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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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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산 Jan 22. 2024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윤동주 시인과 함께, 너에게 나를 보낸다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었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남몰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들풀이었다 내려다보는 별들의 눈빛도 함께 붉어졌다 어머니는 보름달을 이고 징검다리 건너오셨고, 아버지는 평생 구들장만 짊어지셨다 달맞이꽃을 따라 가출을 하였다 선천성 심장병은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의 비밀은 첫 시집이 나오고서야 들통이 났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비후성 심근증, 심장병과 25년 만에 첫 이별을 하였다 그러나 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바다는 나를 이어도까지 실어다 주었다 30년 넘게 섬에서 이어도가 되어 홀로 깊이 살았다 나는 이제 겨우 돌아왔다 섬에서 꿈꾼 것들을 풀어놓는다 꿈속의 삶을 이 지상으로 옮겨놓는다 나에게는 꿈도 삶이고 삶도 꿈이다 <꿈삶글>은 하나다 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 함께 길을 찾는다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 당선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이어도공화국 01 - 땅의 뿌리 그 깊은 속에서』

『이어도공화국 02 -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지상에서』

『이어도공화국 03 - 길 끝에 서 있는 길』

『이어도공화국 04 – 꿈섬』

『이어도공화국 05 – 우리들의 고향』 

『이어도공화국 06 – 서천꽃밭 달문 moon』 


서시(序詩)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1941. 11. 20. 윤동주)


서시(序詩)



고향집 바로 앞에

연어의 종착역 표지석이 있다

나는 연어가 되어

참으로 먼 길을 거슬러 돌아왔다

나도 이제 너를 만나

붉은 알을 낳아야만 한다  



제1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



윤동주 시인에 관한 자료들은 대부분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에 실려있다. 윤동주 시인이 남긴 자필원고 대부분이 사진자료와 해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윤동주 시인의 숨결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소장할 수 있기를 추천한다.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사진판)』에는 영원한 민족의 청년시인 윤동주의 시와 산문 전집. 윤동주가 남긴 모든 자료가 육필원고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사진판 자필 메모, 소장서 자필 서명>, <시고 본문 및 주>로 나눠 총 219편의 시와 메모, 산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직접 쓴 3권의 자필 시집을 남겼다.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창(窓)』,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이렇게 3권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지막에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잘 알고 있다. 초기에 쓴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와 『창(窓)』은 원고지 노트에 쓴 작품들이고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만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400자 원고지에 쓴 다음, 반으로 접어서 책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 사진 자료에는 접었던 부분을 다시 펴서 촬영한 이미지들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온 겨레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했을 때(1941년 11월 20일)에 쓴 시. 그때 윤동주 시인의 나이는 25세. 그러니까 이 시가 태어난 지 벌써 8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이 시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시인이 쓴 시는 영원히 가슴에 남아, 오늘도 편리함과 탐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들의 양심을 흔들어 깨운다. 지구 온난화에서 지구 가열화로, 기후 변화에서 기후 위기로, 이젠 기후 비상사태란 말까지 들리는 이 시대에 우리들이 꼭 회복해야 할 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들의 하나뿐인 소중한 지구까지 죽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시인이 직접 쓴 육필 원고에는 시집 제목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아래 童舟(동주)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東柱(동주)가 아니라 童舟(동주)라고 썼다. 윤동주의 본명은 윤동주(尹東柱)이지만 작품을 발표할 때는 주로 필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童舟, 童柱, 東柱..., 이 중에서 윤동주 시인이 살아있을 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시집으로 발행했다면, 어쩌면 童舟라는 이름으로 발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육사 시인도 다양하게 '육사'라는 이름을 변주하여 사용했는데, 윤동주 시인 역시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참고로 윤동주의 아호는 해환(海煥)이었다.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 이어도에서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까지



1.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2. 이어도를 아시나요



제주도 서귀포시 해(海) 1번지
이어도를 아시나요
제주도 서귀포시 태평양로 1
이어도 섬을 당신은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이어도를 아시나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섬
하늘과 바다를 이어주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
태평양으로 날아가는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제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섬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뿌리 깊은 섬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의 꿈을 아시나요



