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철학을 철학적으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니체는 철학을 문학적으로 쓸줄 알았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철학적으로 다시 쓰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몸', '생명' 그리고 '자기'를 찾는 서양의 고전
[ Also sprach Zarathustra ]
저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는 서양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 책의 이름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니체의 지인인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했을 때 니체가 "이 책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이미 그 문장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꾸했듯이 그렇게 쉽지 않다.
나 역시 대학에 다니며 이 책을 접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독일어 공부를 겸해서 친구들과 앉아 한줄 두줄씩 원서를 읽어가며 강독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상징과 비유, 철학적 내용이 제대로 해석되지 않아 많은 고민을 하며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리한 삶의 통찰을 담고 있는 니체의 문장들에서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전율과 지적 즐거움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에서 니체를 전공하면서부터 이 책은 니체가 말하고 있듯이 단순히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존적 체험을 동반하는 몸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세상사를 몸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고, 서양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이 책의 깊은 정신적 샘에서 지금까지도 무한한 철학적 사유를 상상력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고 있다.
니체는 이 책의 부제를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자 동시에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고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지만 정작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현대의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도 분석가들과 함께 6년이나 세미나를 하며 읽어 나간만큼 이 책은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상징과 비유와 같은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며 단순히 BC 7세기에 페르시아에 살았던 종교지도자 차라투스트라의 일대기를 기록해 놓은 것도, 머리말과 1~4부까지 모두 90개로 표현된 이야기를 통해 서양의 도덕적 서사시를 그려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니체가 정신적 피로 쓴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실존적 고뇌를 담은 몸의 체험을 통해 읽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비록 그 전체의 구성이나 내용의 전개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지만 서양의 정신사의 정수에 해당하는 철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야스퍼스가 이 책을 문학서이자 동시에 철학서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이 책은 니체가 문학적 형식을 빌려 쓴 '이야기로 읽는 서양사상사'다.
독일의 유명한 소설가 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은 니체를 루터 이후의 가장 위대한 독일 언어의 천재라고 불렀는데, 니체의 저작 가운데 이 책은 문체, 상징, 비유, 패러디 등 수사학적 표현이 뛰어난 저술이다. 니체 스스로 이 책을 단테, 괴테, 셰익스피어를 넘어서는 문체를 구사한 책, 자신의 작품 가운데 독보적인 책,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이 책은 니체의 언어를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그 선악의 이율배반적인 지평과 그 위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고통과 치유의 과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니체가 우리에게 선사한 음악은 서양 정신사 전체를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패러디하면서 그리고 또 때로는 새로운 음으로 삶의 심층적인 의미의 선율을 그려내면서 아침놀처럼 미래 사상의 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자신의 작업을 니체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도 가장 큰 선물",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책", "가장 심오한 책으로서 진리의 가장 깊숙한 보고에서 탄생"한 책, "제5의 복음서", "미래의 성서"라 부른다.
