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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n 08. 2023

너에게 나를 보낸다 09




너에게 나를 보낸다 09


이어도공화국에 수국과 산수국이 한창이다

반월산에서 내려오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생전에 못다하신 은밀한 사랑을 나누시는지

밤새 소곤소곤 정다운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도 저렇게 밤새 등을 긁어주면 좋겠다







산수국에서 수국으로 이사가는 날




부모님 계시는 반월산에 밤꽃이 피어나고

제주도 길가에 구실잣밤나무꽃이 피어나고

이어도공화국에는 지금 수국꽃이 한창이다     


비는 어쩌면 하느님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비는 어쩌면 하느님의 사랑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비는 아마도 하늘일 것이다. 비는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비를 좋아하는 반월산의 밤나무와 비를 좋아하는 제주도의 구실잣밤나무와 비를 좋아하는 이어도공화국의 수국을 생각한다. 다시 한번 생각하니 밤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만나 자식을 낳는데 수국은 씨앗을 낳을 수 없으니 어쩌면 속으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날 아버지의 몸을 떠나고 싶었다. 밖에서 비는 오는데 자꾸만 아버지의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도 함께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바깥세상이 천 길 낭떠러지일지라도 나는 그냥 무작정 탈출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몸이 너무 뜨거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다 탈출할 기회를 놓치면 나는 그냥 그곳에서 타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불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무작정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를 닮은 수 없이 많은 놈들이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번개가 번쩍 하더니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토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오는 날이었다. 토성은 약 9.7Km/s의 속도로 공전을 하는데, 이는 지구 시간으로 대략 29.6년이나 걸린다. 그러니까 토성은 약 30년에 한 번씩 지구에 가깝게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아버지 몸에서 탈출한 그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토성에서도 나를 닮은 놈들이 번쩍 뛰어내렸다.     


나는 무작정 뛰었다.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나는 살기 위해서 무작정 뛰어야만 했다. 그렇게 무작정 뛰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땀을 흘리며 뛰었다. 그야말로 죽도록 뛰었다. 뛰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하여 뛰고 또 뛰었다. 머리끝에서 꼬리 끝까지 온몸을 흔들며 뛰고 또 뛰었다.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헤엄을 친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를 저어서 배가 간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왔다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뛰고 또 뛰었다. 눈을 감고 뛰다 보니 내가 아버지 몸에서 탈출한 것인지 토성에서 뛰어내린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였다.

     

내가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에 드디어 문이 열렸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그만 내 이마가 벽에 부딪쳤는데 짠 하고 문이 열렸다. 벽이 문이 되는 순간이었다. 벽이 글쎄 문이 되어 열리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환하게 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나와 동시에 또 하나의 내가 함께 도착한 것이었다. 나팔 모양의 길 끝에서 나팔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났다. 내가 아버지 몸에서 뛰쳐나온 놈인지, 토성에서 뛰어내린 놈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하여튼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부터 어머니의 궁전 안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만난 어머니는 1937년 5월 27일에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1931년 3월 26일 태어나셨으니 아버지보다 6년 늦게 태어나신 것이다. 그런 어머니 같은 수국 꽃이 지금 한창 이어도공화국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어도공화국은 삶과 죽음의 중간쯤에 있는 나라인데 나는 지금 많은 국민들과 함께 이어도공화국에서 살고 있다. 수국 꽃이 올해는 보라색으로 파마를 하고 있다. 어머니께서 곧 보라색으로 파마를 하시고 보라색 꽃 브로치를 하고 환하게 오실 것만 같다. 나는 그렇게 지금도 중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슬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이슬 한 방울을 본다

안개 한 방울을 본다

구름 한 방울을 본다  

   

태초에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사람은 흙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바람에서 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불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먼지에서 왔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없음에서 왔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씀에서 왔다고 말한다. 나는 이슬 한 방울을 보면서 물을 생각한다. 나는 태초의 사람은 몰라도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나는 아직 바다 이전의 나를 기억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바다에서 출발한 나를 기억할 뿐이다. 나는 멀고도 먼 여행을 통하여 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나는 아버지가 약을 드시다가 흘려버린 물방울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이 지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눈물 한 방울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니,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 속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물방울 하나에서 출발하여 눈물방울 하나로 마무리를 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 지상을 떠나 또 다른 세상에 태어나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나무속에서 나온 눈물인 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땅 속에서 뿌리를 타고 올라와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줄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풀잎 속에서 나온 영혼인 줄 알았다. 처음에 나는 이슬방울이 풀잎의 맑은 눈인 줄 알았다. 이슬방울 속에 들어있는 나를 보여주려고 나를 찾아온 만화경인 줄 알았다. 이슬방울이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들이 응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도 나는 나의 숨결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방울이 안개방울이랑 구름방울과 같은 식구임을 알아버린 지금도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물방울 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또한 토성에서 날아온 먼지 하나에서 태어났다. 먼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리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의 자궁경부를 무사히 통과하고 수많은 백혈구들의 공격을 피해 양 갈래길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무작정 달려가 나팔관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바로 그때 번쩍, 하고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에 나는 나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비추는 번개 같은 한 줄기 빛이었고 천둥소리 같은 말씀이었다. 그렇게 나는 너를 만났다. 그렇게 나는 난소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을 너를 만났다. 우리는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서 38주 266일 동안의 긴 여행을 함께 떠났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황홀한 여행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흔히 삶이라고 말하는 이 지상의 여행은 그렇게 문득,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저 세상으로의 여행 또한 그렇게 시나브로,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슬 한 방울에서 눈물 한 방울을 본다. 눈물 한 방울에서 이슬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이슬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이슬 한 방울이 된다. 나는 그렇게 눈물 한 방울을 본다. 나는 그렇게 눈물 한 방울이 된다. 나는 그렇게 나를 보고 나는 그렇게 너를 본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보고 또 다른 너를 본다. 우리는 그렇게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이슬과 취우는 어떻게 다른가