3. 노인성이 유숙하는 섬



서귀포는 어디라도 문만 열면 태평양이다

서귀포혁신도시에서 중문관광단지까지
이어도 길을 걷다가 태평양으로 간다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을 만나러 간다
남극노인성이 유숙하는 이어도로 간다

바다에서 해(海)를 본다 물이 아프다
인간들의 욕망이 낳은 쓰레기들의 섬
썩지도 않는 플라스틱 욕망들의 얼굴,

바다 해(海) 글자를 더 자세히 본다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가 아프다
아픈 어머니에게 방사능 오염수까지 먹인다
태평양의 수평선이 트로이목마를 끌고 온다
북극곰의 신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바다와 하늘이 함께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막내아들이
뜨거운 어머니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다
유숙하던 노인성도 곁에서 돕는다
서천꽃밭 꽃감관도 불사화를 가져온다

용궁으로 가는 올레에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노랫소리 들려온다 하늘에는 서천꽃밭이 있고 땅에는 마고성이 있고 바다에는 이어도가 있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노인성과 꽃감관도 떠나지 못한다



4.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한 송이 있다

전설이 낳아 기른 이어도 해양과학기지가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태평양의 배꼽을 찾았다 태반과 탯줄을 잃은 배꼽을 이어도라 불렀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배꼽을 보았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소코트라록(Socotra Rock)'이라 불렀다 하지만 오래도록 이어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꼽을 보고 싶었으나 배꼽을 볼 수 없었다 배꼽에 관한 소문만 무성했다

1984년에 비로소 태평양의 배꼽을 볼 수 있었다 KBS와 제주대학교 해양대학이 파랑도 탐사에 성공했다 한국해양소년단 제주연맹의 파랑도 탐사도 성공했다 파랑도는 그렇게 이어도와 만났다 꿈이 현실로 드러났다 1986년에 암초 수심이 4.6m로 측량되었다 이어도 최초의 구조물  ‘이어도 등부표’를 1987년에 설치했다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하기 위해 1995년 해저 지형을 파악하고 조류를 관측하는 등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2001년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착공에 들어갔다 2003년 6월에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벌써 스무 살 성인이 되었다

해양, 기상, 환경 관측 체계를 갖추고, 해양 및 기상, 파고, 수온 등 해상 상태와 어장 정보, 지구 환경 및 해상 교통안전, 연안 재해 방지와 기후 변화 예측에 필요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있다 무궁화 위성을 이용하여 관측 정보를 제공한다 국립해양조사원에서 데이터 검증을 거쳐 기상청을 비롯하여, 관련 기관에 실시간으로 자료를 제공한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해저 지반에 박은 60m의 기초를 제외하고도 수중 40m, 수상 36m, 총중량 3,400t의 구조물이다 400평 규모의 2층 Jacket형 구조물엔 관측실, 실험실, 회의실이 있고, 기지의 최상부에는 가로 21m, 세로 26m에 이르는 헬기 이·착륙장 외에, 등대시설, 선박 계류시설, 통신 및 관측시설 등과 함께 8인이 15일간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제주도 마라도에서 149Km 가장 먼 해상에 설치된 해양과학기지는 평화의 연꽃으로 피어났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끝없는 도전의 상징이 되었다 제주도 생성시기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60만 평의 이어도 소코트라 암초,  그 위에 세워진 76m 높이의 철탑 위에 400평의 인공섬을 만들었다 사랑의 연꽃을 피웠다 3,400톤의 쇳물로 평화의 심장을 만들었다 태평양의 배꼽에서는 이제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린다 잃어버린 탯줄과 잃어버린 태반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



5.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



이어도는 태평양에 있다

이어도 해양과학기지는

북위 32° 07′ 22.63″ 동경 125° 10′ 56.81″에 있다


이어도는 한․중․일 3국 중 한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의 유인도 마라도(馬羅島)에서 남서쪽으로 80해리(149km)

일본의 도리시마(鳥島)에서 149해리(276㎞) 

