사와 학교가 함께 있었는데 양호실은 도서관 옆에 있었다. 낮에는 양호실에 간호사가 있었지만 밤에는 양호실 담당 학생들만 있었다. 그 학생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래서 3학년 형이 밤새 나를 간호해 주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함께 지내고 나서 나는 그 형님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 형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 형님은 유행성출혈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죽음을 계기로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꿔 시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
나는 몇몇 친구들을 모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긋니’라는 동인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시집을 읽고 인문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일장에도 나갔다. 우리들의 모토는 하나였다. “공돌이도 시를 쓸 수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공돌이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의 시를 모아 동인지도 만들었다. 동인 중에 글씨를 잘 쓰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우리들의 시를 백지에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가 복사기 있는 집에 가서 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공고에서 공돌이가 되어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문학 병은 그렇게 더욱 깊어졌다. 나는 나의 심장병을 잊을 정도로 깊숙이 문학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심장병 대신 문학병 환자가 되었다. 그 당시 나의 별명은 ‘원로시인’이었다. 내가 좀 노티 나게 시를 쓴다고 하여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나의 별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자연과 함께 자연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차라리 ‘원시인’이라고 바꿔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글자 하나를 지우고 원시인이 되었다.
볶음도 기름보다 물을 쓰면 더 담백하다. 그리고 무침은 오히려 수분을 잘 빼는 것이 비결이다. 볶는데 물이 들어갈까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듯싶다. 현재의 상식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 전통 음식에서는 각종 식용 기름보다 물을 적절히 활용하여 볶았으니 생각을 바꾸면 음식 뒷맛이 깔끔하다. 뚜껑을 덮으면 쉬 음식감이 물러져 처음에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물을 약간 치고 뚜껑을 연 채 센 불로 볶으면 겉에 열이 전달된다. 차차 불을 약간 줄이면서 저으면 재료 내부에 있던 수분이 빠져나와 통째 익는다. 물기가 부족하면 뚜껑을 잠시 덮어두면 자작자작 물이 고인다. 탈수 현상이다. 얼른 뚜껑을 열고 휘저어주면 그 자체로도 볶을 수 있다. 육안으로 보아 거의 물이 없을 듯 바싹 볶아야 맛이 난다. 생선을 프라이팬에 기름도 두르지 않고 굽는 방법과 유사하다. 일단 달궜다가 연기가 살짝 나면 갈치나 고등어를 올리고 불을 약하게 하면 자체 기름이 빠져나와 담백한 구이가 되는 이치다.
무침은 오히려 부재료에 들어 있는 수분을 얼마나 잘 빼느냐에 달려있다. 굵은소금으로 절여서 물기가 빠져나오면 꾹 짜서 최대한 물기를 없애고 양념을 하여 주무르면 근사하다.
나물을 삶았을 경우엔 물기가 10% 정도 덜 빠지고 김이 모락모락 날 때 무치면 양념이 고루 섞이고 재료 속에까지 스며들어 짜지도 싱겁지도 않으면서 입맛을 자극한다. 들기름은 묵나물에, 참기름은 생나물 무칠 때로 구분하여 쓰면 더 값진 나물무침을 얻을 수 있다
그 당시 나는 “시(詩)는 절(寺)에서 하는 말씀(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들어갔다. 해인사로 갔다. 해인사에서 참선과 절을 배웠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인사 위에 있는 성철스님이 계신다는 백련암 가는 길이었다. 해인사를 막 빠져나와 산을 오르는데 처음 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곳은 스님은 스님이되 스님 같지 않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용맹정진을 포기하고 자포자기를 한 스님들 같았다.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같았다. 내 눈에는 초라한 양로원 같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큰스님이 되지 못한 스님들이었다. 나는 나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 스님들처럼 먼 훗날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해인사를 뛰쳐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나의 병든 몸으로는 수행이 어려울 것만 같아서, 참선을 할 때에도 그렇고 108배를 할 때에도 너무 많이 숨이 차서 이미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하산하여 부천에 있는 어느 학생회에 들어갔다. 그 당시에는 그런 복지회가 많이 있었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앵벌이를 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주로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날짜가 지나버린 주간지를 파는 일을 하였다. 그때에는 서울역에서 입장권을 팔았다. 가족이나 친척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입장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입장권으로 기차에까지 올라탔다. 그리고 서울역에서 수원역까지 가는 동안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그때는 홍익회 직원들이 가장 무서웠다. 그 당시 기차에는 홍익회 직원들이 언제나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수레를 밀고 다니며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주간지도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불법적으로 몰래 장사를 하는 고학생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 주간의 정식 새 주간지를 팔았고 나는 철 지난 주간지를 팔았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앵벌이 꾼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홍익회 직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홍익회 직원에게 잡혀 실컷 혼나고 수원역에 내렸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유난히 슬프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은 주간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학생회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는 인력시장으로 나가 일당벌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헌책방에서 <문예중앙>을 읽었다. 