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1942년 6월. _추정, 윤동주)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가마목)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쩨앵,
( 1936년 10월, 윤동주)
선물을 받았다. 야간근무 마치고 돌아오니, 윤동주 시인이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모셔온 시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나의 잠은 없을 듯, 윤동주 시인과 대화를 시작한다. 우리들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는데, 우리들의 봄은 올 수 있을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이 책상에서 봄으로 피어 있다. 이 책은 집필 순서로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대강 훑어보고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나는 이미 다른 정본 전집에서 순서대로 읽은 뒤라서, 이번에는 거꾸로 읽는다.
앞표지에 <봄>이 노랗게 피어있다. 윤동주 시인의 남은 작품 중에서 가장 나중에 쓰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6월에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그 이후의 작품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들은 찾지 못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니 아마도 어딘가에서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혈관 속에도 윤동주의 피가 흐르고 있을까? 겨울이 이제 막 시작 되었으나 우리들에게는 또한 동지가 멀지 않았다. 동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밤의 길이도 조금만 더 길어지면 정점을 찍고 다시 짧아질 것이다. 밤이 다시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들의 봄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자, 이제 우리들의 봄이 멀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에 나는 먼저 참회록을 써야만 한다.
1. 정방폭포 윤동주를 읽는다
2. 정방폭포가 윤동주를 읽는다
3. 윤동주가 정방폭포를 읽는다
4·3과 평화가 정방폭포를 찾아간다
정방폭포는 윤동주를 읽고 있다
검은 주상절리의 서랍을 열어본다
새하얀 무명천이 하늘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무명천 할머니께서 수의를 만들고 계시는지
만가(輓歌)처럼 베 짜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주상절리 서랍에서 흑백사진 한 장 꺼낸다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전분공장과 창고들이 보이고
멀리, 목호(牧胡)들의 범섬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물빛과 무명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하얗고
발을 담그고 세수도 하였을 것만 같은 여울물소리
더 이상 발을 디딜 수 없는 노래는 비명(悲鳴)이 된다
길을 잃고 느닷없이 단애(斷崖)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
서귀, 중문, 남원, 안덕, 대정, 표선, 한라산 남쪽 사람들
태평양을 헤매다가 75년 만에 작은 집으로 돌아온다
불로초 공원에 만든 그 작은 공간으로 돌아오는 영혼들
타고난 제 삶도 끝까지 살지 못하고 벼락처럼 떠나버린
그 많은 정방폭포의 사람들
광풍에 느닷없이 길이 끊어져 허공에 발을 딛고
한꺼번에 바다로 추락해 버린 목숨들, 오늘도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바다에서 길을 찾고 있는 사람들
그중의 한 사람을 따라서 긴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윤동주를 읽던 정방폭포가 젖은 몸으로 따라나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정방폭포는 한라산 남쪽 최대의 학살터였다. 75년 만인 2023년 5월에 비로소 서복 불로초 공원 한쪽에 작은 4·3 희생자 위령공간이 마련되었다.
정방폭포에서 베틀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만가(輓歌) 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자장가소리도 들린다. 정방폭포에서 원자폭탄 떨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일본이 항복하는 소리도 들린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왜 제주도의 폭포는 남쪽에만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북쪽의 폭포들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이 요즘 시인이라면 어떤 시를 쓰고 있을까? 나는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며 나의 꿈과 나의 삶과 나의 문학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점검하며 순례를 떠난다. 윤동주의 거울 하나 들고서 순례를 다시 시작한다.
"하늘을 보지 못해서 부끄럼이 너무 많다. 나는 지금껏 죽어가는 것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지금껏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을까? 나는 이제라도, 나한테 주어진 길이 아니라,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길을 찾아서 걸어가고 싶다. 오늘 밤에도 나의 별들은 잠들지 못하고 추위에 떨고 있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1940년 12월 윤동주)
사실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는 이 시 제목처럼 '병원'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사후에 고이 보관해 왔던 시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지인 정병욱은 당시의 그의 말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후에 시집의 제목은 우리가 익히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되어 출간되었다. (내가 홀로 추측해 보건대, 윤동주 시인은 아마도 처음에는 <병원>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서시'를 쓰면서 책 제목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다. 책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핵심 단어들을 나열해 놓은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즉, 책의 제목은 서시의 키워드만 뽑아서 나열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병원이다. 지금은 어디가 가장 아픈 곳일까? 지금은 우리들의 어머니인 지구가 가장 아픈 병원이다. 윤동주 시인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들과 함께 살아있다면 아마도 아픈 지구를 먼저 노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늙은 의사는 아직도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옛날에는 사람만 병들고 자연은 건강했지만 이제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까지 병이 들었다. 이제는 사람과 지구를 함께 구해야만 한다."