중국의 서산다오(余山島)에서는 155해리(287㎞) 떨어져 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의 거리는 236해리(436㎞)에 불과하다 배타적 경제수역(EEZ) 200해리(370.5㎞)의 두 배인 400해리(741㎞)가 되지 않을 경우 양국은 협상을 통해 해양경계를 획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인 획정 원칙인 ‘중간선 원칙’을 적용하면 당연히 한국의 관할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자꾸만 자기들 바다라고 우긴다


이럴 때는 시인들이 먼저 나서야만 한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시인들이 손을 잡고

이어도에서 평화의 연꽃을 피워야만 한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섬이 되어야 한다


이어도문학회와 이어도연구회가 손을 잡고

전설이 피워 올린 평화의 연꽃이 되어야만 한다


이어도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1. 용설란

이어도 가는 길가에 용설란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오래된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그중의 몇 놈이 수상하다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기다리는 님이 있는지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다 그 높은 전망대 위에서 손차양을 하고 먼 곳을 본다 


2. 탱자나무 울타리

이어도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와 세상을 구분하는 경계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이어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가야만 한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가득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꽃 피어있다 


3. 전혀 다른 세상

용설란 가로수 길을 지나 탱자나무 울타리 건너 이어도에 들어온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헌 옷을 모두 벗고 들어온 바람의 살결이 부드럽다 빈 몸이 된 나는 잠시 부끄러웠지만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옷을 입지 않는다 옷을 입지 않는 세상에서는 옷을 입으면 더 이상하다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 그런 이어도에서 나는 시나브로 이어도가 된다 


4. 비익조

이어도에는 비익조가 살고 있어요 삼광조와 팔색조가 살고 있어요 세상에서 눈을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눈을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새가 이어도에 돌아와 세상에서 날개를 잃은 또 다른 새를 만나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어요 팔색조와 삼광조 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살고 있는 비익조가 아직도 이어도에 있어요 


5. 이어도의 강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제주도에는 철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흔들리면서, 흔들리면서 덜컹거리며 흘러가는 바다의 열차가 있습니다 협괘열차의 추억이 있습니다 


6. 게으른 몽상가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어요 그는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끔은 가지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그 나무에 올라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또 다른 이어도를 바라보곤 하지요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요 


7. 산책

산책은 살아있는 책입니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입니다 


8. 별무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별들이 하늘에 뿌리를 박고 반짝이는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별들의 뿌리를 사람들은 푸른 잔디라고 말합니다 잔디로 덮여있는 무덤을 보십시오 무덤들은 달을 닮았습니다 달의 일부가 자꾸만 보이지 않습니다 없어진 달은 바로 그 무덤 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은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9. 붉은점모시나비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오늘도 이어도에는 모시나비가 날고 상제나비가 날고 붉은점모시나비가 개미들의 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10. 멍텅구리 배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 납니다 나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기고 검은 멧돼지와 함께 동굴에서 살고 있는 붉은여우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이어도에 손님이 한 분 찾아왔습니다 그 거친 바다를 건너온 그도 역시 멍텅구리 배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몸과 마음이 바다에 젖어 있습니다 바다의 시퍼런 파도가 칼날로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탈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이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도 한 때는 복수하기 위해 발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역시 사랑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멍텅구리 배에서 새우를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멍텅구리 배에 팔아넘긴 그의 아내는 함께 공모하여 팔아넘긴 그 사내와 함께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날아와 꽂혔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복수의 칼날을 품고 그 짐승들에게 달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복수의 칼날이 녹슬어 사랑의 꽃으로 부활하기 전에는 이어도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11.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12. 시인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시인이 이어도에 살고 있어요 “시란 사람을 열고 사람에게 비로소 열리는 사랑의 문입니다” “나는 땅의 눈물 같은 그런 시 한 편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영혼이 투명한 시인이 살고 있어요 맑고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붉은 동백꽃의 시인이 살고 있어요 


