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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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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ul 11. 2023

정방폭포 2

― 아침에 심고 저녁에 듣는다




정방폭포 2

 ― 아침에 심고 저녁에 듣는다 



  

아침에 씨앗을 뿌리고 저녁에 본다

아침에 잃어버린 마을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정방폭포 물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스완송을 듣는다

정방폭포를 오래도록 바라보니

세상이 온통 정방폭포로 보인다

정방폭포 아래서 빙의가 되어

술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제주도 심방들은 작두를 타지 않지만

정방폭포 아래서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뛰어오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광리에서도 정방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연자방아에서 물빛이 반짝이며 부서진다

무등이왓, 삼밧구석, 조수궤, 간장리, 사장밧

정방폭포 물소리가 바람으로 이름을 부른다

대학생 손녀딸이 울면서 편지를 읽는다 

김연옥 할머니가 울면서 어머니를 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남동생

정방폭포에서 바다에 던져졌던 이름을 부른다

평생 생선을 먹지 않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너븐숭이 옴팡밭에서 온 순이 삼촌도 울고

온몸에 바느질 자국 선명한 선인장마을에서 온

무명천 할머니도 운다 아, 울음의 절창이다

동광리에서는 김연옥 할머니와 홍춘호 할머니가

더 가깝다 할머니 얼굴에 나의 어머니가 있다

1937년 5월 27일에 태어나신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어 길에서 몸빼바지에 오줌을 싼다

김연옥 할머니와 홍춘호 할머니와 이달막 할머니가 있다

나는 언제나 김달삼보다 할머니들이 더 좋다 

나는 언제나 이덕구보다 어머니들이 더 좋다

성출반대 청년들보다 폭낭 아래 모인 할망들이 더 좋다

오름마다 피어오른 횃불보다 아기 숨소리가 더 좋다

순이 삼촌을 따라 북촌리로 가지 않고 문학관으로 간다

순이 삼촌을 낳으신 순이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들린다

동광리에서 따라온 3이 4층으로 올라간다

정방폭포 물소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4보다는 역시 3인 먼저다

사(死)보다는 역시 삶이 먼저다

<제주도우다>를 낳으셨다 안창세를 낳으셨다

스완송이라고 말씀하셨다 백조의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48년 겨울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사삼은 어두운 방 속의 코끼리라고 말씀하셨다

희생담론에서 항쟁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3만 명의 희생은 3만 개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삼을 마무리하고 자연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항쟁할 수밖에 없었던 항쟁 이유의 탐구서라고 말씀하셨다

공동체의 싸움이라고 말씀하셨다

공동체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무정부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종합편이라고 말씀하셨다

조천에서 사삼을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죽은 자를 노래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생존희생자를 증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사삼은 미체험세대가 계승하여

보편화와 세계화를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년필의 대물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접신한 시인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푸른 대나무를 흔들며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사삼은 드라마 50부작 정도는 만들어져야만

감이 좀 잡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900년 전에 고려에 복속되면서 

탐라국은 식민지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용천수처럼 제주도 사람들 마음속으로 흐르는 

공동체주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게 흐르는 물소리가 훤히 보인다

지나친 슬픔은 너무나 아프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3.1절 발포사건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무자년 겨울의 초토화 작전이라 말한다

4월 3일을 너무 전면에 내세우면 

피해자가 바뀌는 착시현상을 낳는다

우익세력의 공격을 피하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4.3 항쟁은 어쩔 수 없는 무장봉기가 분명하다

냉정한 정세 판단과 전략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용천수처럼 보이지 않게 흐르는 거대한 강이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살아온 공동체 정신이 있다

제주도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엘리베이터가 정방폭포가 되어 다시 내려간다 

정방폭포의 세 줄기 물소리가 엘리베이터 속에서 들린다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폭포로 떨어지고 있다


20230711 - 1차 수정




정방폭포 2

 ― 아침에 심고 저녁에 듣는다




아침에 씨앗을 뿌리고 저녁에 본다

아침에 잃어버린 마을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정방폭포 물소리를 듣는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스와니송을 듣는다

정방폭포를 오래도록 바라보니

세상이 온통 정방폭포로 보인다

정방폭포 아래서 빙의가 되어

술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정방폭포 아래서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쉬지 않고 뛰어오르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동광리에서도 정방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연자방아에서 물빛이 반짝이며 부서진다

무등이왓, 삼밧구석, 조수궤, 간장리, 사장밧

정방폭포 물소리가 바람으로 이름을 부른다

대학생 손녀딸이 울면서 편지를 읽는다 

김연옥 할머니가 울면서 어머니를 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남동생

정방폭포에서 바다에 던져졌던 이름을 부른다

평생 생선을 먹지 않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너븐숭이 옴팡밭에서 온 순이 삼촌도 울고

온몸에 바느질 자국 선명한 선인장마을에서 온

무명천 할머니도 운다 울음의 절창이다

동광리에서는 김연옥 할머니와 홍춘호 할머니가

더 가깝다 할머니 얼굴에 나의 어머니가 있다

1937년 5월 27일에 태어나신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어 길에서 몸빼바지에 오줌을 싼다

김연옥 할머니와 홍춘호 할머니와 이달막 할머니가 있다

나는 언제나 김달삼보다 할머니들이 더 좋다 

나는 언제나 이덕구보다 어머니들이 더 좋다

성출반대 청년들보다 폭낭 아래 모인 할망들이 더 좋다

오름마다 피어오른 횃불보다 아기 숨소리가 더 좋다

순이 삼촌을 따라 북촌리로 가지 않고 문학관으로 간다

순이 삼촌을 낳으신 순이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들린다

동광리에서 따라온 3이 4층으로 올라간다

정방폭포 물소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4보다는 역시 3인 먼저다

사(死)보다는 역시 삶이 먼저다

<제주도우다>를 낳으셨다 안창세를 낳으셨다

스완송이라고 말씀하셨다 백조의 노래라고 말씀하셨다

<48년 겨울은 눈이 참 많이 내렸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사삼은 어두운 방 속의 코끼리라고 말씀하셨다