이능표 시인과 이창기 시인의 시가 실려 있었다. 신인상을 받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시들이 참 좋았다. 나도 그 진짜 시인들처럼 진짜 시를 잘 쓰고 싶었다. 약력을 보니 두 시인 모두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출신이었다. 나도 그 학교를 나오면 진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직접 용기를 내어 그 학교로 찾아갔다. 문예창작과 교수실에 최인훈 교수님과 오규원 교수님이 계셨다. 나는 꼭 이 학교에 입학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학력고사 시험을 보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꼭 좋은 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소설은 쓰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소설은 거짓말이라서 쓰고 싶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시를 쓰고 싶다는 대답을 하였다.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1986년에 서울 남산에 있는 서울예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그 남산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을 온통 시만 생각하고 시만 썼던 시절이었다. 물론 최인훈 교수님과 최창학 교수님의 소설 수업시간에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고 윤대성 교수님의 희곡수업 시간 또한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를, 2년 동안 4년 치의 수업을 들었고 천 편도 넘는 시를 썼다.
1학년 때에는 이근배 교수님께 시를 배웠는데, 다른 반 수업인 최하림 교수님 수업을 도강하고 2학년 수업시간에 들어가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도강하는 줄 아시면서 너그럽게 눈감아 주셨다. 그리고 2학년 때에는 당연히 오규원 교수님 시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으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1학년 교실에 들어가 또다시 시 수업을 도강하였다. 그리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책을 읽거나 시 쓰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두꺼운 개인 시집을 복사하여 만들었고 많은 상을 받았지만 특히 오규원 교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신 예장문학상에 당선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도 있었다. 나는 2학년 2학기 수업을 듣지 못했다.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전력공사로 부터 최후통첩을 받고 잠시 고민하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한전 장학생으로 나왔는데 졸업 후에 한전에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문학 병에 걸려 한전 입사를 포기하고 시인의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가을까지 한전에 입사하지 않으면 입사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치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과 의논한 결과 수업을 듣지 않아도 리포트를 제출하면 졸업시켜줄 테니 한전에 입사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동안 도강한 것들 합치면 수업일수가 넘칠 정도이니 그렇게 하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1987년 가을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한전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전 연수원에서도 나는 발전소 교육보다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쓰고 시를 쓰느라 바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오직 시만 썼던 시간들이 아쉬웠다. 대학생활이란 어쩌면 학교 수업도 중요하지만 같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한 편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친한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여름방학 때 그 친구들 집에 함께 놀러 갔던 기억이 참 오래도록 남아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전라도 장수면의 면장 아들이었던 홍이표 집에 갔을 때도 좋았고, 소록도를 지나 어느 섬에 살았던 한경은 친구 집에서의 하룻밤도 참으로 좋았다. 나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 생전 처음으로 배를 타 보았다. 자동차도 함께 싣고 섬으로 들어가는 도항선을 탔는데, 그림으로만 보았던 배들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배가 거꾸로 가는 줄 알았다. 모든 배들은 언제나 앞이 뾰족한 줄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된 「길이 있는 풍경」은 바로 이때 쓴 작품이었다. 홍이표네 집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 집 바로 곁에 있었던 고추밭에서 썼다. 그리고 그날 아침부터 덕유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올라가서 보았던 덕유산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심장이 아파서 높은 산을 오르지 못했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슨 용기가 생겨서 덕유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에서 양 떼 같은 구름들이 산 정상을 향해 기어서 올라오는 모습들에 나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서울 한전연수원 교육을 마치고 나는 첫 발령을 호남화력발전소로 받았다. 여수에 있는 발전소였다. 아니, 그 당시에는 여천이었고 여천공단에 있었다. 나는 커다란 트렁크 가방을 들고 전라선 종착역에 내렸다. 겨울 새벽이었다. 택시를 타고 발전소에 가자고 했는데 내리고 보니 여수화력발전소 정문이었다. 여수에 발전소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의 잘못인지 택시 기사의 잘못인지 기억에 없지만 하여튼 나는 첫날부터 헤매고 말았다. 나는 여수화력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침 퇴근버스를 타고 사택으로 갔다. 그 당시 발전소 사택은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그리고 한전 여수지사와 지점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한전에서 발전소가 분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한 식구였다.