13. 애련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내가 세상의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를 사랑으로 건져 올려준 너무나 고마운 연꽃이지요 나를 죽음에서 들어 올려준 너무나 크고 은혜로운 연꽃이지요 넓은 연잎으로 더러운 세상을 가리고 그 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이지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진실은 그 넓은 연잎 아래서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고 있지요 그리하여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14. 이어도 카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억새꽃과 유채꽃 이어도의 사람꽃이 10월의 메밀꽃과 감자꽃으로 지금 한창 흐드러지고 있습니다 


15. 이어도 사랑촌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습니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어도에서는 당신이 꿈꾸는 어떤 모습의 사랑도 가능합니다 세상에서 배우고 익혀 온 모든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랑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또한 섹스하고 싶을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섹스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런 곳입니다 


16. 이어도 부활촌

이어도에는 부활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이어도 부활촌에는 수목원이 있습니다 나무는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나무는 먼저 떠나지도 않고 배반하지도 않고 한없이 베풀어 주며 가르쳐줍니다 길은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없이 가르쳐줍니다 수목원 입구에는 워싱턴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습니다 워싱턴은 워싱턴에 두고 워싱턴 야자수만 가져왔습니다 나무들은 틀림없이 당신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분명히 부활할 것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부활촌에서 부활합니다 


17. 이어도 창작촌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어도 사랑촌을 거쳐 이어도 부활촌을 지나면 당신은 이제 당신의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어도만은 전쟁터가 아닙니다 이어도는 오직 우리들을 위한 아름다운 섬입니다 강한 나라가 아니라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이어도공화국 序

―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




꿈만 꾸었다 너무 오랫동안 꿈의 섬 이어도에서 살다가 지상으로 돌아왔다 꿈속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을 이 지상에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꿈과 삶과 글이 하나로 만나 행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어도공화국』을 쓰기 시작한다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시작한다 내가 쓴 모든 글들은 『이어도공화국』을 쓰기 위한 습작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일들은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연습이었다 나는 앞으로 100권의 『이어도공화국』을 쓸 작정이다 나는 앞으로 백 년 동안 [이어도공화국]을 만들 작정이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시나브로 할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서는 서두르지 않아야만 하리라 나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넘어, 백 년 동안의 꿈과 사랑을 위하여 출발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세상 읽기와 나만의 세상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나팔을 불며 시작한다

     

긴 꿈을 꾸었다 눈을 떠 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 없는 길을 걸어서 간다 

    

바다의 발걸음에 맞추어 해변의 모래밭을 걸어본다 바다의 발걸음소리에 맞추어 해안선을 읽어본다 

    

걷다가 문득 모래 한 알이 된다 가슴 하나가 전부인 모래알이 된다 눈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본다 입이 없는 모래 한 알이 부른다 귀가 없는 모래 한 알이 듣는다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전생에 나는 한 마리 낙타였다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놀려대던 한 마리 곱사등이 낙타였다 나는 이제 다시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어 산소를 만들기 시작한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평생 사랑하고 있다 모래알 하나는 모래알 하나만을 평생 사랑하고 있다 

    

또다시 바닷가 모래밭을 걷고 있다 너무나 먼 강을 따라 내려와 모래가 된 바위를 알고 있다

     

당신은 바다처럼 울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바다보다 깊이 울어본 적이 있는가

     

갈대는 봄부터 몸을 비운다 갈대는 봄부터 마음을 비운다 그런 갈대의 숲 속에 작은 개개비 둥지 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아직 황금빛 모래에 도달하지 못한 몽돌들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몽돌 속에는 저마다 빛나는 모래 한 알 들어있다 

    

바람은 자꾸만 나에게 바람이 되라고 한다 자꾸만 나에게 떠나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는 바람이 되라고 한다               

모래밭 끝에 숲이 하나 있다 그 숲으로 간다 용설란 가로수 길을 걸어서 들어가고 있다 길 가 용의 혀들이 싱싱하다

         

용설란 가로수 길 끝에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다 바람의 헌 옷들이 하얗게 탱자 꽃으로 꽃피어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문이 보이지 않는다 용설란 꽃대를 타고 내려온 한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나에게 비밀을 속삭여 주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는 로즈마리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로즈마리는 자줏빛 꽃잎을 터트렸고 나 또한 로즈마리처럼 자줏빛 꽃잎을 터트리며 걸었다 

