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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Mar 01. 2020

22.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거대한 불새를 타고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주로 뻗어가는 기차를 타고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의 세상에서 인간의 세상이 되었고

인간의 세상에서 돈의 세상이 되었고

돈의 세상에서 우주의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그냥 남았다

내가 만든 나의 길만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고 나는  그냥 여기에 남았다

모두가 떠난 이 곳에서 내가 할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꿈 밖에서 세상을 다시 본다


세상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

장석주 시인이 그렇고

조동범 시인이 그렇고

이원규 시인이 그렇고

김도수 시인이 그렇고

김인호 시인이 그렇고

김해화 시인이 그렇고

내가 좋아하는 나희덕 시인이 그렇다


먼 산에서 산목련이 피어나고 있으리라


코로나19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 왔으리라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사람들

이제는 크게 깨달을 수 있으리라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에게도 진정한 행복이 올 수 있으리라


나와 세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따로 생각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를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17) 조용미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꽃피운 앵두나무 앞에 오래 서 있는 까닭은?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꽃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
 내가 지금 꽃나무 앞에 이토록 오래 서 있는 까닭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할까
 부암동 백사실(白沙室)은 숲 그늘 깊어
 물 없고 풀만 파릇한 연못과 돌계단과 주춧돌 몇 남아 있는 곳

 한 나무는 꽃을 가득 피우고 섰고
 꽃이 듬성한 한 나무는 나를 붙잡고 서 있다

 이쪽 한끝과 저쪽 한켠의 아래 서 있는
 두 그루 꽃피운 앵두나무는
 나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아주 가깝지 않게 떨어져 있는데
 바람 불면 다 떨구어 버릴 꽃잎을 위태로이 달고 섰는
 듬성듬성한 앵두나무 앞에서 나는
 멀거니 저쪽 앵두나무를 바라보네
 숨은 듯 있는 별서의 앵두나무 두 그루는
 무슨 일도 없이 꽃을 피우고 있네
 한 나무는 가득, 한 나무는 듬성듬성

 나는 두 나무 사이의 한 지점으로 가서 가까운 꽃나무와
 먼 꽃나무를 천천히 번갈아 바라보네
 앵두가 열리려면 저 꽃이 다 떨어져야 할 텐데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
 무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을 읽다가 백사실을 배경으로 한 시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부암동 백사실, 하면 아득한 향수가 밀려온다. 백사실은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와 가까운 곳이라 내 발길이 닿은 장소다. 장소는 저마다 냄새와 감촉을 갖고 있다. 어린 시절 내가 겪은 백사실만의 기운과 기후와 바람, 그것들의 냄새와 감촉을 알고 있다. 내 삶은 무수한 장소들이라는 양피지 위에 기록된다. 내 어린 시절 자하문 밖 둔덕은 온통 능금밭이었다. 철없던 시절에 그 능금밭에 들어가 주인 몰래 능금을 따곤 했었다. 백사실은 백사 이항복의 별장이 있던 곳이라고 백사동천이나 백사실이라고 불렀다. 북악산에서 흘러온 물이 이 계곡을 타고 바깥으로 나가는데, 숲은 깊고 인적은 드문 한적한 곳이다. 백사실 계곡에는 물이 맑고 깨끗해서 도롱뇽이나 버들치, 가재와 같은 일급수 어종들이 살았다. 지금도 이 계곡에 버들치가 살고 있을까. 아마도 시인은 최근에 그곳을 다녀왔나 보다. 이젠 물이 다 말라 버렸을까. 시인은 “물 없고 풀만 파릇한 연못과 돌계단과 주춧돌 몇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시인은 “꽃피운 앵두나무 앞에 나는 오래도록 서 있다”고 쓴다. 그러나 왜 앵두나무 앞에 오래도록 서 있는지는 모른다. ‘왜 앵두나무 앞에 오래도록 서 있는가’라는 물음은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같다. 수료는 마조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물었고, 마조는 수료에게 절을 하라고 이른 뒤 수료가 몸을 숙이자마자 그를 밟아 버렸다. 그 자리에서 수료는 번쩍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몸을 일으킨 수료가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박수를 치며 말했다. “놀랍군, 놀라워 ! 수백 수천의 삼매(三昧)와 무한한 묘한 이치가 깃털 하나에 그 뿌리와 연원을 두고 있다니요 !”