니체가 스스로 가장 심오한 진리를 가진 책이라고 보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일까? 해머를 가지고 철학하는 니체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인간의 미래를 건설하려고 한 것일까? 니체는 이 책에서 뱀, 독수리, 타란툴라, 낙타, 사자, 독수리, 새, 들짐승, 당나귀, 암소, 샘, 바다, 황금빛 알, 벼락 등 무수히 많은 상징과 비유를 구사하며 서양의 정신사 전체를 비판하고 "어떻게 원한과 증오에 의해 병든 인간이 아니라 생명력 넘치는 건강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인류의 미래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여기에서 니체는 기존의 이성중심적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며 영원회귀, 극복인1), 몸, 자기, 커다란 건강, 디오니소스, 생명, 자각, 춤 등 무수히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니체는 인간의 몸을 경시하는 전통적인 서양의 정신세계를 파괴하며 "몸이란 커다란 이성"이고 지금까지 '정신'이라고 부른 것은 '작은 이성이자 몸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의 행위 역시 이 커다란 이성으로서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우리는 몸을 통해 삶을 체험하고 느끼고 의지하며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몸에는 전쟁과 평화, 무의미와 의미, 혼돈과 질서, 욕망과 창조적 신성함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내면에서 이 양자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구성하고 또 다른 사회적 몸과 만나게 된다. 몸은 사회, 문화, 역사의 코드가 교차하고 그것들의 또 다른 의미와 만나는 장소인 것이다. 세계는 단순히 이성의 자기주장의 장이 아니라 몸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인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의 사상과 생각과 느낌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몸 속에 있는 '자기'인 것이다. 니체는 단순히 지식이나 앎과 연관된 의식이 아니라 정서와 의지, 의식이 함께 작용하는 몸의 활동에 주목해 인간의 전인적 건강성을 찾고자 한다. 지성을 강조하며 빠른 지식의 습득과 암기적 지식을 통해 사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그는 의식과 무의식이, 머리와 몸이, 이론과 실천이 분열되지 않은 삶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니체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펼쳐보인다. 그는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다"고 말한다. 의식으로 보았던 것보다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더 심층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고 더 다양한 의미지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나운 들개', '들짐승', '맹수', '내면의 짐승' 등의 비유를 사용하며 우리 내면의 지하실에 있는 사나운 들개가 사랑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새'나 '노래하며 춤추는 여인'으로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정화나 승화의 과정을 수반하는 이러한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변형'이라고 말하는데, 니체는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적 충동이 맑고 깨끗한 생명을 얻을 때 영혼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연금술에서 광물이 황금으로 변화하듯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세상을 환히 비추는 '황금빛 알'로 변하는 심리적 과정을 니체는 문학적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니체철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물질문명 속에서 돈이나 권력, 지위나 명예와 같은 외형적인 것, 표피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삶 전체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와 대면하며 진정한 자기찾기를 해 보라는 것이다. 삶이란 자신의 몸을 읽는 텍스트 해석의 과정이며, 몸의 해독(解讀)이란 자신의 내면세계를 읽는 과정이자 동시에 참된 자기를 찾는 과정이다.
니체는 몸을 읽는 해석 과정을 자기 극복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간이 동물과 극복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라고 묘사하며 인간이란 뒤로 퇴행하여 육체적 만족이나 안일만 추구하는 동물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고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보았다. 밧줄 밑에 놓인 삶의 심연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고독한 용기가 자신을 극복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최악의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극복할 것을 요구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첫 문장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나이 30세에 고향마을의 호수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호수란 자신의 생애사, 즉 삶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생애사에는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즉 의미있고 즐거운 이야기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들, 상처나 마음 아픈 사건들,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이 있다. 고향의 호수를 떠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애사와 직접 대면하고 이를 넘어서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과 만나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진정한 삶의 이치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10년의 극복 과정에서 차라투스트라는 뱀을 친구처럼 목에 감은 채 독수리가 하늘에서 원을 그리며 날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늘의 주인인 독수리란 올라가고 내려가는 비상을 자유롭게 하며 세계를 다차원적으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요, 뱀이란 우로보로스(orobouros)처럼 영원히 순환하는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육체의 눈으로가 아니라 깨어있는 영혼의 눈으로 세계를 볼 때 선악의 이원론을 넘어서 상승과 몰락은 생성의 길에서 하나의 길이라는 지혜를 얻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를 얻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니체는 제1부 첫 문장에서 인간의 정신의 발달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구분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욕구하는 대로 아무런 비판의식이나 성찰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즉 마치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당위적 세계의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은 마치 사자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기존의 규범적 세계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요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짊어지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러나 니체가 요구하는 궁극적인 단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유희할 수 있는 존재의 단계다. 이는 삶의 부정과 긍정, 선과 악, 미와 추를 넘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성스럽게 긍정하는 탈자의 경지이다.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을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유희하는 정신의 경지란 무엇일까? 니체가 극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 니체가 찾고자하는 자기란 무엇일까?