    

로즈마리 숲을 지나 비익조를 만났다 삼광조와 팔색조도 만났다 비익조가 아직도 숲 속에 살고 있다 

    

라플레시아,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기 위하여 손도 잘라버리고 다리도 잘라버리고 오직 붉은 심장 하나로 살아가는 꽃

     

깊은 숲 속에 옹달샘이 하나 있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옹달샘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푸른 하늘 깊은 가슴속으로 날아오른다

     

옹달샘 곁에 오두막이 한 채 있다 숲 밖이나 숲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숲 속에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다 

        

오두막에서 나무처럼 살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이어도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큰 나무 같은 촌장님 이셨다 

     

이어도에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이어도 사람들은 이어도 숲에 나무를 함께 심고 함께 가꾸어준다 사과나무도 좋고 소나무도 좋다 이어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깊은 숲 속에 조촐한 집을 짓는다 옹달샘 곁에 옹달샘 집을 짓는다 무덤 같은 집을 짓는다 이어도에 나의 집을 짓는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이어도에 온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요한 방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 공동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어도 공동체 그런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 

    

이어도 사람들은 모두가 나무와 함께 태어난다 이어도 사람들은 무덤 대신 한 그루 나무와 등대로 남는다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는 것이 진리라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에도 나무는 홀로 고요하게 물을 온몸으로 뿜어 올리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거대한 나무 숟가락들이 숲을 이루었다 하늘을 휘휘 젓다가 하늘을 떠먹는 나무들이 있다 나무로 부활한 사람들이 있다 낮에 내가 다니던 길로 밤이면 착한 꽃사슴들이 둘러보리라 나무 숟가락들은 그들에게도 하늘 한 수저 떠먹여 주리라 

    

이어도에는 게으른 몽상가가 살고 있다 가끔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따라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죽어도 죽지 않는 책이다  

   

산책길에 어느 게으른 몽상가를 만났다 그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태어났다 바다를 건너온 그는 오늘 나를 만났다 

    

겨울나무는 모래시계처럼 몸을 크게 한 번 뒤집는다 나무들은 그렇게 하늘과 땅의 영혼을 제 몸 안으로 가득 끌어들인다 

    

이어도 사람들은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자서전을 쓴다 아름다운 자서전을 한 권 남기기 위하여 더욱 아름답게 살기를 꿈꾸고 실천한다  

   

이어도 숲 농장이 있다 이어도 숲 전체가 이어도 숲 농장인 셈이다 이어도 숲 농장에는 온갖 과일나무들과 온갖 채소들이 많다 이어도는 축복받은 땅이다 

        

이어도 수면실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수면실이 있다 이어도 수면실을 찾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 속에서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하나 찾을 수 있다  

   

이어도 자살촌이 있다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희망촌이 있다 이어도 자살촌은 가난할수록 좋다  

   

이어도 사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없는 사랑이 없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랑이 있다 이어도 사랑촌에서는 언제나 몸부터 사랑하지 않고 마음부터 사랑을 한다 영혼부터 사랑을 한다 이어도 사랑촌은 그렇게 깊은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이 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이 새롭게 부활할 수 있는 곳이다 이어도 부활촌에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부활하고 있다 

    

이어도 창작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풍경소리가 있다 세상에서 길을 잃은 당신은 이어도 창작촌에서 당신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옹달샘처럼 끊임없이 생명이 태어나는 곳이다 이어도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어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 이어도에서 가족이란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어도에는 이어도의 꿈을 이어주는 이어도 생명촌이 있다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어린이들의 꿈동산이 있다 옹달샘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에는 아직도 그런 아이들의 이어도 꿈동산이 있다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사람들 대부분의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모든 생활 속에는 명상이 들어있다 그리하여 이어도에는 깊은 이어도 명상촌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이 있다 이어도에는 오래된 사람들이 많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살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어도에는 참으로 많은 어른들이 있다 이어도 하늘촌은 이어도 생명촌과 이어도 꿈동산 바로 곁에 있다 