오늘은 동광리 무등이왓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날
3년째 오늘은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고향 가는 날
무등 타고 놀던 아이들 대신 지박령(地縛霊)들만 사는 곳
아랫마을 간장리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드는 날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빈 집터에 조를 함께 심는 날
영귀소리에 불려 나온 조릿대밭 영혼들 술 한 잔 받는 날
오메기떡 만들어서 빚은 고소리술 한 잔 하는 날
그때의 사람들처럼 큰넓궤에서 50일 동안 살다 나온 술
3만 명의 영령들이 함께 맛을 본 고소리술 얻어 마시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해원과 상생과 평화의 바람이 되어 스스로 부는 날
75년 동안 한 곳에서만 붙들려 살았던
수박령(水縛霊)과 지박령(地縛霊)이 만나는 날
정방폭포의 물소리도 바람으로 함께 따라서 오는 날
75년 만에 마련한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에 모였던
억울한 영령들이 무등이왓으로 한꺼번에 따라서 몰려오는 날
수박령(水縛霊)의 몸에서는 아직도 너무 많은 비가 내리는 날
안덕을 따라서 대정, 중문, 서귀, 남원, 표선이 따라오는 날
지박령(地縛霊)과 수박령(水縛霊)이 견우직녀처럼 만나는 날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만들려면 오늘은 조 모종을 옮겨 심어야만 한다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지난 5월에 만들어진 정방폭포 4·3 위령 공간 때문이다 물의 영혼으로 살았던 수박령들이 불로초 공원으로 한꺼번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수박령들이 동광리 지박령을 만나려고 한꺼번에 귀향하여 얼싸안고 울기 때문이다
동광리 무등이왓 땅살림 코사를 복지회관 실내에서 지낸다 안개비로 가득한 조 밭으로 가서 영귀소리로 원혼들을 불러 모아 모시고 온다 함박 가득 담긴 생메 위의 청댓잎은 더욱 푸르고, 156개의 술잔이 더욱 빛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비는 문 밖에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조 밭에서 해야 할 땅울림도 안에서 하고 말과 소도 안에서 울고, 김매기와 갈치잡이와 멜잡이도 안에서 하고 안개비는 멀뚱하게 쳐다만 본다
사람들은 점심으로 떡과 국수를 먹고 돌아가고,
나는 홀로 헛묘와 무등이왓으로 젖으며 걸어간다
육신을 찾지 못한 헛묘와 영혼을 찾지 못한 충혼묘지의 배롱나무꽃은 짙은 안개비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니 발자국소리를 듣고 깨어난다 헛묘에서 깨어난 영혼들은 삼밧구석마을로 집을 찾아가고 나는 홀로 무등이왓으로 간다 양잠단지 가는 길가에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검은 표지석이 있다 무등이왓은 입구부터 조릿대들의 세상이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에는 더덕 덩굴이 가득하다 더덕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푸른 조릿대들만 볕뉘라도 건져보려는 듯 뜨물 같은 안개비를 조리질하고 있다 최초 학살터 바로 곁에 광신사숙이 있다 아직도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나는 지름길보다 에움길로 간다 말방에(연자방아)터를 지나 잠복학살터로 간다 말방아는 보이지 않고 태양광 패널들만 안개비를 맞고 있다 무너진 돌담과 조릿대들만 길을 비켜준다 아마도 이 오래된 팽나무가 있는 밭에서 마을 이름이 정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이 팽나무를 오르며 열매도 따먹고 놀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밭을 매었을 것이다 이 팽나무 그늘에서 자치기 하며 놀았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 대신 송악덩굴이 올라가 저물도록 내려오질 않는다 별아이비도 뒤늦게 따라서 올라간다 잠복학살터에서 짚더미와 멍석에 쌓여 불태워졌던 사람들은 지금도 뜨거워서 안개비 속에서도, 훌떡훌떡 뛰어오르고 있다 뒤늦게라도 불을 끄려는 듯 이곳에는 물탱크가 만들어져 있다 이제는 샘물 대신에 농업용수를 퍼올리고 있다 이 물탱크 뒤쪽에 조밭이 있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을 파종하고 키우는 오메기밭이 있다 오늘은 오메기밭 가득 안개비가 흘러넘친다 바람을 조리질하는 무등이왓 조릿대길에 볕뉘가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1938년 9월, 윤동주)
제주 4·3 당시 130여 가구가 거주한 무등이왓은 ‘잃어버린 마을’ 122곳 가운데 가장 큰 마을로, 조와 메밀, 콩 등을 재배했다. 1948년 11월 15일 토벌대가 무등이왓 마을로 진입해 주민 10명을 총살했으며, 21일에는 주민 3명을 총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동광리는 무등이왓(130여 가구)과 조수궤(10여 가구), 시장밧(3 가구), 간장리(10여 가구), 삼밧구석(45 가구) 등 5개 자연마을로 이뤄진 중산간 마을로 4·3 당시 최소한 172명이 희생됐으며, 인근에는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큰넓궤가 있다. 큰넓궤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50일 만에 발각되어 볼레오름까지 도망을 갔으나 모두 붙잡혀 정방폭포에서 사살되었다.