니체가 찾고자 하는 어린아이란 극복한 인간, 즉 극복인을 말한다. 이는 외형적 위선이나 세속적 가치를 벗어던지고 선과 악 속에서 '선악의 저편'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정립한 사람이며 인간 속으로 들어가 보편적 인간성을 획득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강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는 바다와 같이 인간세계에 살면서도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는 영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이란 산 위에서 비바람과 뇌우를 맞으면서도 크고 묵묵하게 장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소나무처럼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육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기 극복과정은 언제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으로 귀환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시에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창출시키는 창조작업이기도 하다.
니체는 돌 속에 잠자고 있는 형상을 망치로 깨어내 자신을 완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라는 예술작품을 조각하는 이러한 행위를 그는 '스스로 생산하는 예술작품'이라고 부른다. 고독 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조각하고 스스로 삶을 걸어지는 이러한 행위 속에 보다 높은 자기가 형성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더 나아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때, 그는 우리가 인간의 심연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라는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 정신적인 힘이 있는 사람만이 샘과 같이 청량한 영혼의 소리를 들으며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인간에 대한 건강한 사랑이란 자신에 대한 긍정 위에 서 있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귀하게 여겨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또 다른 사회적 몸으로서 타인이 겪는 삶의 고통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그들과 건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저서를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철학적 자서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근본사상이란 '영원회귀'이며, 디오니소스 개념이 이 책의 최고의 행위가 되었고, 여기에서는 '커다란 건강'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사실, 생성의 시간 고리 안에서 모든 것이 영원히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사실, 절대적으로 고정된 진리는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 앞에서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생성의 과정을 직시하고 매 순간 존재가 시작된다는 그리고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는 역설을 깨닫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허무주의 안에서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방식이다.
이 세계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라는 커다란 뱀이 목구멍으로 들어올 때 그 뱀의 머리를 물어뜯어 뱉는 행위는 매 순간 그 어느 곳도 새로운 진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라는 자각을 동반한다. 영원 속에서 존재하는 순간이 순간의 영원으로 바뀌는 경계가 바로 생명이 현재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각을 낳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이 곧 생명이 편재해 있는 영원이다.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란 변화하고 생성소멸하는 세계의 과정 속에서 이를 그대로 긍정하고 또한 생명의 언어를 통해 그러한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혼의 생명으로 세계가 우연의 무대라는 것을, 모든 것이 고리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는 지혜의 춤을 추게 된다.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불안에서 하나의 고정된 절대적 진리를 찾으려는 병자가 아니라 생성 속으로 뛰어들어 우연과 필연, 나와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건강한 영혼을 지닐 때 우리는 진정 사유의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또한 자신을 넘어 웃는 법을 배우라고 말한다. 자신을 극복하고 세계에 대해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을 말할 수 있는 자는 정신의 춤을 추며 건강한 웃음을 웃게 된다. 자신 안에서 모든 어두운 그림자가 통합되어 서 있는 지점이 바로 정오이다. 자신의 열등감, 상처, 아픈 기억을 치유하고 건강한 몸으로 내적 통합을 이루며 사는 사람만이 어두운 그림자가 없는 밝은 정오에서 생명의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다. 이 춤은 자신의 몸으로 추는 영혼의 춤이자 동시에 삶의 춤이기도 하다.
하나의 음악과 같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있으면 내게는 삶의 음악이 들리는 듯 하다. 선과 악, 어둠과 빛, 우상과 자유, 고통과 생명, 기만과 진실성, 고독과 즐거움, 우연과 필연, 의미와 무의미, 무지와 깨달음, 오류와 진리, 상처와 치유 등 삶과 연관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정신 속에 공명현상을 일으키며 음악처럼 울려퍼지는 것이다.