나는 그렇게 여수에서의 생활을 서툴게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수에는 여수화력과 호남화력 이렇게 두 개의 발전소가 있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여수가 아니라 여천이었다. 그리고 사택은 쌍봉동 한 곳에서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발전소가 한전에서 따로 분리되기 전이어서 발전소뿐만 아니라 지점과 지사 사람들도 같은 사택을 함께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지사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월급은 용돈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월급 외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다.
다음날부터 나는 호남화력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신입사원들은 처음에 교대근무에 투입되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오히려 교대근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야만 정상적인 일근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교대근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근무를 한다는 것은 생체리듬에 맞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야간근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표를 내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왕에 입사를 했으니 딱 3년만 다니고 그만 두기로 작정을 했다. 한 3년 정도 다니면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심장병과 이별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심장수술이 실패를 한다면 나의 운명은 그렇게 끝날 것이지만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걸어갈 작정이었다.
호남화력에서 조금 근무를 하다가 또다시 삼천포화력 연수원에서 발전소 실무교육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지금은 태안화력 발전소에 발전연수원이 있지만 ― 얼마 전에 숨진 고(故) 김용균(25)씨가 일하던 바로 그 발전소 ― 그 당시에는 삼천포화력에 발전 연수원이 있었다. 발전연수원은 아마도 얼마 있으면 대전으로 한 번 더 이사를 할 모양이다. 나는 삼천포에서 한 3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 것 같다. 그렇게 짧은 삼천포 생활을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가 본격적인 여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수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바람이었다. 한 시도 가만히 앉아서 쉬어보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쓰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손으로 쓰는 시가 아니라 발로 쓰는 시가 진짜 시라고 생각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홀로 싸돌아다녔다. 바람처럼 싸돌아다니는 날파람둥이였다. 나는 여천시 쌍봉동에서 살았다. 하지만 나는 여천시를 벗어나 주로 여수시 쪽을 돌아다녔다. 물론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여천 쪽도 많이 돌아다녔다. 한하운 시인처럼 문둥병(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산다는 신풍애양원을 비롯하여 사화복지법인 시설이었던 동백원도 자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호동 바닷가를 비롯하여 소라면 바닷가를 많이 걸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선소마을과 날마다 찾아가던 바닷가의 언덕 또한 나의 산책코스였다.
회사에 가지 않고 쉬는 날에는 주로 여수시로 나갔다.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에는 길이 좀 단순했다. 여천시에서 여수시에 가려면 윗길과 아랫길이 있었다. 나는 주로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왔다. 버스 노선도 윗길로 가서 아랫길로 돌아오는 노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주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걸어 다니곤 하였다. 숨이 차서 한꺼번에 걸을 수 없으니 자꾸만 쉬면서 다녀야만 하였다. 내가 주로 다니는 곳은 여수항과 서시장 그리고 여수역과 자산공원이었다. 그리고 여수어항단지와 돌산대교 등도 부지런히 싸돌아다녔다.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고 밤낮없이 여수항 부근에 나타나서 자꾸만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며 다니는 바람에 나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파출소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철저히 미쳐 있었다.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길에서 시를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홀로 쓴 시들을 모아 월간지와 계간지에 동시에 투고를 하였다. 월간지에서 먼저 발표하였다. 나는 그렇게 비로소 시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너무 몰랐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의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인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월간지 신인상 발표가 있은 뒤 계간지에서도 연락이 왔다. 계간지에도 신인상에 당선되었으나 이미 월간지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선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우리나라 문단 상황에 대하여 지금만큼만 알았다면 나는 아마 월간지가 아니고 계간지 신인상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시인만 되면 다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인만 되면 원고청탁이 줄을 이을 줄로 알고 있었다. 시인은 그저 시만 쓰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문단활동이나 인간관계가 따로 있지 않아도 그저 시인만 되면 무조건 시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처럼 지방에서 홀로 시만 쓰는 시인에게는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나는 시 쓰는 방법만 알았지 진짜 시인이 되는 길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실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문학사상에서는 상패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바뀌어서 상패도 주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는 상패도 없고 시상식도 따로 없었다. 그래도 문학사상 신인상은 문단에서 꽤 전통도 있고 권위가 있는 등용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그런 것들에 대하여 너무 모른 상태에서 그저 실망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신인상 정도로는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내야겠다,라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동안 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하고 당돌한 생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문단을 너무 몰랐고 몰라서 오히려 용감할 수 있었다.
