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에게 보냅니다 2부 배진성 꿈삶글 17
겨울나무가 모래시계처럼 몸과 영혼을 뒤집듯이, 겨울산도 몸과 영혼을 남몰래 한 번 뒤집는다. 나도 겨울 한라산에서 몸과 영혼을 뒤집어본다. 문태준 시인의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를 생각한다. 제주도에서 살면서 쓴 것들인 듯하다. 문태준 시인에게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 시와 글만 잘 쓰는 시인이 아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고 사람을 대하는 인격이 부처님을 닮았다. 나도 곁에서 좋은 도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겨울 한라산은 산문이 아니라 시(詩)다. 시는 길게 쓰면 안 된다. 겨울 한라산을 올라보라. 시는 읽기만 해서는 모른다. 시는 직접 살아보아야만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장석주 시인을 좋아했다. 요즘에는 장석주 시인과 함께 산다는 박연주 시인까지 좋아진다. 나는 아직 박연주 시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나는 한라산에서 시를 본다. 시인을 본다. 시인의 마음을 본다. 겨울 한라산이 따뜻하다. 겨울 한라산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겨울 한라산에서는 그냥 겨울이 되면 된다. 한라산이 되면 된다. 시가 되면 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이다. “뭣이 중한디? 뭣이 중하냐고!”라는 대사로 유명해진 <곡성>이란 영화의 무대인, 바로 그 곡성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부끄럽게도,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중학교까지 다녔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곡성은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 나오면서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옛날의 곡성역이 그 영화에 나오고 기차마을로 조금씩 알려진 이후에 세워진 표지석이다. 나의 고향집 바로 앞에는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삼기천이 흐른다. 비가 많이 오면 삼기천의 물이 우리 집에까지 들이닥칠까 싶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된 다음에 가보니 ‘의동 마을, 원등 1구’라는 이름과 함께 ‘연어의 종착역’ 이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몰라도 꼭 나를 위해서 지어준 이름인 듯, 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았던 삼기천에서 아직껏 연어를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연어의 종착역’이라는 이름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어와 속성이 비슷한 은어는 많이 보았고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한 연어와 은어와는 정 반대의 속성을 지닌 장어도 많이 잡아보았다. 연어와 은어는 강에서 태어나고, 연어는 먼바다에서 살고, 은어는 가까운 바다에서 살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새끼를 낳고 죽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민물장어라고 말하는 뱀장어들은 강에서 태어나지 않고 모두가 바다에서 태어난 놈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어와 은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장어의 산란과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민물에서 자라는 민물장어들의 산란 장소를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필리핀 인근의 깊은 바다에서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700~1,200만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고 알려져 있다. 알은 부화하여 렙토세팔루스라 불리는 버들잎 모양의 유생기를 거쳐 실 모양의 어린 실뱀장어로 탈바꿈하며, 2~5월 사이에 무리를 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민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주) 뱀장어
민물장어는 뱀장어라고 한다. 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뱀장어는 뱀장어목 뱀장어과에 속하는 민물고기로, 장어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올라가 생활하는 회류성 어류이다. 그러나 다양한 서식환경과 염분농도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때로는 일생을 강이나 바다 어느 한쪽에서만 보내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이 식용으로 소비하는 뱀장어는 주로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실뱀장어를 그물로 잡아 양식을 통해 얻으며, 여름철 스태미나 음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몸에는 타원형의 미세한 비늘이 있지만 살갗에 묻혀서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래턱이 위턱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등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 꼬리지느러미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끝이 뾰족하며, 배지느러미는 없다. 옆줄에 있는 감각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멍)이 뚜렷이 보인다. 몸 색깔은 사는 장소나 시기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난다. 민물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따뜻한 민물에서 살며, 육식성으로 게, 새우, 곤충, 실지렁이, 어린 물고기 등을 잡아먹는다. 낮에는 돌 틈이나 풀, 진흙 속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움직이는 야행성이다. 간혹 밤에 뭍으로 올라와 이동한다는 보고도 있다.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굴이나 진흙 속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다시 활동한다. 수컷은 3~4년, 암컷은 4~5년 정도 지나면 짝짓기가 가능해지고, 8~10월에 짝을 짓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다. 이때에는 생식기관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퇴화하면서, 굶은 상태로 산란장소를 찾아 이동한다. …,
내가 나의 고향집이라고 말하는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식구들이 직접 지은 집이다. 마을 뒷산인 심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로 다듬어서 서까래로 쓰고, 그전에 살던 집 뒤꼍에서 자라던 거대한 미루나무를 잘라 대들보와 상량 목으로 만들어 올렸다. 그 나의 고향집은 마당이 손바닥만 한 아주 작은 집이고 우리 식구들의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그 우리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삼기천 바로 맞은편 둑 너머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천 국유지에 불법으로 집을 짓고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기천을 경계로 하여 면소재지 쪽이 원등리이고 맞은편 마을이 월경리였다. 원등리는 삼기천과 바로 붙어 있었으며 1구에서 5구까지 마을 다섯 개가 모여 있었고, 월경리는 삼기천에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호남고속도로 공사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래방천에 붙어있는 왕산을 깎아내리는 공사가 가장 큰 난공사였는데 그곳에서 가져온 나무뿌리로 뿌리 탁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포클레인이 없어서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에 가로로 장착된 긴 쟁기삽날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이어서 더욱 공사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 불도저는 그 후로도 가끔 신작로 흙길을 판판하게 다듬어주는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대부분 포클레인으로 흙을 푹푹 파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쟁기 형식으로 흙을 밀어내는 방식으로 공사를 하였다. 그러니 그 큰 산을 밀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공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호남고속도로는 월경리 쪽에 붙어 있었다. 또한 월경리는 1구와 2구가 있었는데 2구는 더 깊은 산속에 뚝 떨어져 있어서 따로 ‘행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삼기천 둑 공사를 하면서, 물길을 반듯하게 만들면서, 둑 너머에 공터가 좀 생겼던 모양이었다. 정미소를 하시다가 잦은 고장과 큰 사고로 망한 아버지께서 그 공터에 불법으로 대강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집은 외딴집이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월경리에 속해 있었지만 거리상이나 생활상의 영역은 원등리 1구에 더 가까운 생활권에서 살았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향집과는 징검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지금은 그 옛날 집터도 둑 높이까지 매립이 되어 그 위에 새로운 남의 집이 지어져 있다.