현대무용을 창시한 이사도라 던컨이 이 책을 끼고 살면서 자유분망한 무용의 경지를 창출시킨 것도, 토마스 만(Thomas Mann)이나 조이스(James Joyce), 발레리(P. Valéy)와 같은 작가들이나 뭉크(Edvard Munch)나 피카소(Pablo Picaso),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클레(Paul Klee)와 같은 예술가를 포함하여 수많은 현대의 지성인들이 니체에 몰두하는 이유는 니체의 언어가 삶의 고통과 치유를 그려내는 생명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스 올데의 그림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융, 아들러, 랑크 등 인간의 영혼을 탐구하는 현대의 심층심리학2)이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푸코나 들뢰즈, 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사상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지금까지 이성중심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던 서양 정신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몸철학, 건강의 철학, 생명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3) 현대의 심층심리학자들은 니체에게서 병들어 있는 삶을 치유할 수 있는 건강에의 의지나 삶에의 의지의 철학을 발견하였고, 비판 이론가들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들은 서양 근대의 병든 문명을 비판하고 새로운 탈이성적인 사유문법을 찾았던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현대에도 고전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 안에 고대 철학에서 현대 철학까지 모든 서양 철학사의 주제나 논쟁거리가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변주적 형식의 해석이 현대에도 살아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현대 지성의 살아있는 샘이다.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 책은 서문에서 제4부까지 모두 90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연속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고, 또 상징과 비유가 많이 나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니체가 마지막에 자신의 저서들을 정리한 글 『이 사람을 보라』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장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여기에서 니체가 어떤 배경에서 그리고 어떤 철학적 의도로 이 책을 썼으며 그 책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가 설명되어 있다. 다른 니체의 책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2. 이 책에 나오는 비유나 상징, 패러디 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책에 나오는 상징이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 정신사의 배경과 그 안에서 사용된 상징 및 상징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가령 뱀이라는 단어가 어느 문맥에서는 순환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진리의 상징으로, 또 어느 문맥에서는 허무주의의 상징으로 읽힌다. 또 머리말에 나오는 고향 마을의 호수란 인간의 개인사를, 즉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애사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 물, 호수, 강, 바다는 무의식의 내용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 정신분석, 미학, 정치학, 종교학 등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 국내에 나와 있는 상징사전을 이용해 상징이나 비유의 의미맥락을 살펴보는 것도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3. 이 책과 서양 정신사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이 책은 서양의 전통적 사상과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 의문부호를 붙이며 니체 자신의 몸철학이나 생명(디오니소스)의 철학을 제시하는 고전이다. 니체는 서양 정신사 전체와 투쟁하며 몸이나 현실을 긍정하는 새로운 미래의 철학을 구상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니체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이 책에 다루어져 있다. 몸의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서양 정신사 전체와 접속되는 경이로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지음,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3
1) '극복인'이란 독일어 'Übermensch'의 번역어다. 영어권에서 이 용어가 처음에 'superman'으로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대체로 'overman'으로 번역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금까지 '초인'으로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음역을 하여 그대로 '위버멘쉬'로 쓰기도 하고 '극복인'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나는 이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니체적 의미에서 '극복인'으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2) 심층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Psüchoanalyse), 융의 분석심리학(die analytische Psychologie),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Indiviual-psychologie), 랑크(Otto Rank)의 의지치료 등 인간의 심리적 세계에 관심을 갖고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련의 현대 심리학의 경향을 일컫는다.
3) 생명, 건강, 몸개념을 중심으로 니체사상을 해석한 책으로, 김정현,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책세상, 2006)이 있다.
술에 절어 겨울잠 자던 술고래들은?