나는 홀로 정리한 시집 원고를 가방에 넣고 문학사상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한국문단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문학사상 사무실에 가서 인사를 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는 그냥 나왔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서 시집 이야기는 한 마디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시집 이야기를 꺼냈다면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웃음이 나올 일인가. 신인상 당선되고 1년도 안된 놈이 불쑥 찾아와서 시집을 내달라고 떼를 쓴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으며 어깨가 축 처지고 있었다. 참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타자를 쳐서 나름대로 시집을 만들었는데 시집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모습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컴퓨터가 없는 시절이어서 타자기로 원고 정리를 하였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갔으면서도 정작 다른 일로 왔다가 잠시 들렀다고 둘러대는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기운이 빠져서 털레털레 길을 걷고 있는데 길가 가판대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신문에 신춘문예 응모 광고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신문을 1부 사서 여수로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질 원고였는데 차라리 신춘문예에 응모라도 해보자. 그래서 나는 시집 원고 표지만 바꾸어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게 되었다. 물론 기존에 발표한 몇 편의 시들은 당연히 빼고 보냈다.
아마도 신춘문예 사상 이런 응모자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심사평도 이례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해 동아일보에 응모했던 다른 분들께 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렇듯 생뚱맞게 응모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좋은 시인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분들의 심사평 한 줄 없었으니 내가 많이 야속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심사평 ― 두 심사위원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배진성 씨를 당선 시인으로 정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는 두 권 정도의 시집이 될 만한 작품을 투고하였다. 오히려 어려움은 이 많은 작품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 결국 ‘길이 있는 풍경’과 ‘밤하늘은 반란이다’ 두 편을 골랐지만, 이 선정은 필연성이 있는 것이라고 자부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는 것은 배진성 씨의 작품이,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매우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의 시는 오늘의 범람하고 몽롱하고 막연한 서정시나 비분강개의 시의 언어에 비하여 괄목할 만한 탄탄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오늘의 현실 ―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서정이나 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느낌과 판단에도 흐릿함이 있고 탄탄함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수가 많은 만큼 또 고른 수준의 것인 만큼 그의 시가 믿을 만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수준의 한계가 이미 다 드러나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수준이 가장 바람직한 폭과 깊이, 무엇보다도 오늘의 수다스러운 시세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상과 표현의 압축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심사위원 / 김우창, 신경림
나는 이렇게 우연히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그 덕분에 첫 시집을 빨리 낼 수 있게 되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으셨던 김우창 교수님께서 내가 응모했던 원고를 민음사로 넘기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김우창 교수님께서 민음사와 많은 관련이 있었던 탓에 그렇게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민음사와의 인연이 닿게 되었다. 글이나 시집은 따로 타고난 운명이 있는 듯했다. 나에게는 그렇게 우연히 좋은 인연이 많이 찾아왔지만 나는 그 좋은 인연들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다.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시를 쓰려면 먼저 대학교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좋은 제자들도 많이 길러내야만 비로소 시인으로 바로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학 교수가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출판시장과 문단풍토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대학교수가 꼭 좋은 시인은 아니지만 확실히 좋은 조건에서 시인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회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꼭 대학 교수가 아니어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고 또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발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독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학교수가 가장 확실하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우선 방송대학에 편입을 하였다. 우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내 몸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의 심장병이 나를 가만 놔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망은 30살까지 버티는 것이었는데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서른 살까지만 살 수 있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몸은 도저히 서른 살까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몰래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시집은 한 권 내었으니 덜 억울할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남몰래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을 만큼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전남대학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당장 수술을 받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하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치료비도 많이 저렴해졌으며 또한 심장재단 덕분에 심장수술 성공률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드디어 심장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고향 집에 들렀다. 고향 집에는 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젊은 시절 방앗간 천정에서 떨어진 이후로 후유증 때문에 언제나 아버지 등은 구들장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길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잘 아는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분께 돈을 드리며 내가 떠난 다음에 아버지께 개를 한 마리 잡아 드리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출장을 가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을 드리지 못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씀드리고 광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홀로 광주로 가서 전남대학교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심장판막 교체 수술을 하기 전에, 좀 더 간단한 시술을 먼저 한 번 해보자고 했다. 나의 대동맥판막이 지금 잘 열리지 않기 때문에 먼저 풍선 확장시술을 한 번 시도해 보자고 하였다. 그 당시에 막 개발되어 시험 중인 시술법이었다. 우리 인간들의 대동맥은 심장에서 시작하여 양쪽 허벅지 안쪽으로 지나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가장 굵은 대동맥이 바로 그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풍선 확장시술은 카테터라고 하는 관을 환자의 혈관 안에 삽입하여 주로 좁아진 혈관을 넓혀주는 시술인데, 이 시술 방법을 응용하여 심장 판막 확장에까지 이용하는 시술법이었다. 