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 원래 제목은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신곡>을 번역한 박상진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일본인 의사이자 번역가인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가 붙인 제목인데
‘신곡’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붙인
이름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어찌 되었든지 나는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신곡을 쓴다면
나는 어떻게 쓸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제주도의 여러 신들을 생각한다
특히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자청비와 영등할망, 설문대할망
그리고 여러 당신 등의 일만 팔천 신들을
좀 더 깊이 연구할 필요성을 느낀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신과 함께> 라는 영화도 좋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좀 더 총체적인
오늘의 현실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생각한다
오늘날 지옥과 연옥과 천국은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우리들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신곡』[ 神曲 ]
저자 : 단테 알리기에리
출간 시기 : 1308 ~ 1321
지옥을 여행한다는 말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시에라리온이나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 거주지역에 가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낙원으로 간다고 하면 그곳의 1만 킬로미터 위 상공을 날아가는 것일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이 천국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천국과 지옥 그리고 낙원이 등장하는 경우는 대개 그것들이 비유로 사용될 때뿐이다. 하느님이 무한한 지혜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과 그 우주 속에 천국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삶이 하느님에게로 인도되는 순례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중세의 위대한 시인 단테와 우리들이 다른 점이다.
21세기에 단테를 읽는 것은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위용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곳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곳은 집처럼 편안하지는 않지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성당을 찾은 이와 단테의 독자는 곧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 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처럼 완전한 질서가 무한하고 오묘하며 놀라운 어떤 힘 그 자체인 신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신곡(La divina commedia)』은 영적인 나들이인 동시에 우주를 관통하는 여행이다. 그 여행은 지옥에서 시작하여 연옥을 지나 잠시 지상의 낙원을 거쳐 마침내 천국에서 하느님을 마주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떠다니는 상태에 이른다.
단테의 시를 읽기 전에 우선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단테의 시를 읽으면 우리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상과 마주치게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세의 세계상은 전 우주를 피라미드처럼 위계질서가 뚜렷한 체계로 파악한다. 가장 아래에는 무생물이 자리하며, 최상의 단계에는 이 모든 질서를 창조한 신이 위치한다. 모든 것들은 이 위계질서 속에서 주어진 자리를 지키며, 또한 경이롭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주 전체는 신의 무한하고 풍성한 창조의 능력을 증거하는 온갖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신곡』은 이러한 모습과 질서를 가진 우주를 여행한 기록이다. 『신곡』은 아울러 중세의 모습과 세계상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의 역할도 한다. 단테의 시는 중세의 신학과 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의 집대성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는 14세기 초의 피렌체 사회를 반영하는 시대사적인 문서인 동시에 그 시대를 산 한 개인의 내적인 여행기이기도 하다.
『신곡』에서 '3'이란 숫자는―삼위일체를 뜻하는 성스러운 숫자로서―중요하다. 이 서사시는 「지옥편」, 「연옥편」 그리고 「천국편」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3부는 각각 한 권으로 되어 있고 각 권은 다시 33개의 노래들로 이루어져 있다. 『신곡』은 서곡의 노래 하나를 포함하여 모두 1백 개의 노래들로 이루어진 셈이다. 이는 완전수를 상징한다.
모두 피안의 영역인 세 곳(지옥, 연옥, 천국)은 아홉 단계로 나뉜다. 9는 3의 제곱수다. 단테가 『신곡』을 위해 생각해낸 이런 시 형식은 3행이 하나의 연을 이루는 테르치네로 불리는데, 이 역시 '3'에 기초한다. 또한 시의 운율을 보자면 aba, bcb, cdc 식으로 3박자에서 서로 물려서 진행하는 구조를 보인다. 이와 같이 중간 행의 운율이 다음에 오는 3행의 운율을 알려주기 때문에 마치 시행들이 앞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이런 운구법(韻句法)은 단테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여행의 동반자로 여겨졌다.