희생담론에서 항쟁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3만 명의 희생은 3만 개의 사건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삼을 마무리하고 자연을 노래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항쟁할 수밖에 없었던 항쟁 이유의 탐구서라고 말씀하셨다

공동체의 싸움이라고 말씀하셨다

공동체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무정부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종합편이라고 말씀하셨다

조천에서 사삼을 배웠다고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죽은 자를 노래하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생존희생자를 증언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사삼은 미체험세대가 계승하여

보편화와 세계화를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년필의 대물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접신한 시인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푸른 대나무를 흔들며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사삼은 드라마 50부작 정도는 만들어져야만

감이 좀 잡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900년 전에 고려에 복속되면서

탐라국은 식민지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용천수처럼 제주도 사람들 마음속으로 흐르는 

공동체주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렇게 흐르는 물소리가 훤히 보인다

지나친 슬픔은 너무나 아프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3.1절 발포사건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직도 4.3이라 말하지 않고

무자년 겨울의 초토화작전이라 말한다

4월 3일을 너무 전면에 내세우면

피해자가 바뀌는 착시현상을 낳는다

우익세력의 공격을 피하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4.3 항쟁은 어쩔 수 없는 무장봉기가 분명하다

냉정한 정세 판단과 전략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제주도에는 강이 없다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용천수처럼 보이지 않게 흐르는 거대한 강이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살아온 공동체 정신이 있다

제주도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제주도는 이제 작은 섬나라가 아니다

제주도와 제주도 사람들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면

해원과 상생을 품고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평화의 심장이 될 것이다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도 작가들의 할 일이 참 많다

엘리베이터가 정방폭포가 되어 다시 내려간다 

정방폭포의 세 줄기 물소리가 엘리베이터 속에서 들린다 

나는 지금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폭포로 떨어지고 있다










* 김연옥 할머니 이야기


"1948년 일곱살이었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불타는 마을을 떠나 매일 밤마다 이 굴 저 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터라 맨발이 참 시렸습니다. 끝내 잡혀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 수용소였습니다. 주먹밥을 하나 먹었을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랑 애기였던 남동생까지 군인들이 다 끌고 나갔는데, 마지막 끌려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발로 밟히고 몽둥이에 맞는 걸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요. 순간 누군가가 확 잡아챘고, 아이는 그만 돌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깨어나 살아남은 그 아이의 이름은 김·연·옥.입니다."


일순간 추념식장은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는 4.3 추념식장을 찾은 모든 이들의 눈과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유족이든 아니든, 제주도민이든 아니든, 귀가 열려 있고 심장이 뛰고 있기에 흘린 눈물이었다.


제주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일곱살이던 아이는 이제 일흔 여덟.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됐다. 손녀 정향신씨가 전한 '4.3 광풍'에 의한 김연옥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통한의 세월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었고, 제대로 글을 배울 기회도 잃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았어요.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셨더라고요. 세뱃돈 봉투에 제 이름 정향신 세 글자를 써 주셨던 2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할머니 머리에 애기주먹만한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데요. 그게 4.3 후유장애였다는 것도 작년 4월에야 알았어요. 심지어 10살 때까지 신발 한 번 못 신어본 고아였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요."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죠.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하루 아침에,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당시 할머니는 고작 8살이었는데..."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선을 드시지 않는 이유를 전할 때는 자신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남은 4.3희생자 유족들이 4.3 트라우마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물고기를 안 드세요.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가 물고기에 다 뜯겨 먹혔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참으면서 멸치 하나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죠. 할머니의 바다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너무 미안해요, 할머니. 할머니 삶에 그런 끔찍한 시간이 있었고 멋쟁이 할머니가 그런 아픔에서 살고 계셨는지 몰랐어요."


손녀가 대신한 김연옥 할머니의 말도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지금도 바닷물 잘락잘락 들이쳐 가민 어멍이영 아방이 '우리 연옥아' 하멍 두 팔 벌령 나한테 오는거 닮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령 바다로 들어갈뻔 해져..." (나는 지금도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연옥아' 하면서 두 팔 벌리고 나한테 오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려서 바다로 들어갈뻔 하지)


고아가 된 이후 10대의 시간을 대구와 부산, 서울에서 고생고생하다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왔을 때는 열여덟살. 김연옥 할머니는 이후 시신 하나 없는 '헛묘'를 조성해 여태껏 매년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향신씨는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 이제는 자식들에게 못해준 게 많다고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묵묵히 견뎌온 멋진 사람이에요. 할머니, 저랑 약속해요. 이제는 매일 웃기로."


연단 맞은편 객석에서 손녀의 이야기 내내 그치지 않는 눈물이 앞을 가리던 김연옥 할머니는 통곡의 울음과 함께 허공을 향해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평화대공원을 내려다보던 하늘도 함께 오열했다.



* 홍춘호 할머니 이야기


4월. 봄의 문턱을 훌쩍 넘어 겨우내 움츠렸던 몸도 마음도 따뜻한 봄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제주도는 참혹한 슬픈 4월을 맞이하는 달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년이 훌쩍 넘었다.


4·3해설사 홍춘호 할머니,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송두환)는 세계인권선언 73주년이던 지난 2021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을 개최했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은 1948년 12월 10일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뜻과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날이다. 이날 기념식에선 모두 10명(홍조근정훈장 1명, 대통령 표창 1명, 국가인권위원장 표창 개인 부문 3명, 단체 부문 5개 등)이 ‘2021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했다.


함께 개인 부문에 포함돼 표창을 받은 홍춘호(85․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씨는 4·3 생존자다. 제주특별자치도 소속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생생한 증언을 통해 4·3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4·3 당시 11살이었던 그는 마을을 불태운 토벌대로 인해 집과 동생들을 잃고 동광리 ‘큰넓궤’ 안에서 50여 일을 숨죽여 지내야 했던 아픔이 있다.