우리 민족은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족속은 더욱 슬픈 족속이다. 탐라국의 예술가들이 슬픈 족속을 위로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서 봄부터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 하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아니, 이미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도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탐라국의 윤동주를 위하여, 탐라국의 송몽규를 위하여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폭포 소리가 들린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정방 모습이 보인다
정방폭포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다슬기처럼
한참을 멈췄다가 다시 올라간다
나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로프도 보인다
나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수염이 아니라
기름이 잔뜩 발라진 검은 쇠줄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계단을 오른다
쇠줄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오른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다
아파트 옥상에는 하늘타리꽃이 피어난다
별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하늘타리의 꽃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고 있다
반야심경(半夜心經)을 염불하고 있다
깊은 밤의 마음을 뚫고 만다라가 핀다
붉게 핀 칸나의 꽃들은 합장을 하고
도라지꽃들은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푸른 고추들의 얼굴에 붉은빛이 돌고
토란잎에 매달린 취우들의 눈빛이 맑다
흙의 가슴에서는 고구마 순의 상처에서
이제 막 뿌리를 만들며 어둠을 뚫는다
땅속에서 반야심경(半夜心經) 소리
하늘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소리
마음속으로 반야반야(半夜般若) 소리
저 멀리 보이는 드림타워에서도
정방폭포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밤을 알아야 낮을 알고
달을 알아야 해를 알고
어둠의 그림자를 알아야 빛이 보인다
나는 이제 반야에서 천천히 줄을 타고 내려온다
260자의 윤슬이 마음의 경전으로 빛난다
마음의 경전 속에서 바다는
파도를 불러 오도송(悟道頌) 하나 읊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 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대게 이러한 뜻이엇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1935년 1월 1일, 송몽규,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당선작)
윤동주에게는 송몽규가 있었다. 나에게는 누가 있을까. 윤동주에게 송몽규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윤동주가 있을 수 있었을까. 나에게 과연 그런 사람이 있는가? 가만히 다시 생각하니 나에게도 송몽규 같은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곁에 있었구나!
정방폭포 암벽에 글자가 있었다 세월이 지워버린 화두가 있었다
정방폭포 소리에 울음이 있었다 바람이 지워버린 눈물이 있었다
정방폭포 가슴에 무지개 있었다 득음의 독공소리 끊이지 않았다
서복 일행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추사선생은 탁본을 하고 있었다
백조 한 마리 날아와 목을 풀었다 흑조 한 마리 날아와 몸을 풀었다
울혈을 토하고 절창을 하는 백조와 살풀이춤으로 길을 터주는 흑조
한라산을 기어서 내려오는 용 한 마리, 바다를 향해 용트림을 한다
정방폭포 위에서 베틀소리 들린다 비단과 무명과 삼베가 흩날린다
무명천 할머니 베틀 노래 부르며, 베를 짜서 수의를 만들어 날린다
정방폭포 아래서 웡이자랑 들린다 비설상 적시는 폭포수 흩날린다
정방폭포 주상절리에서 피아노 소리 들린다 둥둥 북소리도 들린다
삐그덕 탁탁 베틀소리에 깨어나 수의를 입는다 바다가 날개를 편다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윤슬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늘 가득 빛난다
온몸에 바느질자국 선명한 선인장 마을 무명천 할머니의 선창 소리와
북촌리 옴팡밭 순이삼촌, 거친오름 비설상 변병생 어머니 후렴소리에
정방폭포 수박령(水縛霊)들 함께 밤새 부르는 아, 울음의 완창(完唱)
한라산에서 내려온 용 한 마리, 밤에도 쉬지 않고 베옷 입혀 흩날린다
쏴아아 쏴아아 쏴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명령소리는 그치지 않고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오늘 밤에도 그날처럼 비명소리가 나를 울린다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색여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내일)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식 불러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冊床(책상)을 같이 햇든 아이들의 일홈과 佩(패)、鏡(경)、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소녀)들의 일홈과 벌서 애기 어마니 된 게집애들의 일홈과、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일홈과、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노루、「프랑시쓰·쨤」 「라이넬·마리아·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일홈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러워