서사시의 화자인 단테가 여행을 시작한 것은 35세 때였다. 그는 이미 인생의 절반을 살았음을 느끼고 위기감에 빠진다. 어느 날 혼란을 겪던 단테 앞에 갑자기 세 마리의 야수가 길을 막고 나타난다. 표범(육욕의 상징)과 사자(교만)와 암늑대(탐욕)였다. 그때 고대 로마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서 단테에게 자신이 인도하는 영적인 여행을 함께 떠나기를 권한다.
그 여행은 1300년, 수난의 금요일에 시작된다. 일주일 후인 부활절을 지난 목요일에 단테는 낙원에 도착하게 된다. 그 사이에 약 6백 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교황들과 왕들, 여러 제후들과 예술가, 숱한 범죄자, 은행가, 온갖 추문의 주인공들과 자신의 친척, 어릴적 친구들을 보게 되며, 그들 중 많은 사람과는 여행 도중 대화도 나누게 된다.
하지만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우선 지옥으로 먼저 들어간다. 그 입구의 문 위에는 어두운 글씨로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지어다"라고 적혀 있다. 사방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그 어둠 너머에서 끔직한 비명이 들려온다. 하지만 이곳은 연옥이다. 각자의 일생 동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갈 곳이 결정되지 않은 채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이다. 지옥은 이 다음에야 시작된다. 지옥은 땅속 깊숙이 들어간, 깔때기 모양의 거대한 심연이다. 이곳은 악마 루시퍼가 하늘에서 쫓겨나 추락하면서 땅속까지 뚫어놓은 곳이다. 지옥은 아홉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단식 지형처럼 단계적으로 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진다.
단테의 「지옥편」 Dante's Inferno일부 단테 판본은 지옥을 묘사한 그림을 싣고 있다. 이 그림은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www.iath.virginia.edu/dante/images/magnifier2.html에 들어가면 지옥을 그려놓은 지도를 볼 수 있다. 지옥의 모습이 어떤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런 지도는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지옥의 첫 번째 영역에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갇혀 있다. 여기에는 태어나면서 죽은 아기들의 영혼이나 '그림자'뿐 아니라 호메로스, 호라티우스(Horatius), 오비디우스(Ovidius), 소크라테스(Socrates), 플라톤(Platon), 유클리드(Euclid),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등 고대에 훌륭한 업적을 쌓은 위대한 인물들도 섞여 있다. 이들은 서양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태어난 불운으로 온 것이다.
실제 지옥의 고통은 두 번째 지옥계에서 시작된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와 트리스탄처럼) 육욕에 빠진 자들은 계속되는 돌풍에 휩쓸려 여기저기 빙빙 돌게 된다. 벌을 받는 방식은 (대부분의 경우에서처럼)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경우 육욕에 이끌린 사람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하는 벌을 받는다. 세 번째 영역에서는 탐식했던 자들이 고통을 당한다. 그들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 배설물에 앉아 있다. 계속해서 한 영역 한 영역씩 끔찍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여덟 번째 영역에서 단테는 한 죄인의 영혼과 마주치는데, 그는 단테가 이런 자리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인물인 교황 니콜라우스(Nicolaus) 3세다. 그는 어떤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데, 몸통은 구멍 안으로 들어가고 불붙은 발만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다.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가 누군지 볼 수 없는 까닭에 그는 단테를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8세로 여기고는 이제 자신을 더 깊이 그 구멍 안으로 밀어넣어줄 사람이 왔다고 믿는 듯 말한다. 그는 (이미 다른 교황들로 가득 차 있는 그 구멍에서)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잡고서 다음 교황이 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지구의 중심 가까이에 이르면 악마 루시퍼가 땅의 한가운데에 있는 영원히 얼어붙은 얼음에 꼼짝 않고 앉아서 세 명의 대역 죄인인 카시우스(Cassius), 브루투스(Brutus), 유다(Judas)의 머리통을 갉아먹고 있다. 단테는 이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공포 장면으로 묘사한다. 또한 두 명의 도둑이 파충류와 비슷한 생물체로 변하는 과정을 끔찍하게 그리는데,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섬뜩하리만치 아주 상세해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공포영화 『에일리언(Alien)』과 견줄 만하다.