    

이어도에는 군주도 따로 없고 백성도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오직 다른 생명들처럼 사람은 모두가 오직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어도에서는 개인과 공동체의 무한한 행복이 최고의 덕목이다 

    

이어도에서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서는 처음부터 결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어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다 이어도는 다른 어떤 세상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다   

  

이어도를 아시나요 아름다운 나라의 끝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곳 당신은 그런 나라 이어도를 아시나요 이어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어도를 당신은 아시나요  

       

제주도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에는 강이 있습니다 깊은 강이 있습니다 맑은 강이 있습니다 길고 선명한 상처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황조롱이가 살고 있습니다 황조롱이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젖과 자궁이 없어서 가장 안타깝습니다   

   

이어도는 별무덤입니다 도시를 떠난 별들이 모여 사는, 별똥별들이 부활하는 별무덤입니다 이어도 하늘에는 지금 별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들의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이 지금 이어도 하늘을 가고 있습니다      

거름이 되지 못하는 똥물은 물러가고 아직도 거름이 될 수 있는 따뜻한 똥만 남아라 붉은점모시나비가 날던 그 자리에 곧 부용화가 피어나리라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 배 한 척이 있습니다 그 멍텅구리 배를 볼 때마다 내가 한 때 갇혀 살았던 지옥의 멍텅구리 배 생각에 다시 멀미 납니다 오늘도 이어도 앞바다에 멍텅구리배가 있습니다 

    

이어도에는 아버지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어머니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남편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아내가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자식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대통령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는 국회의원이 따로 없다 이어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길을 간직한 그런 거울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이어도에는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너나들이가 살고 있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이 시대에 너는 나고 나 또한 너인 그런 아름다운 시인이 살고 있어요   

       

이어도에는 연꽃이 피어 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향기로운 사랑의 연꽃이 꽃 피어 있어요 나도 이제는 그렇게 은은한 향기의 연꽃이 되고 싶어요 

    

가장 아름다운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사람꽃입니다 이어도 카페에서는 그런 아름다운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향기를 선물하는 시인이 있다 그는 평생 로즈마리를 길렀고 사람들은 평생 그에게서 로즈마리 향기를 가져갔다 

    

이어도에 한 아이가 찾아왔다 아직 오지 말아야 할 아이가 서둘러 찾아왔다 그 아이는 인천 효성동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놀랍게도 아버지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단다 준수의 아버지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내가 전생에 살았던 세상 속으로 걸어서 간다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은어들을 만났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어축제에 초대받은 그들은 그냥 불러주기만 해도 고마운 고향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축제까지 마련해 주겠다는 인간들에 대하여 너무나 황송하다며 온몸이 빛나는 꿈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이어도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배를 타고 왔으며 나는 헬기를 타고 왔다 이어도는 내 꿈의 고향이었고 그가 새롭게 부활한 낙원이었다

     

바람이 차다 바람이 파도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파도가 높다 파도가 마라도 가슴팍을 후려친다 고구마같이 생긴 마라도에서 군고구마를 먹고 싶다 퉁소를 불던 사람이 불을 놓아버린 이후로는 아무리 퉁소를 불어도 뱀들이 몰려들지 않는다 

    

가오리 한 마리 바다 위에 납작 엎드려있다 나는 그 가오리 등을 타고 바다에 떠 있다 하멜이 지나갔던 길 위로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모세의 지팡이 같이 생긴 뱀이 한 마리 지나간다 나는 모세가 아니므로 그 뱀을 집어 들지 못한다  

    

산 안에 방이 있는 산이 있다 산과 산 사이에 방이 있는 산, 방 안에 산이 있는 방이 있다 방과 방 사이에 산이 있는 방, 나는 그런 산방산 안에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흰 사슴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한라산을 오른다 1100 도로를 달려 올라간다 영실 휴게소에서 약수를 떠먹는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한라산 훼손 지 복구용 흙 그 흙 한 봉지 배낭에 짊어지고 올라간다  

    