“나이 들어 이제 것은 기억이 잘 안 나. 어제 일도 가물가물해. 그런데 그 옛날 일은 기억이 아주 생생해. 그때 숨었던 데도 다 알아. 그땐 몰랐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 당시 아방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나.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더 또렷해져.”


11살,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었다. 그저 무서웠고 배고팠고 추웠고,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지듯 또렷하다.


- 축하드립니다. 포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서 상을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4·3사건 때 죽었으면 가보지 못했을 건데, 고생하면서 추울 때 몇 번 넘어지면서 지금껏 오래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상도 다 받는구나 싶었지. 상 받았을 때 아주 행복했어. 4·3에 대한 것, 나 어렸을 때 겪은 얘기, 나 살아온 얘기 전하면서 4·3에 대해 많이 활동하며 사니 그것이 노력한 대가로 이런 상을 줬는가 싶어.”


- 고향이 어디 신가요?


“무등이왓. 지금 4·3 학살 터 있는 데 우리 집이 있었지.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야. 말방에(연자매)가 5개나 있을 정도로 동네가 컸어. 최초 학살 터와 잠복 학살 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해설할 때나 촬영할 때나 그곳에 가게 되지.”


사람들은 예부터 마ᆞ갈방에 수로 마을 규모를 짐작했다. 무등이왓에는 총 5개의 마ᆞ갈방에가 있었을 만큼 마을이 컸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기 전날까지도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ᆞ갈방에 터로 나와 서로 감저(고구마) 범벅을 나눠 먹으면서 곡식을 갈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 해설사 활동은 언제, 어떻게 하게 됐나요?


“80세 될 때 시작한 것 같아. 4·3 70주년 때부터이니 지금 5년 됐지. 그때 4·3을 겪었거나 아는 사람은 있긴 있어도 몸이 아프기도 하고 세월이 지나 세상을 많이 떠나기도 했어. 무등이왓에서 크고 4·3 겪은 일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나보고 해설사 하라고 하더라고. 11살 때 그 무서운 일 겪고, 시골에 사니 뭐 학교도 몇 달 다니다가 4·3 나니까 못 다니고. 내가 뭘 배우질 못했어. 근데, 내가 겪은 것을 이야기만 해도 된다 하니 그때부터 해설을 시작했지.”


- 어르신이 겪으신 4·3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때 내 나이가 11살이었어. 11월부터 3월까지 숨어 살았지. 굴속, 숲속. 곶자왈에서만 5개월 동안 겨울을 지나 봄이 나도록 살았지. 처음 숨어 들어갈 때 남동생 3명, 어머니, 아버지, 나하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사촌 언니 이렇게 7식구가 숨었지. 모여 있으면 한 번에 죽을까 봐 흩어져서 숨어 있었어. 그 추운 겨울 산속에서 숨어 지내니 먹을 것이 있나. 감기 걸리고 굶고 해서 동생이 3명이나 죽었지.


토벌대가 와서는 눈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 죽여버려. 짐승이라도 목숨이 달려있으면 다 죽였지. 처음에는 총으로 쏘다가 나중에는 죽창으로만 찔러 죽였어. 죽창으로 죽이니 빨리 안 죽으니까 나중에는 불로 태워 죽였지.


아버지가 우리 식구들을 원물오름에 숨겨 놓고는 망을 보고 그랬어. 아버지 올 때까지 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숨어 있었지. 새소리만 퍼드득 나도 겁이 나. 총소리가 팡팡 나고. 총소리가 멀리 들리고 해가 서쪽으로 지는 걸 보면 그날은 살아진 거라.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오늘은 누가 죽었져, 누가 죽었져 그런 이야기를 해. 동네 사람 누구는 죽었는데, 우리는 살아졌다고 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날 하루 살아진 게 제일 좋은 거였지.


날이 어두워지면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왔어. 그런데 그날은 어두워도 아버지가 오질 않아. 어머니가 ‘너네 아방은 오늘 오지 않아. 죽은 상이여’ 했지. 숨어 살던 뒷빌레 굴에 와보니까 불이 막 와랑와랑해. 굴속에서 우리 먹을 곡식이여 이불이여 감춰놓은 것을 토벌대가 다 꺼내서 불태워버렸지. 그때 우리 아버지가 와서 ‘너넨 살아졌구나’ 하더라고. 뒷빌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우리만 살았지.


갈 데도 없고 겨울이고 추우니 큰넓궤에 피신했어. 거기엔 이미 삼밧구석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지. 애기들도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는 아주 좁은 데로 지나 굴 안쪽으로 들어갔어.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와. 동광 사람들이 거기서 그렇게 살았어. 억새를 깔고 자기도 하고 억새에 불붙여서 그 불씨로 길 보며 살았지. 굴 밖에서 범벅 만들어다가 헝겊에 싸 들고 와서 먹고살았는데, 범벅만 먹으니 더 목이 말라. 굴 안에서 돌 틈에 떨어지는 물을 입대며 빨아먹고 살았지. 그렇게 그 굴 안에서 4, 50일을 살았어.”


밤인데 대낮처럼 아주 환했어, 굴 밖은.

하늘이 그렇게 한번 보고 싶었어.


“그러다 토벌대가 잠복해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을 잡아다가 굴을 알아낸 거라. 토벌대가 못 들어오게 그 좁은 목에다 불을 피웠지. 고추와 지푸라기 등을 태우니 연기가 매워서 토벌대가 들어오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사람들이 못 나오게 돌로 입구를 막았어. 망 보던 청년들이 토벌대가 내려가고 나서 돌을 치워주며 빨리 어디든 나가서 살라고 이제 굴속에 있으면 죽는다 했지. 굴 밖으로 나온 것이 밤이었는데, 아주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는 거라. 얼마나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그 하늘이 그렇게 한번 보고 싶었어. 그렇게 다른 피신 장소를 찾아 나섰어. 삼밧구석 사람들은 볼레오름 쪽으로, 우리 무등이왓 사람들은 미오름으로 피신했어. 토벌대가 못 찾게 하려고 사람들이 막 나무를 쓸멍 올라갔어. 바람 불고하니 흔적이 없어서 토벌대가 우리를 찾지 못했지. 그때 삼밧구석 사람들은 다 잡혀가서 죽었어.