땅의 내부에 도착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다른 쪽으로 땅의 표면까지 뚫린 긴 통로를 따라 달려야만 한다. 지옥에서 3일 동안 머문 후 단테는 다시 바깥으로 나온다. 이제 그 앞에는 정화(淨化)의 산인 연옥(purgatorium)이 나타난다. 이 지역은 낙원에 들어갈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리지는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다. 이들은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 특정한 도덕적인 자질을 한 가지씩 길러야만 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아홉 단계의 연옥은 새로운 지옥계를 옮겨놓은 것 같지만 사실 이곳은 모든 것이 지옥과는 판이하다. 이곳의 환경은 따뜻하고 밝으며, 목표가 뚜렷한 순례자들이 행렬을 이루어 부지런히 앞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그들 모두의 목표는 산 정상에 있는 지상낙원에 도착하는 것이다.
단테는 이제 정화의 산의 아홉 단계를 간신히 오른다. 각 단계는 인간이 저지르는 일곱 가지 큰 죄(교만, 질투, 게으름, 분노, 탐식, 육욕, 인색)에서 하나씩 해방될 수 있게 해준다. 아홉 단계의 연옥을 지나면 마침내 불의 담이 나온다. 이 담을 넘으면 여행의 잠정적인 목표는 달성되는 것이다. 성녀로 신분이 오른 단테의 아름다운 연인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만나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지상낙원에서 단테를 맞는다. 그곳은 미풍이 산들거리고 꽃들이 만발하며 새들이 지저귀는 멋진 곳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제 단테와 헤어진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계속한다.
이 여행의 마지막 부분은 천국으로 가는 여정인데, 현대의 독자들에겐 아마도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올라간 곳을 상상하려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상을 알아야만 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도 중세의 우주론에 따른 위계질서에 놓여 있었다. 고대(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모델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중앙에 지구가 있고 그 주위를 일곱 하늘의 영역이 돈다. 일곱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고정되어 있다. 그 위로는 더 넓은 공간(항성들의 영역)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모든 영역들이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동력인 제1운동자(primum mobile)다. 이런 일곱 하늘의 저편에는 하늘의 낙원과 신의 나라(엠피리언(Empyrean))가 놓여 있다.
현대의 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두 번째 이유는 이런 하늘의 영역이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곳에는 펄펄 끓는 피가 흐르는 강이 있지도 않고, 악마들에게 잡혀 꼬챙이에 꿰인 채 유황불에 들어가는 죄인들이 있지도 않다. 이곳엔 오직 형체 없는 사자(死者)들과 빛의 바다만이 있을 뿐이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원한 빛이 비칠 때 단테의 여행은 그 끝에 이르게 된다. 그는 신의 본질인 사랑을 꿰뚫어 보았고, 결국 내적인 변화를 겪고 지상으로 돌아온다.
『신곡』 [神曲] (사람이 읽어야 할 모든 것 - 책, 2010. 3. 26., 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조우호)
송고시간2016-12-12 07:30
"자기의 별,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라"
(부산=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는 13~14세기 이탈리아 시인이자 철학자, 정치가이다. 그는 중세에서 근대로 향해가는 커다란 변화의 시기에 영원불멸한 대서사시 ‘신곡’(神曲)을 남기며 시대의 물음에 응답했다.
‘신곡’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단테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700여 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은 지금도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현대인에게 큰 울림을 전하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문학 이론을 전공한 박상진(52) 부산외국어대 만오교양대학 교수는 책과 강연을 통해 단테의 ‘구원의 순례’에 동참하게 하고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그는 연합이매진 12월호와 인터뷰에서 단테의 순례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순례를 마치고 변화돼 돌아온 단테에게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단테는 방향을 알려주는 별 같은 존재라는 단테 전문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봤다.