이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덥허 버리엿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一九四一、十一、五.)* 윤동주
그러나 겨을이 지나고 나의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내일홈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 할게외다。
* 원문에서는 이 날짜 표시가 이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평가를 듣고 나중에 윤동주가 추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방폭포 위에 감옥이 하나 있다
철창살로 만든 감옥이 하나 있다
깊은 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간다
스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다
정방폭포 감옥에서 책을 읽는다
달빛에 어리는 동백꽃을 읽는다
동백꽃이 진다고 슬퍼하지 마라
꽃 진 자리마다 열매를 낳는다
유채꽃을 노래하던 사람들에게
동백꽃 이름표를 달아주는 4월
동백꽃이 지면 지상에 피었다가
동백의 푸른 열매들로 익어간다
육지 것이었던 나는 30년이 지나
이제 겨우 스며들기 시작한다
정방폭포 물소리에 젖으며
달빛처럼 시나브로 스며든다
나도 이제 동백꽃 이름표를 달고
마음이 몸이 될 때까지 스며든다
달빛이 정방폭포에 스며들고
별빛이 제주바다에 스며든다
깊은 밤 함께 깊어져서 밤이 되면
여울물소리와 함께 깊이 스며들면
감옥도 물과 함께 흘러가고 말리라
태평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 되리라
나는 이제 겨우 육지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겨우 섬사람도 아니다
나는 이제 겨우 정방폭포가 된다
나도 감옥도 정방폭포로 쏟아진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가엽서집니다。
도로가 드려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사나이가 미워서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一九三九·九、윤동주
시의 씨앗
바다가 하늘의 서랍을 열었다
하늘의 서랍 안에는
하늘의 눈물이 가득 담겨있다
눈물과 함께 담겨 있을
하늘의 비밀문서를 찾으려고
오늘도 바다는 서랍을 열고 있다
정방폭포 서랍이 끝없이 열린다
하늘도 바다의 서랍을 열었다
바다의 서랍 안에는
바다의 어둠이 가득 담겨있다
어둠과 함께 담겨 있을
바다의 비밀문서를 찾으려고
오늘도 하늘은 서랍을 보고 있다
주상절리 서랍이 여러 곳에 있다
바다는 마래터널 서랍도 열어보고
하늘은 무등산 서랍까지 열어본다
* 우리는 이제 다 함께 힘을 모아서, 숨어 있는 서랍을 열어야만 한다. 숨어 있는 마지막 서랍을 찾아서, 우리는 이제 태평양을 건너가야만 한다.
* 나는 당신이 잃어버린 마을이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나는, 무너진 돌담을 짚고 일어선다. 흔들리는 조릿대를 붙잡고 일어선다. 바람에 섞여있는 정방폭포 소리에 젖으며 일어선다. 멀리서 들려오는 당신의 향기로운 목소리가 나의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당신의 무지개는 잊지 않고 잃어버린 마을까지 찾아온다.
부마에서 그랬고
광주에서 그랬고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총을 쏜다
윤동주 시인은 습작노트 2권과
자선 시고집 1권을 남겼다
윤동주는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무렵부터
날짜를 명기해 가며 습작품을 보관했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불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빛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월라봉 아래에서 산방산을 향하여
나누리 파크에 꽃으로 피어납니다
언제라도 스위치만 올려 주십시오
그리움의 전깃줄 속으로 달려가서
환하게 켜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사랑은 날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은 날마다 꽃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은 언제나 꽃길만 걸으십시오
아름다운 나라에는 공원이 많습니다. 공원이 많은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국립공원이 많은 나라, 도립공원이 많은 나라, 시립공원이 많은 나라, 민간공원이 많은 나라, 크고 작은 공원들이 많은 나라가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서귀포는 공원이 많은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들은 아름다운 공원의 주인입니다. 문만 열고 나가면 공원들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자연이 황홀하게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 함께 공원을 걸어볼까요. 마음 한 번 돌이키면 우리들은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정원은 언제나 우리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기다립니다. 소유와 소비를 넘어 우리들은 이제 공유와 상생의 길을 함께 가야만 합니다.
고구마꽃이 피었다
고구마꽃이 젖을 물리고 있다
꼬리박각시나방이 젖을 빨고 있다
고구마가 땅 속에서 젖을 준다
땅 속에서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