그리고 다음 해 3월쯤 미오름에서 살다가 토벌대가 ‘산에서 내려와서 자수하면 살려 주겠다’ 해서 내려갔지. 덕수 토벌대에게 끌려가서 갇혀 살다가 화순지서로 끌려갔어. 방이 두 개였는데 굴같이 깜깜한 방에는 청년들을 가둬놨어. 어느 날부터 옆방 사람들이 안 보여. 다 죽었나 봐. 어느 날 우리를 작은 배에다 실어. 우리는 ‘바당에 우리를 죽여 버릴 거’라 생각하고 모두 손 잡고 울며 갔지. 죽어도 함께 죽자고. 그런데 서귀포 천지연 폭포 밑에 항구에서 내렸어. 거기가 단추공장이야. 민간인수용소였지. 우리 남제주군 사람들은 다 거기 모여져 있어. 괸당인 사람들은 면회도 가고 하더라고. 그때가 4월 초였는데, 시멘트 바닥에 그냥 누워 자고 보리 찐 밥으로 밥을 줘. 어른들은 한 접, 두 접 먹어버리면 없지. 밥알 하나 떨어지면 옆에 아이가 주워 먹고, 그럼 내 밥 주워 먹었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지.


12살 될 때 민간인수용소를 지키던 순경 집에 애기업개로 갔어. 어린 내가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가 나를 보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단추공장에 갇혀있었어. 순경 색시가 좋은 사람이었어. 낭푼이로 밥을 해다가 어머니 갖다주라 했지. 그렇게 몇 개월 살다가 어머니 아버지가 단추공장에서 풀려나고 우리는 화순으로 가서 살았어.


그런데 폭도 새끼라 하면서 방도 안 빌려줘.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지도 못했어. 산에서 피신 다니면서 그때 남동생 3명 다 잃고, 나 14살 때 어머니 아버지가 갓난애를 낳았지. 어머니 38살, 아버지는 41살이었는데. 남동생을 5월에 낳고, 아버지가 8월에 돌아가셨어. 병원도 한 번 못 가고 이불도 한 번 덮지 못하고 입은 옷 그냥 그대로 짚에 싸서 그렇게 아버지를 묻었지.


그때부터 아주 기가 막히게 살았지. 사는 게 사는 거주. 남동생 9살 될 때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때 내가 23살로 동광에 시집올 때였지.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밭매다 울고 장독대에 숨어 울고 몇 해를 울면서 살았어. 내가 우리 아기들 아픈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동생 아픈 것은 어찌 못하니 동생 아프지 말고 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지.”


내 삶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래서 나 마음이 아주 좋아.

정신이 흐리지 않으면 계속 해설을 하고 싶어. 나를 원한다면.


- 해설사로 활동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왔어. 제주도 해녀와 4·3 이야기를 촬영해서 자기들 고향 가서 드라마 한다며 통역자랑 왔어. 그리고 강정 성당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었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도 듣고 놀랐어. 그 사람들은 진실한 사과를 바란다고 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못했으면 진실로 사과하고, 또 4·3 겪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을 했으면 좋겠어.


- 4·3해설사 활동이 어르신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내 아이들한테도 4·3 이야기는 안 해보고 살았어. 해설하면서 이야기하고 살기 시작했지. 농사짓는 것보다 아픈 이야기라도 이렇게 해설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좋아. 기억하기 싫은 4·3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 젊은 사람들한테 많이 알리고 싶어. 해설하면서 학생들한테 큰넓궤에 들어가 보라 해. 1분만 있어 보라고. 그럼 아이들이 나를 막 안아. 우리는 1분도 못 견디겠는데 할머니는 그렇게 어릴 때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았냐고. 사람들이 공감해주면 위로가 많이 돼. 그런 맛에 해설사도 계속하고 싶어. 이젠 귀먹어 말을 잘 못 들어. 목청도 막 커져 버리고. 그래도 정신이 흐리지 않고 이 정신이 그냥 있으면 계속 해설을 하고 싶어. 나를 원한다면.”


- 이렇게 인터뷰를 하시게 됐는데,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 나라에서 알아주면 좋겠어. 우리 4·3을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말아. 특히 제주 사람은. 외국 사람도 4·3을 아는 사람이 많아. 외국에 가면 내 사진도 붙어 있어. 미국에도 갔다 왔지. 내 삶의 이야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래서 마음이 다 좋아. 지금은 너무 행복해. 동생이 그래. ‘옛날에 그 고생 있으니 이만큼 살았수다’ 하고.”


우리는 늘 과거와 함께 살아간다. 역사를 바르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https://youtu.be/6WKXsWsmEz0

https://youtu.be/kuKjdTiluuc



우리는 늘 과거와 함께 살아간다_4·3해설사 홍춘호 할머니

· 작성자 : 공보실      ·작성일 : 2022-04-21 15:10:56      ·조회수 : 1,256     




4월. 봄의 문턱을 훌쩍 넘어 겨우내 움츠렸던 몸도 마음도 따뜻한 봄의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제주도는 참혹한 슬픈 4월을 맞이하는 달이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년이 훌쩍 넘었다.


4·3해설사 홍춘호 할머니,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송두환)는 세계인권선언 73주년이던 지난 2021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을 개최했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은 1948년 12월 10일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뜻과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날이다. 이날 기념식에선 모두 10명(홍조근정훈장 1명, 대통령 표창 1명, 국가인권위원장 표창 개인 부문 3명, 단체 부문 5개 등)이 ‘2021년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했다.