-- 단테와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 솔직하게 원래 관심이 없었어요. 부산외국어대 이탈리어과 교수로 있던 2002년쯤 서해문집 출판사에서 단테의 ‘신곡’을 학생용으로 쉽게 풀어서 내자는 제안이 왔어요. 마침 문학 이론에 싫증이 났고 어떤 인물이나 작품의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차여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단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막상 ‘신곡’을 짧게 줄이려고 하니까 도저히 줄여지지 않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전체를 번역했죠. 2005년에 서해문집에서 책을 내고, 또 2007년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신곡’을 출간하게 됐죠. 그렇게 단테와 처음 만났고, 그때부터 단테에 깊이 빠졌습니다.
-- 단테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요?
▲ 단테는 많이 생각하게 해요. 생각을 쥐어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다 보면 자신과 다른 작가, 예술 작품 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죠. 저는 ‘보편적’이란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그의 글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와 연관돼 있고 새로운 의미로 생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700년 동안 계속해서 살아남은 것이 이를 증명하죠.
고전은 살아남은 작품입니다. 사람들이 고전을 왜 읽을까요? 시대마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감동이나 메시지를 주니까 그렇죠. 고전은 시대에 맞게 재해석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곡’은 이런 고전의 정의에 부합하는 작품이죠. ‘신곡’만큼 저를 붙드는 작품은 없었어요.
-- 단테는 어떤 인물인가요?
▲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거대한 과도기에 이탈리아에서 살았던 사람이죠. 단테는 시대에 대한 응답 능력이 뛰어났어요. 변화를 잘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했죠. 문학, 철학, 언어, 종교, 정치, 행정 등 다방면에 걸쳐 시대의 요구에 정확하게 응답했어요.
예를 들어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라틴어가 대세였고 이탈리아어는 하층민이 사용하는 언어였어요. 단테는 ‘속어론’이란 책을 쓰면서 이탈리아어 사용에 대한 이론을 뒷받침한 후 대표작 ‘신곡’을 이탈리아어로 썼죠. 당시 이런 일은 대단한 결단이자 위험한 모험이었죠. 비약하자면 단테는 거의 ‘이탈리아의 세종대왕’이었던 셈이죠.
또 황제와 교황 간 권력 투쟁 상황에서 ‘제정론’이란 정치학 저서를 쓰며 조율을 제시했고, ‘향연’을 통해서는 많은 철학적인 문제를 쉽게 전달하려고 했어요. 단테는 지배계층의 편에 선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민중의 시선에서 세계관을 구축하려 한 지식인이었죠.
진보적인 청년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한 것에서 엿볼 수 있듯 실천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는 “실천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자들이야말로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박상진 교수. 사진/임귀주 기자
-- 단테가 활동한 피렌체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 피렌체는 당시 거대한 변화의 중심지였죠. 단테는 그곳에 모인 시인, 철학자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또 단테가 사랑한 사람이자 신곡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인물로 나오는 베아트리체가 현실 속에서 영감을 준 공간이었죠.
베아트리체는 청년 시절 사랑의 대상이자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그녀가 죽으면서 문학에 대한 사랑은 철학에 대한 사랑으로 옮아갔죠. 철학을 바탕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들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 정치에 입문해 10년도 안 돼 피렌체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죠. 그는 정치, 행정, 외교, 군사 등 많은 측면에서 성공을 거뒀죠.
하지만 1301년 정쟁에서 패해 추방당하고, 1321년에 죽을 때까지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이 시기가 단테에게는 가장 불행했겠지만 우리에게는 굉장히 다행스러운 시간이었죠. 단테는 바로 이 시기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썼어요.
-- 단테가 ‘제정론’에서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요?
▲ 이탈리아는 당파들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고, 도시 간의 대립도 심했어요. 단테는 교황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죠.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죠. 추방된 후 그는 ‘제정론’을 써요. 한 분파의 입장으로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단테는 모든 권력의 대립을 조절할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일까를 탐사하죠. 그리고 양의 발굽 형태가 가장 적절하다고 합니다. 당시 대표적인 권력은 황제와 교황이었어요. 어느 한쪽을 편들어서는 대립이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본 거죠. 두 권력이 적절하게 균형을 맞출 때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조정이 필요하다고 본 거죠.