글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저 숲속 깊은 곳으로 가면 무가당 담배 클럽이 있다네,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애연가 클럽으로 알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끊으려는 금연 동맹 정도로 아는데, 무가당 담배 클럽은 도심에 호랑이를 풀어놓기 위한 시민 연합과 차라리 그 성격이 비슷하다네, 얼음이 물이 되고 종달새가 우는 봄이 오면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 봄을 맞이하여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지난 겨울 클럽에서 읽던 책들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서 떡을 만들어 먹는 일,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 맥주의 강을 망치로 부수어 마시는 일 그리고 그 강물 속에서 술에 절어 겨울잠을 자던 술고래들을 낚시하는 것, 그렇다면 술고래들의 겨울잠이 무가당 담배 클럽에 무슨 해를 끼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지만 얼음 맥주의 강에서 얼음장을 깨고 술고래들을 낚는 일은 너무나 재미있는 일이라네, 술고래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무가당 담배 클럽의 마을에는 기차가 드나드는 작은 역도 하나 생겨났지, 하루에 두 번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올 때면 술고래들은 잠에서 깨어나 펄쩍펄쩍 뛰지,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거라네, 술고래들은 아마 도시로 팔려나가 사람들을 위해 얼음 맥주의 호수를 망치로 부수는 일을 하겠지, 더러는 커다란 수족관 같은 데서 술 마시고 담배 피지, 더러는 커다란 수족관 같은 데서 술 마시고 담배피우는 연기를 하기도 하겠지,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는 올해도 상당한 숫자의 술고래를 도시와 계약했다니, 얼음이 물이 되는 봄이 오면 무가당 담배 클럽의 술고래 낚시가 더욱 바빠지겠네
-시 <무가당 담배 클럽에서의 술고래 낚시> 전문
박정대의 시들은 청춘의 재담과 경구들, 그리고 청춘의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시들은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의 한쪽을 가녀리게 붙잡는 유목민의 악기인 마두금(馬頭琴) 선율과 닮아 있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고독하고, 조금은 우울하다. 그의 상상력이 지칠 줄 모르는 상심과 저항의 급류와 희망 없는 기다림에서 발효되기 때문이다. 그의 시들은 리듬을 절제하기보다는 난만하게 풀어헤치고, 규범의 당위를 따르기보다는 무규범적으로 자유롭다. 그것이 젊음과 낭만의 생태학적 인식을 노래하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은 “우연의 음악이 바람의 국경선을 넘나드는 곳”(〈무가당 담배 클럽과 바람의 국경선〉)에 있다. 그 클럽에는 무국적자, 이탈자, 무정부주의자들로 붐빈다. 시인은 술꾼들과 지독한 애연가들을 회원으로 받는 그 클럽의 핵심 요원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을 차라리 청춘의 망명 정부라고 해 두자. 그곳의 봄맞이 행사는 “지난 겨울 클럽에서 읽던 책들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서 떡을 만들어 먹는 일,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 맥주의 강을 망치로 부수어 마시는 일 그리고 그 강물 속에서 술에 절어 겨울잠을 자던 술고래들을 낚시하는 것”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들은 봄에서 시작하여 가을까지 줄기차게 술을 마시고 스스로 맥주의 강으로 흐른다. 겨울이 되면 그 강은 얼어서 “얼음 맥주의 강”이 된다. 봄이 되면 클럽의 회원들은 망치로 얼어붙은 얼음 맥주의 강을 깨고 마신다. 해마다 그러기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무가당 담배 클럽”은 술고래들의 인공 낙원이다. 술고래들은 술이 불러오는 취기 속에서 그들의 천국을 본다. 술과 담배는 나이든 자에게는 여러 취향 중의 하나이지만, 젊은 자들에게는 생존의 불안과 고달픔을 해소하는 유일한 기호가 된다. 왜 질풍노도 시기의 젊은이들은 그토록 술에 기대는가. 술은 불안에 지치고 미래에 절망한 자의 가슴을 뛰게 하는 노래며 피를 덥히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유리 감옥에 갇힌 포도주의 혼이 박복한 인간들에게 빛과 우애의 노래를 들려준다고 말한다. 포도주는 반은 한량이고 반은 군인의 영혼을 가졌다. 그것은 얼어붙은 슬픔은 녹여 주고 사랑과 영광은 무럭무럭 자라게 한다. 들어 보라, 술의 자부심 넘치는 노래 소리를. “나는 조국의 영혼이며, 반은 한량, 반은 군인이라오. 나는 일요일의 희망, 노동은 번영의 나날을 일구고, 나는 행복한 일요일을 만들어 준다오.”(《포도주 예찬》, 보를레르 외)
