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학교 가는 길을 매화와 수선화가 점령했다. 땅과 하늘을 차지하고 벌들을 부르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그늘에는 아직도 숨죽인 꽃망울들이 눈치를 보고 있다. 담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사정이 다르다. 바람막이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다르다. 햇빛 잘 드는 곳과 바람 많은 곳이 다르다. 꽃샘추위를 염려하는 나무는 함부로 꽃잎을 내밀지 못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나무들이 봄이 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쭈욱 내민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은 매화가 먼저 점령했고 바람 많은 곳은 아직도 먼나무 붉은 열매가 버티고 있다. 큰 길가는 금잔옥대 수선화가 점령했고 오솔길에는 아직도 제주 수선화가 당당하게 버티고 있다. 오늘처럼 따뜻한 날은 큰 길보다 오솔길을 걷고 싶다.
평생학교에서 꿈섬을 지나 도체비빌레와 개끄리민소 아래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가는 나의 산책길이 있다. 월라봉과 황개천 사이 이어도사랑밭까지 가는 오솔길이 있다. 이 올레길에 아직도 제주 수선화가 많다. 가로수 길에 심어진 금잔옥대 수선화와 달리 자연에서 자라는 제주 수선화는 풀덤불이나 가시덤불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잠든 사이에 피었다가 고사리나 억새 혹은 찔레에게 자신의 하늘을 내어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땅 속에서 숨죽이며 겨울과 새봄을 준비할 것이다.
오늘은 낌새가 수상쩍어 가까이 가서 보니 제주수선화와 금잔옥대수선화가 신혼살림을 차렸다. 문구멍으로 몰래 훔쳐 보아야 할 첫날밤에 문을 활짝 열어버린 듯 서로의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들은 땅 속에서 열심히 자식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분명히 식구가 늘어날 것이다.
수선화와 잘 어울리는 열매가 있다. 먼나무 열매가 그렇다. 먼나무 붉은 눈빛이 아름답다. 수선화와 먼나무는 천생연분이다. 그런데 같은 먼나무인데 잎을 모두 떨구어버린 놈이 있고 아직도 잎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놈들이 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