-- 단테는 세계시민적 사고를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국수주의 물결이 일고 있는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세계화는 힘 있는 몇몇 국가가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나머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죠. 그런 것이 좀 더 심화한 게 아닌가 싶어요. 문제는 획일화죠. 정치, 경제, 문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에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영향을 깊숙하게 주는 것이 문제죠.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이후 단테가 유명해지자 피렌체에서는 돌아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활동한 피렌체 시민이지만 피렌체만을 위해 일할 수 없다”하며 거부하죠. 일할 대상은 피렌체란 한 지역이 아니라 유럽 전체라고 생각한 거죠.
단테의 세계시민적 사고는 국가를 전부 없애자는 것이 아닙니다. 국경은 존재하지만 아주 유연하게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국가 간에 자유롭게 교류하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대화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너는 틀리고 나만 맞는다는 것은 결국 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어요. 전 세계적인 국수주의 물결은 반(反) 지성주의가 판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보편적인 사고와 실천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단테가 다양한 문화 영역에 영향을 미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첫째는 삶, 죽음, 죽음 이후의 세계 등 본질의 문제를 깊이 있고 다채롭게 들여다봤기 때문이죠. 미적으로 굉장히 뛰어나고 사실적이기 때문에 호소력이 클 수밖에 없어요. 어떤 예술가라도 영감을 받지 않을 수 없죠. 최근 개봉한 영화 ‘인페르노’도 ‘신곡’에서 소재를 빌려온 경우죠.
‘신곡’에서 애욕의 죄를 지은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에 대한 부분을 읽다 보면 벌을 받는 방식이나 감정 묘사가 너무도 섬세하고 사실적이어서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이 에피소드에 대한 그림이 100개가 넘는 이유죠.
또 ‘신곡’은 시대가 달라지면 거기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던져줘요. 그 정도로 유연하고 포용력이 있죠. 다른 사회나 시대마다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것이 단테의 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책을 보는 박상진 교수. 사진/임귀주 기자
--‘신곡’의 원제는‘La Comedia di Dante Alighieri’(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입니다. 어떻게 신곡이란 제목이 붙은 겁니까?
▲ 서양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선 일본인 의사이자 번역가인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가 붙인 제목인데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잘 모르겠어요. ‘신곡’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붙인 것으로 보이기도 해요.
‘신곡’은 ‘거룩한 노래’라는 뜻일 텐데, 단테 자신이 붙인 제목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였어요. ‘신곡’이라는 번역어는 단테가 붙인 원래의 제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지요.
우리는 단테가 제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을까 생각해야 해요. 우선 ‘코메디아’라는 말은 우리가 ‘희극’이라고 부르는 것과 상당히 다릅니다. 단테는 ‘코메디아’라는 용어가 신과 인간의 합일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간단히 말해 단테는 신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발걸음, 그리고 그 끝에서 성취하는 인간의 구원을 ‘코메디아’라는 용어에 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저는 단테가 신의 섭리보다 인간의 의지와 실천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아요.
이와 함께 ‘단테 알리기에리’라는, 자신의 이름을 제목에 넣은 이유도 중요합니다. 단테는 인간으로서 의지와 실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어요. 이를 통해 독자들은 단테와 함께 구원의 순례를 떠나면서 인간을 둘러싼 많은 문제를 생각하고 논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을 나눈다는 식의 설정은 독자들이 더욱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단테와 함께 걷는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신곡’은 어떤 작품입니까?