함께 개인 부문에 포함돼 표창을 받은 홍춘호(85․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씨는 4·3 생존자다. 제주특별자치도 소속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며 생생한 증언을 통해 4·3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4·3 당시 11살이었던 그는 마을을 불태운 토벌대로 인해 집과 동생들을 잃고 동광리 ‘큰넓궤’ 안에서 50여 일을 숨죽여 지내야 했던 아픔이 있다.


“나이 들어 이제 것은 기억이 잘 안 나. 어제 일도 가물가물해. 그런데 그 옛날 일은 기억이 아주 생생해. 그때 숨었던 데도 다 알아. 그땐 몰랐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 당시 아방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나.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더 또렷해져.”


11살, 밑으로 남동생이 셋이었다. 그저 무서웠고 배고팠고 추웠고,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지듯 또렷하다.


- 축하드립니다. 포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가서 상을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4·3사건 때 죽었으면 가보지 못했을 건데, 고생하면서 추울 때 몇 번 넘어지면서 지금껏 오래오래 살다 보니까 이런 상도 다 받는구나 싶었지. 상 받았을 때 아주 행복했어. 4·3에 대한 것, 나 어렸을 때 겪은 얘기, 나 살아온 얘기 전하면서 4·3에 대해 많이 활동하며 사니 그것이 노력한 대가로 이런 상을 줬는가 싶어.”


- 고향이 어디 신가요?


“무등이왓. 지금 4·3 학살 터 있는 데 우리 집이 있었지.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야. 마ᆞ갈방에(연자매)가 5개나 있을 정도로 동네가 컸어. 최초 학살 터와 잠복 학살 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해설할 때나 촬영할 때나 그곳에 가게 되지.”


사람들은 예부터 마ᆞ갈방에 수로 마을 규모를 짐작했다. 무등이왓에는 총 5개의 마ᆞ갈방에가 있었을 만큼 마을이 컸다.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기 전날까지도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마ᆞ갈방에 터로 나와 서로 감저(고구마) 범벅을 나눠 먹으면서 곡식을 갈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 해설사 활동은 언제, 어떻게 하게 됐나요?


“80세 될 때 시작한 것 같아. 4·3 70주년 때부터이니 지금 5년 됐지. 그때 4·3을 겪었거나 아는 사람은 있긴 있어도 몸이 아프기도 하고 세월이 지나 세상을 많이 떠나기도 했어. 무등이왓에서 크고 4·3 겪은 일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나보고 해설사 하라고 하더라고. 11살 때 그 무서운 일 겪고, 시골에 사니 뭐 학교도 몇 달 다니다가 4·3 나니까 못 다니고. 내가 뭘 배우질 못했어. 근데, 내가 겪은 것을 이야기만 해도 된다 하니 그때부터 해설을 시작했지.”


- 어르신이 겪으신 4·3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때 내 나이가 11살이었어. 11월부터 3월까지 숨어 살았지. 굴속, 숲속. 곶자왈에서만 5개월 동안 겨울을 지나 봄이 나도록 살았지. 처음 숨어 들어갈 때 남동생 3명, 어머니, 아버지, 나하고 우리 집에 같이 살던 사촌 언니 이렇게 7식구가 숨었지. 모여 있으면 한 번에 죽을까 봐 흩어져서 숨어 있었어. 그 추운 겨울 산속에서 숨어 지내니 먹을 것이 있나. 감기 걸리고 굶고 해서 동생이 3명이나 죽었지.


토벌대가 와서는 눈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 죽여버려. 짐승이라도 목숨이 달려있으면 다 죽였지. 처음에는 총으로 쏘다가 나중에는 죽창으로만 찔러 죽였어. 죽창으로 죽이니 빨리 안 죽으니까 나중에는 불로 태워 죽였지.


아버지가 우리 식구들을 원물오름에 숨겨 놓고는 망을 보고 그랬어. 아버지 올 때까지 소리도 안 내고 가만히 숨어 있었지. 새소리만 퍼드득 나도 겁이 나. 총소리가 팡팡 나고. 총소리가 멀리 들리고 해가 서쪽으로 지는 걸 보면 그날은 살아진 거라. 저녁이 되면 아버지가 오늘은 누가 죽었져, 누가 죽었져 그런 이야기를 해. 동네 사람 누구는 죽었는데, 우리는 살아졌다고 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날 하루 살아진 게 제일 좋은 거였지.


날이 어두워지면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왔어. 그런데 그날은 어두워도 아버지가 오질 않아. 어머니가 ‘너네 아방은 오늘 오지 않아. 죽은 상이여’ 했지. 숨어 살던 뒷빌레 굴에 와보니까 불이 막 와랑와랑해. 굴속에서 우리 먹을 곡식이여 이불이여 감춰놓은 것을 토벌대가 다 꺼내서 불태워버렸지. 그때 우리 아버지가 와서 ‘너넨 살아졌구나’ 하더라고. 뒷빌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었어. 우리만 살았지.


갈 데도 없고 겨울이고 추우니 큰넓궤에 피신했어. 거기엔 이미 삼밧구석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지. 애기들도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는 아주 좁은 데로 지나 굴 안쪽으로 들어갔어.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공간이 나와. 동광 사람들이 거기서 그렇게 살았어. 억새를 깔고 자기도 하고 억새에 불붙여서 그 불씨로 길 보며 살았지. 굴 밖에서 범벅 만들어다가 헝겊에 싸 들고 와서 먹고살았는데, 범벅만 먹으니 더 목이 말라. 굴 안에서 돌 틈에 떨어지는 물을 입대며 빨아먹고 살았지. 그렇게 그 굴 안에서 4, 50일을 살았어.”


밤인데 대낮처럼 아주 환했어, 굴 밖은.

하늘이 그렇게 한번 보고 싶었어.