나의 경우는 왼쪽 사타구니 쪽에 구멍을 내어 대동맥을 따라 거꾸로 관을 집어넣어서 대동맥판막까지 접근하게 한다. 그 관 안에는 작은 풍선이 달려 있다. 대동맥판막은 세 개의 조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조각들이 열렸다가 닫혔다가를 반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열릴 때에 세 조각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덜 열리기 때문에, 붙어 있는 날개 안쪽을 강제로 더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대동맥판막 쪽에 풍선을 위치하게 한 다음, 그 풍선을 순간적으로 확 불어주면 자연스럽게 세 조각의 날개가 잘 분리되어 충분히 열어줄 수 있다는 원리였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내 심장병의 첫 번째 오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오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날 밤 나에게 벌어진 일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풍선 확장 시술을 받기 전날 밤에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이 다른 가족들에게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술받기 전날 밤에 주치의가 서류를 들고 찾아왔다. 풍선확장시술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광주에 사는 누나에게만 조심히 전화를 하였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나의 심장병에 관한 사실들을 누나에게만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시술 도중에 잘못되면 병원 측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자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가족들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 달라는 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곧 누나가 병원으로 달려왔고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께서도 병원으로 달려오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한 것으로 알고 달려오셨던 것이었다. 서울에 출장 가겠다고 떠난 자식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넘게 홀로 앓아오던 나의 심장병을 가족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큰 충격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시술 동의를 받고 다음날 무사히 풍선확장 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오진이었으니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며칠 후에 개복수술을 하여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하기로 하고 수술날짜를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여수 직장 동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와서 혈액검사를 하였다. 수술하는 날 직접 와서 피를 뽑아주겠다는 사람들이었다. 미리 뽑아놓은 피보다 그날 바로 뽑아서 수혈하면 더욱 좋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렇게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찾아온 동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와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다가 나보다 먼저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나와 같은 병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그런데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복실에서 그만 잘못되고 말았다. 마취가 풀리면서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그만 인공호흡기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곁에서 당직의사나 간호사가 착 달라붙어서 지켜보아야 하는데 그만 자리를 잠시 비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환자 곁에 아무도 없는 사이에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인공호흡기가 빠졌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만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전해 들은 그 환자의 가족들은 바로 다음날부터 병원 마당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말았다. 죽은 아들을 살려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하는 바람에 병원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그래서 수술을 담당했던 흉부외과 의사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다른 환자들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마침 그 병원에 먼 친척 되는 의사가 있었다. 그 의사 덕분에 나는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곁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나의 목숨을 허술한 그곳에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만약에 내가 그때 전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면 멀쩡한 대동맥판막을 떼어내고 인공판막으로 교체를 할 뻔했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병은 치료도 되지 않고 멀쩡한 대동맥판막만을 인공판막으로 바꿀 뻔하였다. 생각만 하여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정밀검사를 다시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의 대동맥판막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동맥판막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동맥판막 앞쪽에 혹이 하나 있어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피의 양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혹이 있어서 출구가 좁아진 환자는 많지 않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 환자들 대부분이 판막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진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많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비후성심근증’이라고 따로 정의를 내리고 치료법과 수술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전대병원에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나는 진료의뢰서를 가지고 서울대학병원에 접수를 하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나의 몸은 심각할 정도로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비밀이었던 나의 심장병이 가족들에게 들켜서 더욱 걱정이 되었다. 나의 예상대로 가족들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고 가족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나의 몸과 마음은 급속도로 더욱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무작정 회사에 휴가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떼를 써서 응급실로 입원을 하였다. 그때는 이미 잘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나를 수술할 의사 선생님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아주 젊은 의사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그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주 훌륭한 선생님 이셨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젊었지만 실력이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우연히 그렇게 좋은 의사를 만난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분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1990년 6월 8일에 1차 수술을 받았고 2017년 12월 22일에 2차 수술을 받았다. 2차 수술을 받을 때에도 우연히 한 번 찾아갔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수술날짜를 결정하고 바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의 몸은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으나 나는 모르고 있다가 참으로 운이 좋게도 그분을 다시 만나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나도 모르게 돌연사를 당할 뻔했었다. 그분은 나의 수술을 마지막으로 하시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야말로 그분은 그렇게 나의 하느님이 되셨다.