▲ 신곡 전체는 단테가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기독교의 구원으로 보면 안 돼요. 여정의 끝에서 만난 것은 바로 이전과는 다르고 새로워진 단테 자신이거든요. 하느님도 길잡이 중 하나이지 궁극적인 목적지는 아니라는 거죠.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 단테가 지옥에서 만난 스승 라티니가 “너의 별을 따라가거라. 그러면 너의 천국에 닿을 것이다”고 얘기하는 부분을 가장 좋아합니다. 다른 별이 아닌 바로 ‘너의 별’이죠. 주어진 별이나 공동의 별이 아니라, 자신의 별을 만들어 그것을 향해 나아가면 이상에 도달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에 갇혔다면 ‘신곡’이 지금까지 이렇게 내려올 수가 없었겠죠. 문학은 종교를 초월합니다. 당시 미술에서는 조토 디 본도네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화풍을 보여줬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철학과 결합했어요. 단테도 이런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겠죠. 거대한 변화의 시대에 적절하게 반응한 거죠. 반응은 지식인의 책무입니다.
-- 단테의 순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 단테는 중간중간 “나는 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기억하리라”고 말합니다. 기억하는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기 위한 거죠. 자기 혼자 새롭게 변화해서 혼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깨달음을 지니고 돌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라고 한 거죠. 자신의 순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다른 이들을 순례에 동참시키고, 자기는 다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순례에 나서는 거죠.
‘신곡’은 이렇듯 기독교적이 아니라 불교의 ‘윤회’에 더 가까워요.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계속해서 변화하죠. 단테는 700여 년 전 죽었지만 그는 텍스트 안에서는 살아있어요.
특히 ‘돌아온 단테’라는 것에 주목해야 해요. 그는 천국에서 이렇게 얘기하죠. “난 돌아갈 것이다. 다른 목소리와 다른 양털을 지닌 시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 단테가 생각하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 천국은 선(善)의 집합체가 아니에요. 천국이 선으로만 뭉쳐진 곳이라면 배타적인 곳일 거예요. ‘멸균된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는 균이 없이 살아나갈 수 없어요. 단테는 천국이 완벽하게 순수한 곳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천국이 지옥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조화로움입니다. 지옥에서는 변신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야말로 밀폐되고 배타적인 곳이죠. 반면 천국은 열린 공간이에요. 지옥에 있는 것까지 포용하는 공간이죠. 천국의 본질을 지키면서 지옥을 조절해나가야 하는 거죠.
단테는 천국의 빛깔을 뻘겋고 퍼렇게 표현하면서 천국이 결코 순수하고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천국적이지 않은 것과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거죠.우리가 정의를 실천한다고 할 때도 정의롭지 않은 것과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그것들을 교정하고 조절해야 해요. 정화해 가는 과정이 천국이자 행복인 거예요.
-- 단테는 행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 우리는 현실에서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룰 의무가 있어요. 이런 공동체를 위해 적절하게 참여한 이들은 천국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죠. 이렇게 참여하는 가운데 개인의 행복도 보장된다고 보는 거예요. 혼자 잘 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주변을 돌아보는 거죠.
자기 확신에만 가득 차서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가는 것은 천국도, 행복도 아니에요.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판하고 교정해나가야 하고 자기 자신도 변해가는 거죠. 행복은 아주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그런 것을 향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단테는 죄를 짓는다는 것은 선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지성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지성은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 실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그런 것이 실종돼 있죠. 그야말로 지금의 현실은 미증유의 사태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을 새롭게 수립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 단테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까?
▲ 바로 진화된 인간이죠. 생물학적인 진화와는 다른 진화가 필요해요. 그것은 바로 도덕적인 진화와 종교적인 진화라고 생각해요. 도덕적인 진화는 인간과 인간이 원만한 유대관계를 맺도록 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자 배려입니다. 또 종교적인 진화는 인간의 힘을 넘어선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 곧 겸손함이죠. 이런 진화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고 인간이 질적으로 진화하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구원은 바로 진화이고 ‘신곡’은 그것을 위한 안내서라고 생각합니다.
-- 진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죠. 바로 읽고 쓰는 문화입니다. 도서관의 실종은 문명의 실종으로 이어집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로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죠. 그것으로 자기의 별,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죠.