취우(翠雨)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

취우(醉友) 술에 잔뜩 취한 친구

취우(驟雨) 소나기와 같은 말 


이슬과 취우는 같다고도 할 수 있고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슬과 취우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이슬은 그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고 취우는 먼 곳에서 온 것이다. 나는 이슬도 좋고 취우도 좋다. 취우라는 말은 세 가지의 뜻을 품고 있다. 한자로 쓰면 다르지만 우리말로는 그냥 '취우'라고 쓴다. 취우(翠雨)와 취우(醉友)와 취우(驟雨)는 다른 말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하면 같은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연꽃도 좋아하고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주로 토란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하였는데 요즘에는 연잎으로 물방울 놀이를 자주 한다. 연잎은 물에서도 물에 젖지 않는다. 연잎은 아무리 오래 물방울과 함께 놀아도 물방울에 젖지 않는다. 나는 그런 연잎이 좋다. 연잎에서 함께 놀 수 있는 물방울도 참 좋다. 그 연잎의 물방울 속에서 물방울과 함께 살고 있는 나의 모습도 참 좋다.


취우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늘에서 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빗방울의 크기는 지름 0.5∼5㎜로서 보통 1∼2㎜ 정도이고, 소나기의 경우에는 2∼7㎜ 정도가 된다. 빗방울이 매우 큰 경우에는 낙하 도중에 작게 갈라져 버리고, 0.5㎜ 이하인 경우에는 낙하속도가 매우 느려져 마치 안개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안개비를 형성한다.


구름을 형성하는 물방울의 크기는 지름이 0.004∼0.02㎜ 정도의 대단히 작은 것이며, 부력 때문에 작은 구름물방울이 그대로 떨어져 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름물방울들이 서로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어야 하므로 10만∼100만 개 정도의 구름물방울이 합쳐져 비로소 1개의 빗방울이 형성되는 셈이다.


살아있는 식물들은 대부분 비를 참 좋아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대부분 비를 피하는 경향이 많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동물들도 많지만 비에 젖지 않기 위하여 피하는 동물들이 많다. 그중에는 사람들도 있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는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의 양식이지만 직접 몸에 맞고 몸으로 젖는 것을 싫어하는 동물들이 많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잠시 피했다가 더 많은 물방울들이 뭉쳐져 있는 샘물이나 강물을 맛있게 마시는 동물들도 많다.  


태반처럼 둥근 연잎에서 물방울 놀이를 하며 생각한다. 우리들의 삶이란 어쩌면 연잎 위에서 뒹구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어쩌면 신들이 좋아하는 물방울 놀이인지도 모른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만나고 물방울이 물방울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쪼개지기도 하고 다시 합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물방울은 결코 물방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태반과 탯줄을 보면 꼭 연을 닮았다. 연잎에는 숨구멍이 뚜렷하다. 그 숨구멍을 따라가면 비로소 내가 보인다. 이제 막 자궁벽에 착상된 배아가 보인다. 작은 씨앗 모양의 나는 이제 콩깍지 모양이 될 것이고 등 굽은 태아로 성장할 것이다. 연잎 아래서 연근이 자라나 듯 나도 그렇게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양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수의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작은 물방울로 태어나서 시작한 내 삶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태아가 양수를 마시듯 물방울이 물방울을 마시며 자란 따뜻한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어도공화국 연못에 비가 내린다. 연잎에 비가 내려앉는다. 연잎 끝에 취우가 맺히고 나는 그 취우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물방울 속의 나는 물방울 밖의 나를 보고 웃는다. 물방울 밖의 나는 물방울 안의 나를 보고 살짝 윙크를 한다. 태반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연잎 밖에서 물방울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태반의 뿌리에서 꽃으로 피어날 것이고 나는 연근의 뿌리에서 연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들의 숨소리가 취우 속에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될 것이다. 이슬처럼 시작될 것이다. 취우처럼 시작될 것이다. 푸른 나뭇잎에 빗방울이 맺히듯 시작될 것이다. 가끔은 소낙비처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에 완전히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언제나 늘 어딘가에 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비에 취하고 하늘에 취하고 너에게 취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에게 취하면서 취우가 되고 사랑이 되고 하늘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들은 푸른 나뭇잎에서 함께 뛰어내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이 함께 껴안고 떨어지는 그곳이 바로 어쩌면 우리들 사랑의 옹달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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