꽃을 피우고 섰는 앵두나무는 꽃을 다 떨군 뒤에야 앵두를 맺을 것이다. 맺힌 것은 반드시 떨어지고 떨어진 자리에는 새로운 맺힘이 있다. 바람이 불면 꽃과 잎은 우수수 땅으로 떨어진다. 떨어짐으로써 존재함을 마친다. 시인은 꽃핀 앵두나무 앞에서 오래도록 서서 삼라만상에 작동하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이치를 씹고 있다. 꽃은 나무 속에 숨은 생령(生靈)을 탈자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무는 제 생령이 형태로 환원된 이 환한 꽃을 타고 죽음에서 도주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타고 죽음에서 도피하듯이.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탈영토화”(들뢰즈)한 결과이고, “동일한 것의 이원성”(레비나스)으로 나아감이다. 꽃은 나무를 가로질러 탈영토화한다. 꽃핀 앵두나무는 세계의 충만함을 개시(開示)한다. 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부재를 딛고 하나의 현존으로 그 충만함에 대응한다. 이 충만함은 생명의 충만함의 순간이요, 아울러 무(無)로 충만한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직관으로 이 순간이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번 온 것은 반드시 가고, 간 것은 다시 온다.

시인은 두 그루 꽃피운 앵두나무 사이에 서 있다. 이곳은 한적한 곳이어서 사람도 없다. 꽃은 신성의 육화며, 생명의 분열이다. 하강의 운명을 품고 있는 꽃은 하나에서 둘로 나뉘는 다리다. 꽃은 열매로, 열매는 다시 씨로 변화한다. 삶과 죽음은 변화함 속에서 이어져 있다. 시인은 이 변화함 속에 있는 가까운 꽃나무와 먼 꽃나무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화두를 안고 있다. 외생(外生), 즉 지나가는 삶의 뜻을 묻는다.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인에게 그를 밟아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화두를 깨 줄 마조 선사가 없다. 그래서 “두 그루 앵두나무 사이에 오래 서 있고 싶은 까닭을 / 나는 어디에 물어야 할지 / 무슨 부끄러움 같은 것이 내게 있는지 자꾸 물어본다”. 이것은 구애가 아닐까. 불가능한 존재를 향한 안타까운 구애의 몸짓이 아닐까. “천사여, 내가 아무리 구애를 한다 해도 그대는 오지 않는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제7비가>). 유한한 생명이 느끼는 행복이란 영원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하루살이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하루살이가 아무리 붕붕거린다 해도 겪지 않은 내일 저 너머를 알 수는 없다. 앵두나무가 꽃피운 뜻을 묻는 것은 미지, 그 알지 못함에 대해 묻는 것이고, 내가 존재함의 뜻을 묻는 행위다. 어느 해 봄 사람 없는 한적한 백사실 계곡에는 앵두나무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 섰고, 거기에서 시인은 오래 서성이었다.



조용미(1962~ )는 경상북도 고령 사람이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몇 번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 본 조용미 시인은 속은 어쩐지 모르겠으나 매우 조용한 사람이다.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환영(幻影)이다. 한 선사(禪師)의 얘기다. 제자가 “제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보리달마에게 물었다. 보리달마가 “어디, 네 마음을 여기에 꺼내 보아라. 그러면 내가 고요하게 하겠노라”고 했다. 오래 침묵하던 제자는 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시 보리달마가 말했다. “이미 네 마음은 고요해졌노라!” 김포에 살다가 정릉으로 이사 와서 산다는 시인과 동숭동 언저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성북동으로 건너와 차를 마실 때도 그랬다. 시인은 가만가만 말하고, 웃을 때도 소리 없이 웃는다. 그의 마음도 외면과 같이 고요할까.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2007, 문학과지성사)을 받았을 때 맨 앞에 실린 시에서 시인의 자화상을 읽는다. “번개가 소나무를 휘감으며 내리쳤으나 / 나무는 부러지는 대신 / 번개를 삼켜 버렸다 / 칼자국이 지나간 검객의 얼굴처럼 / 비스듬히 / 소나무의 몸에 긴 흉터가 새겨졌다 / 소나무는 흉터를 꽉 물고 있다”(<소나무>) 번개가 내리쳤을 때 그 번개를 삼켜 버린 소나무는 시인 자신이 그린 내면 자화상이다. 겉은 고요해도 속은 번개를 삼킨 속이니 시끄러울 수도 있겠다.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내 몸은 티베트 사자의 서처럼 단번에 읽을 수 없는 책”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한다”(<구름 저편에>)고 말한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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