또 단테가 순례에서 항상 길잡이를 따라가며 두리번거렸듯이 우리도 자꾸 두리번거려야 해요. 성찰해야 한다는 얘기죠. 앞만 보고 가면 자기가 삐뚤게 가고 있는지 모르거든요. 두리번거리고, 돌아서서 지나온 길도 보며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죠.
박상진 교수. 사진/임귀주 기자
빛으로 가득 찬 정오의 이면에는?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세계의 한 단면을 잘라 보여주는 〈정오의 희망곡〉의 시적 어조는 다소 우울하고 다소 명랑하다. 〈정오의 희망곡〉은 한 라디오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지금도 그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겠다. 먼저 정오라는 시각에 주목하자. “오전 열한 시에 나는 소리들을 흡수하였다. / 오전 열한 시에 나는 가능한 한 시끄러웠다. / 창문을 열고 수많은 목소리가 되었다.”(〈소음들〉) 그 오전 열한 시와 정오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간대다. 정오는 밝아 오는 새 아침의 상쾌한 시작이 거덜이 나고, 사방에 빛이 넘치는 한낮에 도달하는 시각이다. 아침은 정오를 향한 전주곡이다. 정오에는 해가 하늘 한가운데 오고 그림자가 가장 짧아진다. 정오는 무지몽매의 표상인 어둠을 몰아내고 마침내 도달한 무오류의 시각이기 때문에 위대하다.
니체는 말한다. “한낮,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장.” 삶은 무오류가 아니다. 따라서 정오는 무오류가 아닌 사람들에게 무오류와 진리를 강요하는 잔혹한 고통의 순간이다. 정오에 이르러 하늘의 천장 한가운데 오게 된 태양은 사람들에게 그 분신인 듯 그림자를 선물한다. 그림자는 마치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오류처럼 정오가 지나면서 점점 길어진다. 하나가 둘이 되고, 그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오류성을 되새기는 정오는 그런 맥락에서 “영혼의 최저 고도”다. 그 최저 고도에 넘실거리는 “정오의 희망곡”이라니 ! “정오의 희망곡”은 희망을 정오의 시간마다 송출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지만 그것으로 우리 삶에 내장된 무수한 실패와 오류들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명랑하고 달콤한 가짜 희망들이 라디오가 켜진 모든 곳에 전달될 때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되씹을 때다. 보라, 그 “정오의 희망곡”이 배달되는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당신은 사랑을 잃고 / 나는 줄넘기를 했다.” “정오의 희망곡”이 도처에 넘실거리는 바로 그 시각에도 사랑을 잃는 비극은 되풀이되고, 어디서나 줄넘기를 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줄넘기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에게 의탁했던 제 존재를 되찾으려는 기획이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가짜 구원자 노릇하기다. 내가 당신의 가짜 구원자 노릇하기를 그칠 때 사랑은 깨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짜 구원자 노릇을 하고 있을 때,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악마이다. 이는 하루에도 열 번씩은 벌어지는 일이다.”(베르트랑 베르줄리) 아울러 사랑이란 상대방 영혼을 식민지화하기, 한없는 수동성에 빠뜨려 무단으로 전유(專有)하는 방식이다. 달콤한 애무조차도 사실은 무의식의 층위에서 공격이며 비열한 함정이다. 애무의 본질은 “그가 나에게 던지는 시선과 자유를 포기하고 나에게 몸을 던져 오도록 하기 위해서 상대방에게 파 놓은 함정이다. 수동성으로의 초대. 욕망의 대상을 자신의 끈끈한 살에 붙여 놓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은 상대의 시선 아래에서 살지 않으려는 기도이다.”(알렝 핑켈크로트) 그런데 왜 하필 줄넘기일까? 물론 배드민턴을 치거나 역기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배드민턴은 상대가 필요하고, 역기는 너무 무겁지 않은가? 그러니 왜냐고 묻는 것은 너무 사소한 것에 집착한다는 뜻이다. 시의 화자는 한사코 줄넘기를 한다. 당신이 사랑을 잃었다면 나도 언젠가는 사랑을 잃을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사랑을 잃을지 몰라. 그 불행한 예감 속에서 한낮은 기울고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 갔다.” 정말 세상은 순조롭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모든 순조로움은 그 안에 순조롭지 못함을 감추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분식(粉飾)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는다. 