준수와 함께 세상으로 건너오는 길에 나는 은어들을 만났다 은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그만 준수를 잃어버렸다 준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이 낡은 집에서 살기로 작정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니다 우연과 필연은 어차피 같은 말이다 나도 처음에 문을 열어보고 그냥 돌아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 나는 늘 전망 좋은 사람과 살고 싶다  

   

첫날밤을 치러 내기 위하여 밤새 청소를 한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온몸으로 청소를 한다 몸과 마음을 청소하다가 그냥 쓰러져 잠을 설친다   

  

바다와 하늘과 바람의 섬 이어도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지상으로 다시 건너왔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새롭게 출발한다 출발은 이렇게 늘 가슴 설레며 아득하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살았던 이어도와 이 세상은 참 많이 다르다 이어도에서는 집은 집이고 땅은 땅이다 빈집이 있으면 그냥 살고 싶은 사람이 살면 되고 빈 땅에 씨를 뿌리고 싶으면 아무라도 씨를 뿌리면 되었다  

   

거실과 방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와야만 했다 어느 누가 살았었는지 몰라도 떠나간 뒷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전기를 만드는 사람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이것은 전기 탓이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 투성이다     


빈 집은 빨리 낡는다 비어있는 사람도 일찍 죽는다 새로운 집을 만들기보다는 헌 집을 고쳐 쓰기가 더 어렵다 거실 청소를 한다 해탈이 따로 없다 해탈과 탈피는 어디라도 있다 

    

청소는 끝이 없다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많은 여자들의 주 업무가 청소일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청소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듯싶다 하지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청소를 한다   

  

뼈대 없는 내가 뼈만 있는 발전소에 있다 나는 지금 뼈대 속에 살아 있다 발전소에서 나는 지금 가랑이를 쫘악 벌리고 불을 지피고 있다     


번쩍, 번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한다 하느님은 오늘도 하늘 발전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계신다     


나무들 속에는 발전소가 있다 부지런히 퍼 올리고 있다 나무들은 밤낮없이 땅의 소식을 하늘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남자는 숟가락으로 팍팍 퍼서 먹는다 여자는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는다 나는 잠을 자다가 가끔 나의 숟가락을 만져본다 

         

첫눈이 어지럽게 내린다 나는 이제 첫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언제나 시작만 있었다 길 입구에서 나는 언제나 나의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전기를 만들고 있다 불빛을 만들고 있다 별빛을 만들고 있다 그리움을 만들고 있다 

    

전생에 나의 이름은 진성(鎭星)이었다 아버지 친구 분이셨던 신발가게 아저씨가 술 한 잔 얻어 마시고 지어준 이름이라고 들었다 

    

쩨쩨하게 살지 말고 통 크게 살아보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살아보자 목숨을 걸어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에 목숨을 걸어볼 것인가 내 평생의 소망에 목숨을 한 번 걸어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공화국]을 기필코 만들어보자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살고 싶다 옹달샘의 샘물이 되고 싶다 그 옹달샘에는 가끔 병든 새들이 찾아오면 좋겠다 그 병든 새들이 옹달샘에서 나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력을 회복한 새들이 다시 창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이미, 그 새의 몸이 된 나 또한, 그와 함께 깊은 궁창이 될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먼저 아름다운 산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산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오두막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작은 쉼터를 만들고 싶다 그 쉼터에는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절망이 너무 깊어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들이 아주 가끔 찾아오면 좋겠다 

     

나무와 함께 살다가 나무로 부활하고 싶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무덤 대신에 나무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나무로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 죽어서도 서로 곁에서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부는 날은 가끔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이어도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이어도공화국 베이스캠프를 친다 서귀포 화순항 내려가는 길, 월라봉 입구 퍼물논에 본거지를 먼저 만든다 [이어도공화국]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앞표지
배진성 프로필
제1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제2부
제3부
제4부
제5부
제6부
뒤표지






배진성 프로필

오른쪽에 보이는 구멍가게 건물 아래채와 본채 고향집 
고향집 옥상에서 찍은  빨래 하시는 나의 어머니
고향집 바로 앞에서 찍은 아버지 말년의 모습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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