“그러다 토벌대가 잠복해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을 잡아다가 굴을 알아낸 거라. 토벌대가 못 들어오게 그 좁은 목에다 불을 피웠지. 고추와 지푸라기 등을 태우니 연기가 매워서 토벌대가 들어오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사람들이 못 나오게 돌로 입구를 막았어. 망 보던 청년들이 토벌대가 내려가고 나서 돌을 치워주며 빨리 어디든 나가서 살라고 이제 굴속에 있으면 죽는다 했지. 굴 밖으로 나온 것이 밤이었는데, 아주 대낮처럼 환하게 보이는 거라. 얼마나 하늘이 보고 싶었던지, 그 하늘이 그렇게 한번 보고 싶었어. 그렇게 다른 피신 장소를 찾아 나섰어. 삼밧구석 사람들은 볼레오름 쪽으로, 우리 무등이왓 사람들은 미오름으로 피신했어. 토벌대가 못 찾게 하려고 사람들이 막 나무를 쓸멍 올라갔어. 바람 불고하니 흔적이 없어서 토벌대가 우리를 찾지 못했지. 그때 삼밧구석 사람들은 다 잡혀가서 죽었어.


그리고 다음 해 3월쯤 미오름에서 살다가 토벌대가 ‘산에서 내려와서 자수하면 살려 주겠다’ 해서 내려갔지. 덕수 토벌대에게 끌려가서 갇혀 살다가 화순지서로 끌려갔어. 방이 두 개였는데 굴같이 깜깜한 방에는 청년들을 가둬놨어. 어느 날부터 옆방 사람들이 안 보여. 다 죽었나 봐. 어느 날 우리를 작은 배에다 실어. 우리는 ‘바당에 우리를 죽여 버릴 거’라 생각하고 모두 손 잡고 울며 갔지. 죽어도 함께 죽자고. 그런데 서귀포 천지연 폭포 밑에 항구에서 내렸어. 거기가 단추공장이야. 민간인수용소였지. 우리 남제주군 사람들은 다 거기 모여져 있어. 괸당인 사람들은 면회도 가고 하더라고. 그때가 4월 초였는데, 시멘트 바닥에 그냥 누워 자고 보리 찐 밥으로 밥을 줘. 어른들은 한 접, 두 접 먹어버리면 없지. 밥알 하나 떨어지면 옆에 아이가 주워 먹고, 그럼 내 밥 주워 먹었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지.


12살 될 때 민간인수용소를 지키던 순경 집에 애기업개로 갔어. 어린 내가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하려고 어머니가 나를 보냈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전히 단추공장에 갇혀있었어. 순경 색시가 좋은 사람이었어. 낭푼이로 밥을 해다가 어머니 갖다주라 했지. 그렇게 몇 개월 살다가 어머니 아버지가 단추공장에서 풀려나고 우리는 화순으로 가서 살았어.


그런데 폭도 새끼라 하면서 방도 안 빌려줘. 아이들이랑 어울려 놀지도 못했어. 산에서 피신 다니면서 그때 남동생 3명 다 잃고, 나 14살 때 어머니 아버지가 갓난애를 낳았지. 어머니 38살, 아버지는 41살이었는데. 남동생을 5월에 낳고, 아버지가 8월에 돌아가셨어. 병원도 한 번 못 가고 이불도 한 번 덮지 못하고 입은 옷 그냥 그대로 짚에 싸서 그렇게 아버지를 묻었지.


그때부터 아주 기가 막히게 살았지. 사는 게 사는 거주. 남동생 9살 될 때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그때 내가 23살로 동광에 시집올 때였지. 어머니 돌아가시고는 밭매다 울고 장독대에 숨어 울고 몇 해를 울면서 살았어. 내가 우리 아기들 아픈 것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동생 아픈 것은 어찌 못하니 동생 아프지 말고 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지.”


내 삶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래서 나 마음이 아주 좋아.

정신이 흐리지 않으면 계속 해설을 하고 싶어. 나를 원한다면.


- 해설사로 활동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왔어. 제주도 해녀와 4·3 이야기를 촬영해서 자기들 고향 가서 드라마 한다며 통역자랑 왔어. 그리고 강정 성당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었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도 듣고 놀랐어. 그 사람들은 진실한 사과를 바란다고 했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못했으면 진실로 사과하고, 또 4·3 겪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보상을 했으면 좋겠어.


- 4·3해설사 활동이 어르신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내 아이들한테도 4·3 이야기는 안 해보고 살았어. 해설하면서 이야기하고 살기 시작했지. 농사짓는 것보다 아픈 이야기라도 이렇게 해설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좋아. 기억하기 싫은 4·3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어. 젊은 사람들한테 많이 알리고 싶어. 해설하면서 학생들한테 큰넓궤에 들어가 보라 해. 1분만 있어 보라고. 그럼 아이들이 나를 막 안아. 우리는 1분도 못 견디겠는데 할머니는 그렇게 어릴 때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았냐고. 사람들이 공감해주면 위로가 많이 돼. 그런 맛에 해설사도 계속하고 싶어. 이젠 귀먹어 말을 잘 못 들어. 목청도 막 커져 버리고. 그래도 정신이 흐리지 않고 이 정신이 그냥 있으면 계속 해설을 하고 싶어. 나를 원한다면.”


- 이렇게 인터뷰를 하시게 됐는데,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있는 사람들 죽기 전에 살아있을 때 나라에서 알아주면 좋겠어. 우리 4·3을 언제든지 잊어버리지 말아. 특히 제주 사람은. 외국 사람도 4·3을 아는 사람이 많아. 외국에 가면 내 사진도 붙어 있어. 미국에도 갔다 왔지. 내 삶의 이야기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그래서 마음이 다 좋아. 지금은 너무 행복해. 동생이 그래. ‘옛날에 그 고생 있으니 이만큼 살았수다’ 하고.”


우리는 늘 과거와 함께 살아간다. 역사를 바르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영상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cgsExRSHAf0




*『제주도우다』출판사 서평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최고의 역사소설
『순이 삼촌』 작가 현기영의 필생을 건 대작
유홍준 이창동 도종환 정지아 강요배 박태균 최태성 추천!