모든 것이 속절없이 종말의 시간을 향하여 흐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과연 불행의 예감은 현실이 되는 것일까. 인생은 잔걸음으로 빠르게 인파 속으로 걸어가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와 같다. 나와 당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완벽하게 뒤집어진다. 전반부와는 상황이 정반대로 뒤집어지는 역전(逆轉)이 일어난다. “나는 사랑을 잃고 / 당신은 줄넘기를” 한다. 중국 도자기는 언젠가 깨지고, 잡상인은 끊임없이 닫힌 문을 두드리며, 화병의 꽃은 이내 시들기 마련이다. 한번 사랑을 잃은 자는 영원히 사랑을 잃는다. 이것이 나,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생각이다. 빛으로 차고 넘치는 정오라고 공허와 암흑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오는 모든 공허와 암흑을 제 이면에 가둔다. 정오의 태양은 이글거리며 모든 사물의 따귀를 올려붙인다. 누군가는 이빨을 닦고, 누군가는 똥을 싸고, 누군가는 동료와 잡담을 나누고, 누군가는 살인 충동에 시달리고, 누군가는 사랑을 잃고, 누군가는 줄넘기를 하고,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지배하는 법안을 기안할 때, 이 그림자가 짧아지는 정오의 시각 위로 김 빠진 맥주처럼 “정오의 희망곡”이 쏟아진다. 모욕이나 욕설처럼. 삶이란 근본에서 사소한 비밀들을 지닌 채 살려는 노력이다. 냉소적인 자들은 우리가 지닌 그 사소한 비밀들을 추궁하고, 그것을 빌미로 모욕하고 처벌하겠다고 협박한다. 이 가을 아침에 나는 희미해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줄넘기를 한다. 당신의 얼굴은 표상이 아니라 내 명령을 피해, 내게 흡수되기를 거절하고 간신히 도망간 바로 그 실재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내게서 도망간 수많은 얼굴들이 내 안에서 사소한 비밀들을 배양한다. 그 얼굴들이 배양하는 사소한 비밀들을 간직한 채 나는 오늘 줄넘기를 한다.
이장욱(1968~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가 태어난 해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억한다. “1968년이 오자 / 프라하의 봄이 끝났다 / 레드 제플린이 결성되었다 / 김수영이 죽었다”(<좀비 산책>)고 쓴다. 그해 연습생 신화를 쓴 프로 야구선수 장종훈과 가수 신해철이 태어나고,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과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킹 2세, 그리고 헬렌 켈러가 죽었다. 그해 일본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10월 12일에는 제19회 멕시코올림픽이 개막했다. 그해 1월에 내가 살던 동네로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피습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때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시골에 있었다. 그해에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는데, 그해 태어난 사람 중 하나가 시인 이장욱이다. 나는 이장욱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재기발랄한 이 시인은 시에서 비평으로, 그리고 소설로 제 문학의 외연을 확장해 간다. 내가 아는 ‘이장욱’은 오로지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6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만난 이장욱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이 있고, 갖가지 용의자들이 활보하고, 누군가는 복권을 사는 국가에서 태어나 “개인적인 관계로 가득”한 오늘에 불시착한다. 그는 녹색연합 회비를 자동이체로 내고, 진보정당인 민노당을 지지하고, 아이들과 자가용을 혐오한다. 기압골이 이동하고 그 이동에 따라 흐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온다. 날씨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데, 그의 시에는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그는 고백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 나에게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결정>)라고. 오늘을 낯선 시선으로 전생(前生)의 날처럼 바라보는 그의 시를 읽는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