나의 기억은 징검다리 건너 그 옛날 집에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나는 또 그 바로 전에 살았었다는 ‘행경’이란 마을에서 정미소를 할 때 태어났다고 들었다. 원등리 2구에 있는 좀 큰 정미소에서 망하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아주 작은 정미소를 하였는데 바로 그때 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월경리 1구 시절, 마당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깊은 외딴집이었던 바로 그 옛날집에서는 많은 기억들이 흘러넘친다. 마당의 높이는 둑 너머 삼기천 바닥과 같았다. 그러니까 둑이 무너지면 외딴집은 바로 물에 잠기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우리 식구들은 그렇게 위험하고 외로운 집에서 꽤 오래도록 쓸쓸하게 살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튼튼하고 커다란 미원박스에 각종 생활용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시며 봇짐장사를 하셨다. 먼 마을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밤늦게 돌아오시기 일쑤였고 다음날 돌아오시는 날도 많았다. 내가 아기였을 때에는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멀리 장사를 나갈 때에는 잠자리가 불편하여 가장 힘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잘 울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동생은 잘 우는 바람에 주인집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먼 밖으로 나가 동생을 안고 많이 울기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장마철에는 둑이 자주 무너지기도 하였다. 월경리로 건너가는 다리 아래쪽이 자주 무너졌다. 그럴 때마다 무서운 물살이 넘어와 흙탕물이 우리 집을 덮쳤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들은 원등리 1구 회관으로 피신하여 며칠씩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딴집에는, 대문도 없고 담장도 없어서 아무라도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특히 월경리에 사신다는 ‘꽃본듯이’라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밤마다 우리 집 시멘트 마루에서 남몰래 주무시는 바람에 많이 무서웠다. 그 할아버지는 정신이 좀 이상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나에게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동네 청년들에게 끌려가 산에서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서 좋았는데 그때부터는 다시 동냥아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팔이 없거나 눈알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쇠갈쿠리 손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저 무섭기만 하였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이 함께 모여 있는 동네에는 이미 전기가 들어왔는데 외딴집이었던 우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불법건축물이어서 전기 신청도 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때가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날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며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는 원등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월경리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나의 위치와 소속이 애매해서 나는 외톨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여러 가지 짐승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특히 물가에서 사는 바람에 오리를 많이 길렀다. 오리뿐만 아니라 닭과 토끼와 염소 그리고 나중에는 돼지와 소와 말까지 길렀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오리가 한 마리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리는 낮에 냇물에 나가서 먹이를 잡아먹고 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알도 낳고 잠도 자고 또다시 새벽에 물가로 나가 놀았다. 오리는 닭보다 훨씬 빨리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꾸만 동네사람들을 불러와 오리를 잡아서 함께 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빨래 줄에 오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오리 피가 몸에 좋다고 오리를 산 채로 빨래 줄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목을 잘라서 오리 피를 그릇에 받아내고 계셨다. 그때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가 많이 울었다.
그리고 또한 어느 날 아침에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사서 내가 기른 돼지를 잡아가버렸다. 그 전날 밤 아버지께서, 노름판에서 내 돼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노름을 하시다가 다 잃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많은 이야기들은 평생 말해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물가에서 살아서 그런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서 먹었다. 장어를 잡아먹고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참게를 잡아먹고 자라까지 잡아서 먹었다. 물론 피라미와 붕어와 중태기와 민물새우도 많이 잡아서 먹었다. 특히 저수지 물을 빼는 날이면 그야말로 물고기 천지였다.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 장어와 잉어들이 수두룩했고 미꾸라지는 처치가 곤란할 정도로 너무 많았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께서는 섬진강에 가셔서 은어들을 잡아오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투망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 투망질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불법이어서 함부로 할 수가 없다. 투망질뿐만 아니라 어른들은 자동차 배터리를 등에 짊어지고 대나무 끝에 장착한 구리선으로 전기를 관통시켜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이들은 자전거 바퀴로 돌리던 작은 발전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들을 잡았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까지 민물낚시는 기본으로 하였고 겨울에는 주로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잡곤 하였다. 그리고 족대라고 하는 작은 그물로도 잡고 맨손으로도 돌 속이나 풀 속을 뒤져가며 물고기들을 잘도 잡아서 먹곤 하였다. 그때는 워낙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어서 물고기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며 산짐승들도 닥치는 대로 잡아서 먹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동물학대죄로 모두 잡혀갈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뱀이며 개구리까지 잡아서 먹고, 고라니며 산토끼며 꿩들까지 잡아서 먹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