4·3을 입 밖으로 내는 게 금기시됐던 군부독재 시절,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된 4·3의 진실을 담은 「순이 삼촌」을 발표하면서 제주 4·3의 비극을 널리 알린 소설가 현기영. 그가 제주와 한반도 현대사의 뿌리가 담긴 필생의 역작 『제주도우다』를 선보인다.

4·3의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자 안창세의 목소리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제주도우다』는 일제강점기부터 4·3에 이르기까지, 현재 한국사회 갈등 지형의 연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제주의 근현대사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총체적으로 다룬 대하소설로, 역사적 비극을 끈질기고도 강렬한 필력으로 보여준다. 힘 있는 서사와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 압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 새 나라 건설의 꿈에 벅찼던 해방공간의 열망과 좌절을 그리는 한편 국가의 폭력에 내몰려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진혼한다. 인간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가공할 폭력과 나란히 제주의 땅과 바다,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매끄러운 문장 속에 빛난다.

갈등과 혐오로 점철된 이 시대 우리에게 도착한 『제주도우다』는 경종을 울리는 진중한 메시지와 함께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로 기억될 최고의 역사소설이 될 것이다.

제주, 그리고 한반도에 어린 격동과 파란의 역사

『제주도우다』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의 압박이 극에 달하던 1943년부터 4·3사건이 발생하고 토벌이 이루어진 1948년 겨울까지를 주요 시간대로, 역사 이래 육지의 지배권력에 거세게 맞서 역향(逆鄕)이란 별명을 얻은 제주의 해변 마을 조천리를 주요 공간으로 삼는다. 열한살 소년 안창세가 열여섯살이 되는 이 5년은 한국현대사의 최대 격변기로, 조천리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착취에, 해방 후에는 단독정부 수립 책동과 미군정의 폭압에 맞서 싸운다. 체제와 권력을 상대로 한 개인들의 싸움에서 승패는 자명했다. 『제주도우다』는 그 결과만을 향하지 않고, 그렇게 나설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잔인한 학살, 참혹한 비극이라는 상투적 표현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꿈틀거리는 사람의 형상을 부여한다.

『제주도우다』에 등장하는 사건과 사실은 더러 알려진 것들이지만, 소설은 낯익은 사실 너머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손을 내민다. 하루하루 성실히 노동하고 저녁이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 속에 술추렴을 하는 사람들, 고된 살림과 물질을 한 몸으로 해내면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해녀들, 바람에 물결치는 초원에서 흥얼거림 같은 노래로 말떼를 모는 테우리들…… 이들이 또한 차별과 억압을 공기처럼 숨 쉬며 노역에 시달리고 이유 없이 채찍질을 당한 사람들이고, 체포와 고문을 피해 마루 밑에 몸을 숨긴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항일은 제 몸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일본이 망한다는 소문이 돌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선포되었을 때, 이들은 이후에 어떤 역사와 마주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해방’이 과연 무엇일까? (…) 우선 등교할 때마다 등을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이 사라진 것이다. 다섯장 뗏장의 무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기뻤다. 압박과 해방! 온몸을, 등을 짓누르던 그 무게가 압박이고, 그것이 사라져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홀가분해진 지금의 상태가 바로 해방인가보다고 창세는 생각했다.(1권 233면)

좋은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좌절

노인이 된 창세의 회고담 형식을 띠고 있지만 『제주도우다』에서 사건을 이끌어가는 것은 해방공간의 청년들이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우파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경향에 대한 이해는 소박하지만 독립된 새 나라, 더 좋은 세상에 대한 열망만은 가슴을 태울 듯이 뜨겁다. 이들에게 해방공간은 일제를 물리쳐준 ‘좋은 나라’로 환영했던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2권 162면)임을 깨닫고, 가공할 고문과 폭력, 죽임에 못 이겨 입산을 “지상명령처럼”(3권 76면) 받아들이게 되는 시간이다. 가진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뿐 총도 거의 없이 죽창을 든 이들은 막상 4·3의 봉화가 올라 지서를 습격하고도 전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들 산부대는 “미숙함을 극복하기 위해 맹렬히 유격훈련을”(3권 85면) 하지만, 단독정부 수립 이후 더욱 잔혹해진 마구잡이 체포와 고문으로 민심이 돌아서고 마을의 지원이 끊기면서 고립된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이들은 “각자 결정하고 각자 싸우고 각자 죽”(3권 120면)어간다. 동굴 속 친구 곁에 남아 함께 굶어 죽거나, 혹은 토벌대의 총에 죽은 친구의 눈을 감겨준 뒤 하산의 길을 택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말한다. “우린 그때 살아도 살아 있는 걸로 생각 못 했어. 하늘로도 도망 못 가고, 땅으로도 도망갈 데가 없었주.”(1권 17면)

『제주도우다』는 이들의 싸움을 서술하면서 나란히 토벌대의 폭력을 나열한다. 다양한 증언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 이 폭력의 기록은 언어로 표현되었으나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다. 작가 현기영이 1978년 「순이 삼촌」을 통해 최초로 발화한 이 참상은 『제주도우다』에서 건조한 문장에 담겨 몇페이지씩 이어지면서 인간의 무력과 잔인을 곱씹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견뎌 살아낸 힘을 생각하게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살육의 현장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인정의 손길에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게 만든다.

자유자재의 파격, 자연이 써낸 문장

바닥없는 폭력의 한편에서 제주의 자연과 풍습은 더할 나위 없이 정겹고 아름답다. 달리기를 잘하는 창세가 배달 배낭을 메고 바닷가를 달릴 때 펼쳐지는 끝없는 하늘과 바다, 흰 파도 위 통통배들의 풍광은 손에 잡힐 듯하고, 외삼촌 양산도가 “어려려려허 허허러러” 말 모는 소리를 하며 말떼와 거니는 초원은 지금 코끝에 풀 냄새가 끼쳐오는 듯하다. 물질을 마치고 불턱에 모여 몸을 녹이는 해녀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생생하다. 소설 도처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제주의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새겨넣은 묘사는 최근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고전적인 문장의 품격을 보여주면서 이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을 느끼게 한다.