클럽의 회원들은 이 취기의 연대 속에서 우정을 다지고, 저 68혁명의 주역들이 그랬듯이 마오와 체의 생애를 흠모하고 기린다. 사랑을 원하나 사랑을 얻는 법을 모른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 나는 대답한다, 백 년 동안 고독해지세요”(〈버찌는 벚나무 공장에서 만든다〉) 술이 깬 뒤의 청춘은 초조한데, 시인은 그 초조함의 근거를 이렇게 밝힌다. “너무 빨리 완성되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음악들〉). 완성은 때가 되기도 전에 너무 빨리 와 버렸다. 이 어긋남, 너무나 많은 우연의 불일치들이 생을 망쳐 버린다. 청춘은 그 불길한 징후들과 싸우는 시기다. 그 싸움의 도구들이 담배와 술이다. 청춘은 담배와 술의 힘을 빌려 문지방을 넘는다. 그 문지방을 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게 청춘이다. 시인은 견고한 것, 아울러 고독의 문턱이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고독이 이렇게 견고할 수 있다니 /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사곶 해안〉). 사랑과 혁명도 그 문지방을 넘어서야 한다. 모든 진경은 문지방을 넘어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그 문지방을 넘어서면 “또 다른, 생의 긴 활주로를 하나 갖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 활주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순간과 영원 사이에서, 소멸과 영겁회귀 사이에서, 청춘을 지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륙한다는 것은 권태와 우울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올라 기성세대의 일원에 소속되어 버리는 것이다.
박정대(1965~ )는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몇 해 전 한국시인협회에서 100여 명의 시인들과 함께 독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박정대를 처음으로 보았다. 아니, 그전인지도 모른다. 밥 딜런의 노래와 장만옥의 영화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과 체 게바라와 페루와 카뮈의 오랑과 로멩 가리를 사랑하는 청년은 독도로 향하는 선박 안에서 우울한 얼굴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배는 동해의 거친 파도에 흔들리고 있고, 그 안에서 “밥 딜런의 노래 듣고 싶어,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42번 국도를 지나왔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고 노래했던 시인은 소주로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담배를 피웠다. 나는 굳이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그에게 꿈을 묻지 않았다.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피로감에 젖은 듯한 그의 얼굴은 너무나 많은 꿈을 꾸는 자들이 지닌 낭만적 질병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때 나의 꿈은 저 불란서의 뒷골목에나 가서 푸른 눈의 여자와 놀다가 객사하는 것 // 또 한때 나의 꿈은 아무도 모르는 고장에 가서 포플러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가는 것”(〈집으로 가는 길〉) 따위다. 낯선 고장에서 객사를 꿈꾸는 것은 젊은 자의 특권에 속한다. “무가당 담배 클럽”의 회원이라는 박정대는 “피의 적군파”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는 모든 길 위에 있었고,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었다. “불꽃의 선(線), 끝없이 움직이는, 일렁이는 / 발광하는 생(生)”이었기에 어디에도 안주할 수 없다. 단 한 번의 사랑과 불멸의 음악을 꿈꾸는 청춘은 어디서나 고달프고 어디서나 고독하다. 스무 살이어서 청춘이 아니라 방황하기에 청춘인 것이다. 피로와 고독 속에서 제 불행의 지도를 넓히는 이들이 바로 청춘들이다. 사랑을 잃고, 새로운 사랑이 오기 전까지,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빠진 청춘들은 “간짜장처럼 쏟아지는 어둠”을 비비면서 고작해야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음악들>)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글쓴이 장석주님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같은 해 동아일보에 문학평론이 입선되어 시인과 문학평론가의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이다. 그동안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등의 시집을 내고, 《20세기 한국문학의 모험》(전 5권) 등 50여 권의 책을 냈다. 지금은 국악방송에서 생방송 <장석주의 문화사랑방>을 진행하고 있다.
2009년 0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