서울대학병원에 처음 입원해서 나는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걸리면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수술날짜가 뒤로 미루어졌다. 그 바람에 나는 더 많은 정밀검사를 할 수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심장판막증이 아니라 ‘대동맥판막하협착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수술방법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원래는 대동맥판막을 인공판막으로 교체할 예정이었으나 대동맥판막은 교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대동맥판막 아래쪽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것으로 완전히 수술방법이 바뀌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심장 수술이었다. 아마 그때 담당 선생님께서 젊기도 하고 패기도 있고 실력도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런 수술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좋은 의사를 만나서 판막을 교체하지 않고 심장 속에 있었던 혹 하나 떼어내는 수술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수술을 하고 나니 내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상쾌함이었고 가벼움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환자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사람들의 몸 상태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좋았다. 심장병은 수술은 어렵지만 수술이 끝나고 나면 바로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바로 내가 그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야말로 신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수술을 받고 약 한 달 동안 입원을 하였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여수로 내려가지 못하고 인천에서 지냈다. 장거리여행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에도 자주 가야 했고 또한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큰형 집에서 두 달 정도 누워서 지냈다. 2차 수술 때에는 의술이 발달해서 그런지 아니면 가슴을 봉합하는 재료가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개복한 부위를 봉합하는 획기적인 방법이 새로 도입되어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한결 쉬워졌음을 실감하였다. 1차 수술 후에는 꼬박 석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는데 이번 2차 수술 후에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나를 번쩍번쩍 들어서 침대를 옮겨주기도 하고 바로 걸어 다녀도 좋다고 하셔서 나는 깜짝 놀라고 어리둥절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술하고 일주일도 못되어 퇴원을 하라고 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도 바로 탈 수 있다고 하여 제주도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술이 그만큼 발전한 것인지 그동안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인지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당시 큰 형은 인하대 후문에 있는 새마을금고 2층에 살고 있었다. 형과 형수는 둘 다 직장에 나가고 나 혼자 방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아직 철이 덜 든 조카는 누워있는 나를 자꾸만 밟으려고 하여 마음 놓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6월 8일에 수술을 하였으니 그렇게 한 여름 3개월을 불안하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그렇게 심장병 수술에 성공하여 25년 만에 심장병과 이별을 하였다. 그런데 참 인생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심장병이 떠나고 나니 이번에는 간에 문제가 생겼다. 병원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아니면 형 집에서 전염이 된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형과 내가 비슷한 시기에 간염으로 고생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내가 병원에서 옮겨왔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에게 더욱 미안하다. 나는 그 후에 간경화로 진행되었고 인터페론 주사를 맞는 치료를 받아 완치가 되었는데 형은 치료가 되지 않아 결국 간 이식수술을 받게 되었으니 나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관리를 위하여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으로 발령을 받아서 인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율도에 있는 인천화력발전소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인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 인간에 대한 치명적인 절망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대부도와 황금산과 포도밭과 붉은여우와 사랑과 사기에 대하여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쓸 작정이다. 이 글에서는 다만 한 인간의 바닥을 보았고 나는 그 바닥에게 철저히 짓밟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만을 간단히 말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나는 나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했고 대학교수가 되려고 입학했던 대학원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끔찍한 살인을 꿈꾸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나에게는 시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시는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영원히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절망 속에서 허구렁 속을 헤매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해 준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인간의 운명이란 그렇게 한 통의 전화로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교 1년 후배였다. 내가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나를 많이 도와준 서클 후배이기도 했다. 우리는 절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며 연등을 만들기도 했고 시낭송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선배인 나에게 명동에서 자주 돈가스를 사주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와 나는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학교로 전화를 했다고 하였다. 학교에는 마침 함민복 시인이 놀러 왔다가 그 전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함민복 시인은 고등학교는 나의 선배지만 대학은 나의 1년 후배였다. 그러니까 함민복 시인과 그는 동기동창인 것이었다. 마침 함민복 시인이 내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기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렵게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그 당시 안산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인형가게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벼랑 끝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서로 인천과 안산을 오고 갔으며 멀리 강릉 바다에까지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나의 운명이 다시 한번 심하게 운전대를 꺾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때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운명은 지금과는 참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