자연과 사람, 격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제주도우다』는 글로 된 모든 장르를 동원해 파격을 가한다. 군데군데 인용한 전설과 설화는 제주의 역사, 제주 땅과 바다가 키운 사람들의 기질을 옛이야기의 재미로 들려준다. 또한 시와 희곡, 판소리 사설, 무당의 넋두리, 신문 기사, 격문, 구호, 노동요와 유행가, 저항가 가사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해 대목마다 집약적으로 실감을 전달한다. 앞 문장의 끝이 뒤 문장의 머리가 되면서 물처럼 이어지는 문장이 생동하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그때 그곳에서 사람들은 일하고, 노래하고, 사랑하고, 소리 높여 외치며 싸웠다. 그들이 오늘 우리 앞에 다가온다.

스스로 “제주 4·3의 영령을 진혼하는 무당”이라 말하는 작가 현기영. 그가 등단 50년을 바라보는 문학 여정에 세운 이 우뚝한 이정표는 그 자체로 장대한 위령제를 지낸 듯하다. 이 작품은 한국문학사를 넘어 한국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로써 이제 우리는 제주 4·3을 더 당당히 이야기해야 한다.



4.3 추념식장에서 모두를 통곡하게 만든 대학생

4.3 유족 김연옥 할머니의 손녀가 전한 사연                

▲  제71주년 4.3 추념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든 4.3유족 사연의 주인공인 김연옥 할머니(78)가 자신의 기구했던 4.3 경험담을 추념식장에서 발표한 손녀 정향신 씨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오열했다.


"1948년 일곱살이었던 아이는 부모님 손을 잡고 불타는 마을을 떠나 매일 밤마다 이 굴 저 굴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터라 맨발이 참 시렸습니다. 끝내 잡혀간 곳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 수용소였습니다. 주먹밥을 하나 먹었을까.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랑 애기였던 남동생까지 군인들이 다 끌고 나갔는데, 마지막 끌려가는 아버지가 눈앞에서 발로 밟히고 몽둥이에 맞는 걸 본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요. 순간 누군가가 확 잡아챘고, 아이는 그만 돌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을 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혼자 깨어나 살아남은 그 아이의 이름은 김·연·옥.입니다."


일순간 추념식장은 어느 유족의 사연으로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제주에 사는 어느 여대생이 들려준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는 4.3 71주년 추념식장을 찾은 모든 이들의 눈과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유족이든 아니든, 제주도민이든 아니든, 귀가 열려 있고 심장이 뛰고 있기에 흘린 눈물이다.


제주 안덕면 동광리가 고향인 일곱살이던 아이는 이제 일흔 여덟.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됐다. 손녀 정향신씨가 전한 '4.3 광풍'에 의한 김연옥 할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통한의 세월이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가족을 잃어 고아가 되었고, 제대로 글을 배울 기회도 잃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해 몰랐던 게 너무 많았어요. 할머니가 글을 쓸 줄 모르셨더라고요. 세뱃돈 봉투에 제 이름 정향신 세 글자를 써 주셨던 2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할머니 머리에 애기주먹만한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데요. 그게 4.3 후유장애였다는 것도 작년 4월에야 알았어요. 심지어 10살 때까지 신발 한 번 못 신어본 고아였다는 사실도 믿기 힘들었고요."


▲  제주도내 대학에 재학 중인 정향신씨가 자신의 할머니가 겪었던 4.3당시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  자신의 이야기를 손녀가 4.3추념식 장에서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자 김연옥 할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할머니는 혼자 바닷가에 자주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할머니는 바다를 참 좋아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죠.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하루 아침에, 땅도 아닌 바다에 던져져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은... 당시 할머니는 고작 8살이었는데..."


무엇보다 할머니가 생선을 드시지 않는 이유를 전할 때는 자신도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살아남은 4.3희생자 유족들이 4.3 트라우마로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물고기를 안 드세요.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가 물고기에 다 뜯겨 먹혔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참으면서 멸치 하나조차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죠. 할머니의 바다를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너무 미안해요, 할머니. 할머니 삶에 그런 끔찍한 시간이 있었고 멋쟁이 할머니가 그런 아픔에서 살고 계셨는지 몰랐어요."


손녀가 대신한 김연옥 할머니의 말도 가슴이 먹먹하다.


"나는 지금도 바닷물 잘락잘락 들이쳐 가민 어멍이영 아방이 '우리 연옥아' 하멍 두 팔 벌령 나한테 오는거 닮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령 바다로 들어갈뻔 해져..." (나는 지금도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오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 연옥아' 하면서 두 팔 벌리고 나한테 오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두팔 벌려서 바다로 들어갈뻔 하지)


고아가 된 이후 10대의 시간을 대구와 부산, 서울에서 고생고생하다 뿌리를 잊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왔을 때는 열여덟살. 김연옥 할머니는 이후 시신 하나 없는 '헛묘'를 조성해 여태껏 매년 정성스럽게 벌초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향신씨는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울 때보다 웃을 때가 훨씬 예뻐요. 그러니 이제는 자식들에게 못해준 게 많다고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그 힘든 시절을 묵묵히 견뎌온 멋진 사람이에요. 할머니, 저랑 약속해요. 이제는 매일 웃기로."


연단 맞은편 객석에서 손녀의 이야기 내내 그치지 않는 눈물이 앞을 가리던 김연옥 할머니는 통곡의 울음과 함께 허공을 향해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평화대공원을 내려다보던 하늘도 함께 오열했다.

▲  제71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에 참가한 희생자 유족들이 김옥연 할머니의 사연을 듣던 중 곳곳에서 오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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